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by 남킹

여자

월요일 아침, 도시라는 거대한 생체의 혈관인 지하철은 어김없이 전날의 휴식이 남긴 나른한 찌꺼기처럼, 혹은 다가올 한 주의 중압감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부풀어 오른다.

새벽의 희미한 푸른빛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부터, 이 쇳덩이 뱀은 꾸역꾸역 사람들을 삼키고 또 뱉어낸다. 도시의 심장부, 회색 빌딩들이 경쟁하듯 하늘을 찌르는 그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열차는 숨 가쁘게 사람들을 게워내지만, 마치 블랙홀처럼 더 강력한 흡인력으로 새로운 인파를 빨아들여 빈틈이란 단 한 뼘도 허락하지 않는다.

낡은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이미 포화 상태를 넘어 팽창한 객차 안, 사람들은 서로의 몸에 짓눌리고 뒤엉킨 채, 검붉은 콩 시루 속에서 질식할 듯 익어가는 콩나물들 마냥 그 미세한 틈새를 용케 비집고 들어와 저마다의 불안정한 영역을 확보한다. 그것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에 가까웠다.

몇 차례의 신경질적인 경고음과 함께, 문은 닫히려는 의지와 닫히지 않으려는 마지막 저항 사이에서 힘겨루기를 하듯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밀려 들어온 누군가의 구겨진 외투 자락을 아슬아슬하게 물고 나서야, 문은 거친 한숨을 몰아쉬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끼이이익— 낡은 쇳덩이가 서로 비벼대며 내는, 신경을 긁는 듯한 마찰음. 마치 제 육중한 몸뚱이를 지탱하기 힘겨워하는 거인의 고통스러운 신음처럼, 낮고 둔중한 진동이 차가운 바닥을 타고 발바닥을 통해 온몸의 신경 말단까지 아릿하게 스며들었다. 열차는 어둠침침하고 습기 찬 터널 속으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힘처럼 서서히, 그러나 단호하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다음 역이라는, 또 다른 혼돈과 익명성이 예고된 지점을 향하여.

문가, 차갑고 뿌연 유리창에 흡착된 초겨울의 파리 마냥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나는, 열차의 요동침에 튕겨 나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텼다. 어깨를 파고드는 핸드백의 낡은 가죽끈을 간신히 고쳐 잡고, 구겨진 외투 자락을 여미며 발 디딜 곳을 확보하려 애썼다. 불안정한 자세로나마 겨우 균형을 잡고, 습관처럼 희뿌연 유리창 너머 어둠과 객차 안의 풍경을 번갈아 훑었다. 나의 시선은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고, 낯선 얼굴들의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부유했다.

무표정. 그것은 이 지하 공간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거대하고도 불변하는 표정이었다. 팬데믹의 유산처럼 여전히 얼굴의 절반을 가린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빛들은 대부분 초점을 잃고 허공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거나, 손안의 작은 사각형 액정, 그 현란한 빛의 감옥 속에 깊이 침잠해 있었다.

삶에 지친 중년의 남자, 정교하게 화장했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여자, 세월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노인,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듯한 앳된 학생. 그들은 서로의 체온과 내쉬는 숨결을 강제로 공유하면서도, 마치 두꺼운 유리 벽에 둘러싸인 섬처럼 각자의 견고한 고독 속에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저마다의 내밀한 상념, 어젯밤의 뒤척임, 풀리지 않는 생활의 문제들, 혹은 다가올 하루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뿌리 깊은 불안감에 휩싸인 채. 침묵은 납처럼 무겁게 객차 안을 짓눌렀고, 때로는 진공의 상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열차가 예고 없이 급정거를 하거나, 어둠 속에서 급격하게 곡선 구간으로 접어들 때면, 그 강고해 보이던 부동의 평화는 일순간 산산조각 났다. 덜컹! 귀를 찢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객차 안의 모든 몸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군무를 추는 마리오네트 인형들처럼, 혹은 가을 들판을 휩쓰는 거센 바람에 일제히 쓰러지는 마른 억새들처럼 같은 방향으로 격렬하게 휘청거렸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 가면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무표정의 표면에 미세하지만 선명한 균열이 일었다.

