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밤 열 시의 종이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렸는지, 시간은 마침내 거대한 추가 달린 문처럼 텅 빈 도서관의 입구를 닫을 채비를 했다. 마지막 종소리의 잔향이 낡은 서가들 사이에 스며들어 책 먼지와 함께 공기 중에 부유하는 듯했다. 그 소리는 마치 먼 시대에서 보내온 전보 같아서, 해독할 수 없는 슬픔과 불가해한 안도감을 동시에 자아냈다. 나이 든 경비 아저씨가 익숙한 미소와 함께 들어섰다. 그 미소는 오랜 시간 벽에 걸려 빛과 어둠에 함께 바랜 풍경화 같았고, 깊게 팬 주름은 굽이치는 강물처럼 한 생애의 희로애락이 흘러간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별다른 말없이, 정해진 의식을 치르는 사제처럼 층계를 오르내리며 하나씩 조명을 내렸다. '탁, 탁.' 금속성 스위치 소리가 정적을 깨뜨릴 때마다 거대한 책의 산맥이 하나씩 그림자 속으로 침잠했다. 이제 모든 서가의 불이 꺼지고, 마지막 남은 책 속의 이야기도 밤의 품속으로 스며들어 잠들 시간. 잉크로 박제된 수만 가지의 삶과 감정들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는 시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에게 밤은 다가올 내일이라는 거대한 암초 앞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작은 조각배와 같을 것이다. 그들은 하루의 노동으로 소진된 마지막 에너지를 그러모아, 얼마 남지 않은 해방감을 초조하게 움켜쥐거나 일찌감치 체념의 잠자리에 들리라. 내일의 출근길이라는 익숙한 형벌을 예감하며, 짧은 휴식마저도 다가올 고통의 서막처럼 여기는 그들. 그러나 졸업 후 이름뿐인 자유를 얻은, 실상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에서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다 끝내 마모되어 이탈한 톱니바퀴인 나에게 밤은, 여자와 살을 섞고 숨결을 나누는 토요일 밤의 잔열(殘熱)을 제외하고는, 그저 무한히 반복되는 트랙의 또 다른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새벽과 아침, 낮과 저녁, 그리고 다시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나는 목적 없이 실려가는 불량품이었다.
도서관의 형광등 불빛이 만들어낸 내 그림자는 멸종 직전의 고대 생물처럼 길고 기괴하게 늘어져, 책장 사이의 짙은 어둠을 질질 끌고 다니며 출구를 향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것은 나의 분신이자, 내면에 도사린 무기력과 권태의 가시적인 현현이었다. 둔탁한 유리문을 밀고 나서자, 늦가을의 밤공기가 예고 없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차갑다기보다는 서늘했고, 도시의 매연과 가로수의 젖은 흙냄새,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저녁 식사 냄새가 뒤섞인 복합적인 향기를 품고 있었다. 계절을 잊은 듯한 귀뚜라미 소리가 아스팔트 균열 틈 어디선가 처연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도시의 단단한 표면 아래 억압된 자연의 마지막 절규처럼 들렸다.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다. 수백만 개의 인공의 빛과 끊임없는 소음으로 가득 찬 표면 아래, 깊고 서늘한 침묵과 고독이 거대한 강처럼 도사리고 있는, 위태로운 경계선 위를 걷는 곡예사처럼.
