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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오르는 사람

by 이희숙

여전히 더위는 계속되고 오후가 되어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며 잠시 정지된 시간은 고요함안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펼쳐지게 한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 유행가 가사처럼 우산을 받쳐 준 사람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나에게도 지금까지 35년이란 시간 속에 함께 해 온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나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 초임 발령지에서 중학교 2학년의 길석을 만나 금까지 쭈욱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닌 2년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추억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길석인 그림이 그리고 싶어 미술반에 들어오겠다고 말한 시간부터 미술부장이 되어 줄곧 책임감 있게 리더의 역할을 다했었다.

수업이 끝난 후 미술반 아이들과 꽤나 긴 시간 그림을 그린 후 집으로 돌어갈 무렵은 해 질 녘의 긴 그림자가 운동장에 드리운다.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울음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을 집에 한 사람 한 사람 데려다주고 맨 마지막에 자신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미술반 아이들과 듣겠다며 라디오 프로그램에 강인원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신청해 미술반 활동 중 신청곡을 들으며 자신들의 이야기가 라디오에 나온다며 신기해했던 억이 떠오른다.

옥게리 폭포로 야외스케치를 갔었던 기억들이 지금도 떠오다. 씨가 너무 더워서일까?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생각만 해도 시원해진다

얼마 전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던 중 길석이로부터 종이학을 매일 접었다는 이야기를게 되었다.

1000마리의 종이학을 접어 543마리를 나에게 주었다는 이야기에 "아 그랬었구나" 하고 있는 차에, 내 앞에 앉아 있었던 다른 여선생님에게도 457마리를 주었다는 소리에 살짝 질투를 부렸던 기억이 나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었던 것 같다.

금에서 문자를 확인해 보니 그 선생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이 감사해서 나에게 주려던 종이학 1000마리 중 457마리를 그 여선생님님에게 드린 거라고...

그제야 오해가 풀린 것이다. 나는 그것도 생각 못하고 "갑자기 왜 그 여선생님 이야기가 나온담" 하고 기분이 언짢았던 것 같았다. 일종의 질투심에 사로 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난 뭐지" 하고.

아마도 길석이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하하하' 하고 수다스럽게 웃을 것이다.

갑자기 전영록의 노래 중에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노래가 떠오른다.

다른 어떤 기억보다 중학교 시절의 모든 기억들이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길석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얼마 전 길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무언가 분위기가 바뀌었음이 느껴졌었다.

엄청 수다스럽고 말이 많은 아줌마들처럼 언제나 재미있고 웃음이 넘쳤는데 조금은 과묵해진 듯 특유의 유쾌함이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길석을 만난 시간이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을 만큼 오래되었음이 실감 났다.

아! 이런 느낌이 바로 '나이가 들어간다'는 느낌이구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냥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15살의 어린 소년이 주말이면 어김없이 동서남북 대한민국을 걸어서 탐방하고, 사진과 여행을 좋아하며, 전문가적 식견으로 거침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직업인으로서의 모습을 보며 또 다른 길석을 보게 된다.

전화 한 통화로 나의 기분을 이렇게 저렇게 바뀌 놓았던 시절, 특유의 유머기질과 밝은 에너지로 주변의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어 주었던 시절, 비눗방울 방울 벙울 무지개빛 풍선이 여기저기 퍼지며 해피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어느 순간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어 주기도 했었던 시절, 길석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난 그래도 예전에 말이 많고 수다스러운 아줌마들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그 시절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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