그 찰나에 드러나는 표정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꿈의 심연이나 찬란한 몽환의 저편에서 현실 세계로 막 숨 가쁘게 끌려 나온 사람의 그것처럼 생생하고 당혹스러웠다. 누군가는 순간적인 불쾌감에 미간을 날카롭게 찌푸렸고, 다른 누군가는 자조적인 쓴웃음처럼 입꼬리를 비틀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아이처럼 놀란 눈을 잠시 크게 뜨기도 했다. 그 찰나의 시간 속에 피어났다 스러지는 무수한 표정의 파편들은, 마치 메마르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고비사막에 아주 짧게 허락된, 기적과도 같은 우기(雨期) 동안, 타는 듯한 갈증으로 잠자던 땅을 뚫고 삽시간에 저마다의 고유한 색깔과 형태로 폭발하듯 피어나는 수천수만 송이 야생화의 현란하고도 처연한 군무를 목격하는 듯했다.

아, 그 덧없는 사막의 꽃들. 얼마나 길고 혹독한 인고의 세월을 뜨거운 모래 속 깊은 곳에 씨앗의 형태로 숨죽인 채 견뎌왔을까. 마침내 하늘이 인색하게나마 내려준 한 줄기 단비, 그 생명의 물줄기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목마름을 해갈한다.

살아 숨 쉬는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지닌 가장 원초적이고 거스를 수 없는 숙명, 종족 번식이라는 단 하나의 절박한 목적을 향하여, 그들은 미친 듯이 땅속의 수분을 빨아들인다. 잠들어 있던 모든 생명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응축시켜 굳게 닫힌 제 몸을 부풀리고,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은 척박한 대지의 표면을 기적처럼 뚫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가냘픈 줄기를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린다. 마침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조심스럽게 여린 이파리를 펼치고, 벌과 나비, 그리고 이름 모를 작은 곤충들을 유혹하기 위해, 조상 대대로 유전자 깊숙이 각인된 그 고유하고도 절박한 빛깔과 치명적인 향기의 꽃을 피워 올린다. 얼마나 황홀하고 강렬하며 동시에 덧없는 생의 절정인가. 그러나 그 찬란함은 신기루처럼 찰나에 불과하다. 제 존재의 이유인 씨앗을 바람결에 흩날려 다음 세대를 기약하는 숭고한 임무를 마치기가 무섭게, 그들은 다시 뜨겁게 갈라진 대지의 품속으로 미련 없이 스러져, 다음번 비를 기다리는 기나긴 잠, 혹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깊은 꿈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간다. 그토록 짧고 강렬한 현현(顯現),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절대적인 침묵과 부재. 그들의 짧은 생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고, 그 강렬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욱 깊은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현수에게서 나는 때때로 그 사막 야생화와 닮은, 설명하기 지극히 어려운 종류의 향기를 맡는다. 그것은 지독히 건조하면서도 동시에 설명할 수 없이 강렬한 매력을 지니고, 예측 불가능한 야생의 생명력을 은밀하게 품고 있는 듯한 그런 기운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일정하고 무표정하며, 감정의 파고를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다. 세상의 관습적인 사교성이나 타인을 향한 살가운 관심, 의례적인 친절과는 명백히 거리가 멀다. 때로는 목적 없이 나른하게 빈둥거리거나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문득 그의 자세나 스쳐 지나가는 눈빛에서는 기이할 정도의 침착한 품격 같은 것이 느껴졌다.

더없이 태평하고 무심해 보이는 겉모습 속에서도,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리하게 벼려진 외과 의사의 메스처럼 빈틈없고 냉철한 용의주도함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느긋함 속에 숨겨진 팽팽한 긴장감, 혹은 무심함 속에 정교하게 감춰진 예민함. 그 양극단의 모순적인 공존이야말로 그의 주변을 감도는 독특하고도 때로는 불안하게 만드는 기묘한 아우라의 근원이었다.