때때로 어제가 오늘을 잠식하고, 오늘은 내일의 완벽한 복제품이 될 운명인 듯 느껴진다. 같은 거리, 같은 건물, 같은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의 온도마저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읽기 힘든 피로와 깊은 무관심이 똑같은 활자로 인쇄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각자의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행성 같았다. 이 모든 것은 누군가 거대한 복사기에 세상을 넣고 무한 반복 버튼을 누른 결과물 같다. 심지어 내 발걸음의 리듬조차, 어제 이 길을 내디뎠던 보폭과 속도를 망령처럼 정확하게 따라 하는 듯한 기이한 착각마저 든다. 시간은 원형으로 흐르고, 나는 그 원의 중심에 못 박힌 채 제자리를 맴도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사실, 책임이라는 견고한 무게와 구속이라는 달콤한 안정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해야 하는 '온당한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자, 역설적으로 자유가 주는 해방감 또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혹은, 그 본연의 빛을 잃어버렸다. 의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무한한 선택 가능성이란 이름의 황량한 사막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 하나 없는 그 막막한 공간 속에서, 나는 서서히 말라갔다. 하루는 탄성을 잃은 고무줄처럼 무의미하게 늘어졌고, 생각은 수면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 돌처럼 단순하고 무거워졌다. 졸업 직후 몇 달간 나를 밤의 포로로 만들었던 지독한 불면증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자정을 넘겨 깨어있는 일도, 새벽녘의 예민한 감각으로 문득 눈을 뜨는 일도 없다. 잠은 더 이상 갈망의 대상이 아니라, 무의미한 하루를 끝내는 도피처에 불과했다. 자유는 내게 감당하기 힘든 크기의 옷이 되었고, 무한한 선택지는 나를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고장 난 나침반처럼 제자리에서 헛돌게 만들었다. 나는 자유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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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네모난 내 방, 창문 틈새로 스며든 달빛은 바닥에 희미하고 차가운 강을 그리며 고요히 누워있다. 그 푸른빛이 감도는 정적 속에서, 나는 종종 여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그녀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의 얼굴. 세상의 모든 가면을 벗어 던진 듯한 절대적인 평온함. 시간의 흐름마저 멈춘 듯한,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완전한 무방비함. 그 얼굴은 내가 아는 유일한 성역이자, 혼돈으로 가득 찬 내 삶의 유일한 닻이었다.
여자는 잠이 많다. 아주, 아주 많다.
그녀와 함께 눈을 떠 같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어본 기억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녀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이 마침내 서서히 열리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수십 년 만에 지구를 찾아오는 혜성을 관측하거나 개기일식의 장관을 보는 것만큼이나 희귀하고 경이로운 경험이다. 그런 그녀가 어엿한 직장생활을, 그것도 내가 어렴풋이 짐작하기에 꽤나 치열하고 살벌해 보이는 광고업계에서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가사의에 가깝다. 아침의 그녀는 마치 방전된 배터리 같아서, 세상의 모든 소음과 빛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이불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기만 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매일 아침 전사처럼 무장하고 전쟁터 같은 세상으로 나아가는지, 나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의 변명 아닌 변명들은 계절마다 바뀌는 레퍼토리처럼 다양했다. 어느 날은 나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완전히 풀려 감당할 수 없이 잠이 쏟아진다고 했다. 내 존재가 그녀에게는 가장 강력한 수면제이자 안정제라는 의미였다. 또 다른 날은 주중에 쌓인 만성적인 수면 부족을 주말에 몰아서 보충하는 생존 전략의 일환이라고도 했다. 때로는 잠든 내 귓가에, "네 옆에서만 이렇게 깊이,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어"라는, 내 메마른 자존심을 한밤중의 이슬처럼 살짝 적셔주는 달콤한 속삭임을 덧붙이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의 진위를 따질 생각은 없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그녀 역시 진심이었을 테니까. 그녀의 잠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이자, 동시에 나에 대한 가장 깊은 신뢰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토요일 밤, 우리는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익명의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모텔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녀의 집은 독립하기에는 아직 먼 부모님의 감시가 있었고, 나의 작은 자취방은 두 사람의 욕망과 피로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비좁고 누추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도, 위치도 매번 바뀌는 그 네모난 방들을 우리의 임시적인 왕국으로 삼았다. 그곳은 최소한의 가구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이전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희미한 흔적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녀가 여행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놓는 작은 소품들—좋아하는 향의 디퓨저, 커플 머그잔, 부드러운 질감의 무릎담요—덕분에 어딘지 모르게 푸근하고 아늑한 느낌을 풍겼다. 그녀는 어떤 척박한 공간이든 자신만의 색깔로 물들이는 능력이 있었다.
우리는 때로 편의점에서 사 온 값싼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의 사소한 추억, 직장 상사에 대한 불평, 언젠가 함께 떠나고 싶은 여행지에 대한 막연한 계획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이내 침묵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향기와 내 살갗에 와 닿는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의 미세한 움직임. 그런 순간이면 세상의 모든 소음은 멀어지고, 오직 우리 두 사람의 존재만이 우주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런 밤이면 대개 내가 먼저 술기운과 나른한 피로에 잠식당해 잠의 강으로 떠내려가고, 그녀는 스마트폰의 차가운 푸른빛을 얼굴에 받으며 홀로 밤의 섬을 지키곤 했다. 내가 잠든 사이,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 작은 스크린 속 세상을 들여다보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침이면 역할은 언제나 마법처럼 뒤바뀌어 있었다. 내가 먼저 깨어나,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순서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마치 서로의 잠을 지키는 충직한 보초처럼, 번갈아 서로의 가장 무방비하고 순수한 모습을 지켜보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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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든, 여자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좋다. 그것은 내 무기력한 삶에 주어진 유일한 특권이자 비밀스러운 기쁨이다. 스크린 속 배우가 아닌 이상, 스스로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잠든 얼굴은 오직 타인에게만 허락된 풍경이다. 따라서 감긴 눈꺼풀 아래 숨겨진 그녀의 얼굴은, 그녀 자신에게는 영원히 미지의 영역이겠지만, 나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나만의 은밀한 특권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누구에게도 공개된 적 없는 비밀의 정원을 홀로 거니는 것과 같은 감각이다.
가느다란 눈썹이 꿈의 파편을 따라 미세하게 떨리거나,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아기처럼 고른 숨결이 새어 나올 때, 나는 세상의 가장 깊고 원초적인 비밀 하나를 엿보는 듯한 특별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녀의 숨소리는 밀물과 썰물처럼 규칙적이고, 그 평화로운 리듬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내 안의 불안과 혼돈마저 잠잠해지는 듯하다. 그것은 경건함과 관음증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선 감정이다. 그녀의 가장 내밀한 순간을 훔쳐보고 있다는 미세한 죄책감과, 그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지켜주고 있다는 숭고한 책임감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
여자의 잠든 모습은 평온하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잠들었을 때 '비로소' 완벽하게 평온하다. 깨어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리 정교하게 덧칠된 유화 아래라도 숨길 수 없는 스케치의 흔적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의 그림자와 어렴풋한 분노 같은 것이 늘 배어 있다. 프라이머와 파운데이션, 컨실러로 겹겹이 쌓아 올린 두꺼운 화장은 그녀의 갑옷이자 가면이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모든 것을 뚫고 나와 언제나 무언가를 갈망하며 허공을 헤맨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공허함일 수도 있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 깊이 자리 잡은 오래된 상처의 흔적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조차 감히 알지 못하는, 그녀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원초적인 슬픔의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 도시의 소음이 그로테스크한 교향곡처럼 절정에 달할수록, 그녀의 웃음소리는 더욱 크고 날카롭게 공간을 갈랐다. 그러나 그 광란에 가까운, 때로는 절규처럼 들리는 웃음 뒤편에 짙게 드리워진 서늘한 공허함을 나는 때때로 목격한다. 가끔 현란한 클럽의 스트로브 조명 아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변모한다. 맥박 치는 베이스 리듬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고, 낯선 이들의 탐닉하는 시선을 자양분 삼아, 쉴 새 없이 독한 술잔을 비우는 모습은 화려하게 타올랐다 순식간에 재로 변하는 불꽃놀이를 닮았다. 그 순간의 그녀는 누구보다 찬란하지만 동시에 위태롭고, 언제나 소멸의 비극적인 예감을 품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름다움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녀는 우리 둘만의 은밀하고 고요한 공간, 이 임시적인 모텔 방을 찾아 안식할 때를 제외하고는,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끊임없이 타인과의 연결을 갈망한다. 금요일 오후가 되기 무섭게, 그녀의 손가락은 스마트폰 위에서 쉴 새 없이 춤을 춘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주말 약속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그녀의 스마트폰은 친구와 동료들의 메시지로 쉴 새 없이 울어댄다. 그녀는 그 진동과 소리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잠시라도 세상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듯했다. 때로는 우리가 가장 깊은 친밀감을 나누는 순간, 내 품에 안겨 사랑을 속삭이는 그 찰나에도, 그녀의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스마트폰 액정 위를 부유한다. 혹시 지금 이 순간,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더 짜릿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공포, 이른바 '포모(FOMO)' 증후군에 사로잡힌 듯이.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연민과 함께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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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육체적인 결합은 언제나 격렬하고, 때로는 절박했다. 그것은 단순한 쾌락의 교환을 넘어선, 각자의 고독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어둠이 내려앉은 모텔 방, 창밖 도시의 네온사인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나신 위로 기묘한 빛과 그림자의 문신을 새겼다. 나는 그녀의 몸을 탐했다. 쇄골 아래 움푹 파인 곳에 입술을 묻고, 부드럽게 솟아오른 유방의 정점을 혀끝으로 핥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언제나 달콤하면서도 서늘한 향기가 났다. 정성껏 고른 바디로션의 인공적인 향기와 그녀 본연의 체취가 뒤섞인, 나를 중독시키는 향기였다.
그녀의 손길은 언제나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내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헤치고, 버클을 풀어 내 바지를 끌어내릴 때, 그녀의 눈은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우리는 침대 위에서 짐승처럼 얽혔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치고, 내 일부를 그녀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흡.’ 하고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뜨겁고 축축한 내부가 나를 집어삼킬 듯이 조여왔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점차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삐걱이는 침대 스프링 소리와 우리의 거친 숨소리, 살과 살이 부딪히는 질척한 마찰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내 등 위로 손톱을 세워 길고 붉은 상처를 남겼고, 쾌감의 절정에서 내 이름을 비명처럼 외쳤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고통과 황홀함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내부에서 나 자신을 쏟아내며,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땀으로 젖은 채 뒤엉켜, 심장 박동이 서서히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두 마리의 짐승 같았다. 그러나 그 격렬한 정사가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것은 완전한 충족감이 아니라, 언제나 미묘한 공허함과 슬픔이었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 서로의 영혼에 닿으려 했지만, 언제나 그 표면만을 맴돌다 지쳐 잠드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들이 까마득한 밤하늘에 인공의 별자리를 그리고 있다. 저마다의 창문 뒤에는 각기 다른 욕망과 슬픔, 희망과 절망의 이야기가 숨 쉬고 있을 터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처럼 서로의 온기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고 있을 테고, 또 다른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길 찾기를 포기한 채 차가운 고독 속에 홀로 잠겨 있을 것이다. 나는 저 무수한 불빛의 군집을 바라보며, 거대한 우주 속에 던져진 미아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여자를 언제, 어디서부터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의 안개 속에 희미하게 가려져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명확한 시작점을 가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라는 존재를 내 삶의 의미 있는 변수로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그녀를 둘러싼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과 목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학원 동기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어느 소란스러운 밤의 한가운데였다는 것만큼은 확신한다. 시끄러운 음악과 담배 연기, 값싼 술 냄새가 자욱했던 홍대의 어느 지하 바. 그들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혹은 무리의 본능적인 이끌림처럼, '밤놀이'라는 공통의 의식 속으로 서로 한 발짝씩 더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묵시적으로 나 또한 그들의 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려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떠들썩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처음으로 내 귓가에 하나의 의미 있는 파장으로 각인되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잊고 있던 어느 여름날의 향수 냄새처럼, 낯설면서도 기묘하게 친숙한 느낌이었다.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그녀와 나란히 바 카운터에 앉게 되었을 때,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얼음이 담긴 잔을 뱅글뱅글 돌리며,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투명한 액체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저와 같이 있는 게 좋아요?"
그 단순한 질문 속에 담긴 여러 겹의 의미와 그녀의 의도를 곱씹어볼 겨를도 없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쩌면 그것은 내 무의식이 건넨 대답이었을 것이다.
"때로는요."
그녀는 알 수 없는, 슬픔과 호기심이 뒤섞인 듯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래요. 가끔은. 하지만 오늘 밤은 아니에요."
그 말은 나에 대한 명백한 초대장이자, 동시에 그녀 자신의 어떤 외로운 상태에 대한 솔직한 고백처럼 들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화려한 웃음 뒤에 숨겨진 깊은 고독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의 중력에 이끌리는 두 개의 행성처럼 각자의 궤도를 조금씩 수정하며 서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때로는 너무 가깝게 느껴져 서로의 열기에 숨이 막힐 듯 부담스러웠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 불안에 떨기도 했다. 그 위태로운 밀고 당김의 춤을 얼마간 추었을까. 어느 늦은 밤, 술기운과 감정적 피로에 완전히 지친 그녀는 처음으로 나의 작고 누추한 방, 내 시선 앞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목격한 그녀의 깊고 평온한 얼굴.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뒤의 고요한 바다 같은 그 모습이, 지금까지도 내 기억의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필름으로 남아있다. 그 순간, 나는 어쩌면 사랑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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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깨어있을 때 그녀가 보여주는 통제되지 않는 열정과 불안, 그리고 잠들었을 때 드러나는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 중, 과연 어느 쪽이 진짜 그녀에 더 가까울까. 아니면 그 둘 모두가 그녀의 진실된 모습이며, 그녀는 다만 빛과 어둠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려 평생을 애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녀의 그 어떤 부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깨어있는 그녀의 위태로운 에너지와 예측 불가능한 매력인가, 아니면 잠든 그녀가 주는 완전한 평화와 안정감인가. 어쩌면 나는 단지 그녀의 평온한 잠을 통해, 나 자신의 혼란스럽고 방향 잃은 내면을 잠재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얻는 위안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존재일지도.
밤은 소리 없이 더욱 깊어지고, 도시의 표면을 뒤덮었던 소음은 서서히 잦아들어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는 희미한 배경음악처럼 멀어진다. 이제 이 네모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녀의 규칙적이고 나지막한 숨소리뿐이다. 들숨과 날숨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리듬. 나는 그 생명의 소리에 의식을 맡긴 채,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파도를 탄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깨어있을 때의 의식적인 자아와 잠들었을 때의 무의식적인 자아,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매일 밤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의식과 무의식, 빛과 어둠, 현실과 꿈이 교차하는 그 흐릿한 경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철학적인 생각에 잠긴다.
달빛이 낡은 커튼의 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얼굴 윤곽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콧날과 광대뼈, 도톰한 입술 위로 은빛 가루를 뿌린 듯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그 한 폭의 정물화 같은 장면을 온전히 내 안에 담아두려 애쓴다. 이 순간은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애틋하다. 내일 아침이면 그녀는 다시금 갑옷 같은 화장을 하고, 소란스러운 세상의 중심으로 전사처럼 뛰어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하루를, 이 도시의 무관심한 군중 속에서 외로운 섬처럼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고요한 밤의 한가운데에서는,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 온전히 함께 머물러 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복잡함과 의무, 그리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여자의 잠든 모습은, 비로소, 완전하게, 평온하다. 그리고 그 깊고 흔들림 없는 평온함 속에서, 방향을 잃고 끝없이 표류하던 고장 난 나침반 같던 나 또한 아주 잠시나마, 기댈 곳 없는 영혼의 안식을 찾는다. 그녀의 잠은 나에게 구원이다. 그녀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잠든 채로, 나를 살게 한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아주 잠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기 전까지만이라도, 이 지독한 세상과 화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