나는 왜 그에게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끌리는지, 그의 어떤 점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스스로에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어쩌면 '좋아한다'는 그 익숙한 감정의 정의마저 내 안에서는 이미 그 형태를 잃고 희미하게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왜 만나는지, 나를 향해 어떤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단 한 번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해주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물론, 어리석게도 나 역시 그에게 그런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 자체를 암묵적으로 회피하며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묻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그 대답을 듣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워서일까. 우리는 그저 현재의 상태, 이 감정의 실체조차 불분명한 짙은 안개 속을 목적 없이 나란히 걷고 있을 뿐이다.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저 익숙해진 것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단순한 습관인가? 그 위태로운 경계조차 나에게는 점점 더 모호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관계는 지독하리만치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반복의 궤도 위를 맴돌았다. 마치 계절이 순환하듯 어김없이 돌아오는 특정 요일, 해진 달력처럼 늘 찾아가는 똑같은 모텔의 똑같은 번호가 붙은 방. 빛바랜 싸구려 벽지와 먼지 쌓인 가구들,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그 익숙하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언어만을 교환하며 서로의 벗은 몸을 탐했다.

살갗의 온기와 가쁜 숨결, 체액의 끈적함을 나누는 그 가장 내밀한 시간 동안에도, 우리의 영혼은 마치 서로 다른 궤도를 도는 행성처럼, 결코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아득히 비껴가는 평행선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육체의 갈증이 해소되고 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에게 어떤 미련이나 감정의 잔여물도 남기지 않은 채 각자의 옷을 챙겨 입고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주가 되면, 마치 강력한 자석에 이끌리듯, 우리는 다시 만나 어김없이 같은 장소로 향했다. 다음 만남을 위한 기약이나 약속 같은 것은 애초에 불필요했다.

토요일 오후, 회사 건물의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희뿌연 도시의 거리로 나서면, 그는 언제나처럼 육교 건너편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풍경의 일부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미동 없이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시선은 어떤 감정의 색채도, 어떤 의도도 담고 있지 않은, 그저 응시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가까웠다. 무심하고, 그래서 더욱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깊은 우물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데 나는 불안하다.

그토록 예측 가능하고 기계적이기까지 한 반복의 궤도 속에서, 나는 설명할 길 없는 깊고 근원적인 불안감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그것은 마치 고요하고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 소용돌이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격렬하게 흐르는 검은 강물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오랜 가뭄 끝에 생명의 기운을 완전히 잃고 바싹 말라 죽어버린 사막의 씨앗처럼, 어떤 감정의 미동이나 인간적인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는 그의 침묵과 부동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문득 섬뜩하리만치 강렬하고 이질적인 꽃내음을 맡을 때가 있다.

그것은 결코 생명의 환희나 달콤한 유혹을 속삭이는 향기가 아니었다. 어딘가 불길하고, 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듯한, 낯설고도 위험한 기운이었다. 그는 분명 물리적으로 내 곁에 존재했다. 그의 단단한 몸의 무게, 그의 따뜻한 체온, 그의 고른 숨결을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 그의 영혼, 그의 진정한 자아는 이 자리에 부재하는 듯, 아득히 먼 곳, 내가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을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와 살을 섞고 가장 내밀한 행위를 나누는 그 순간조차도, 그는 온전히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차갑고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영혼은 깃들지 않은 밀랍 인형과 필사적으로 뒤엉켜 있는 듯한, 시리도록 차갑고 절망적인 공허함이 나의 온몸을 잠식해 들어왔다. 그의 깊은 눈동자는 분명 나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나라는 존재를 통과하여 저 너머, 내가 알 수 없는 아득한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에게 안겨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때때로 학원 동료들이나 오래된 친구들과 어울려 당구장의 뿌연 담배 연기 속으로, 시끌벅적한 호프집의 소란 속으로, 심지어는 현란한 네온사인과 귀를 찢는 전자음악이 광란하는 나이트클럽의 어둡고 퇴폐적인 밤 속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스며들어갔다. 그 무리 속에서 그는 곧잘 농담을 던지고 건배를 하고 웃기도 했지만, 그 모습조차 어딘가 연극 무대 위의 배우처럼 부자연스럽고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흘러가는 소문이나 동료들이 무심코 전하는 그의 단편적인 일상의 조각들을 주워들을 때면, 그는 마치 유령처럼 그 모든 공간과 관계들을 그저 통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가장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그는 홀로 침묵하는 섬이었고, 모두가 열광하며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의 눈빛은 종종 다른 곳, 다른 차원을 향해 있는 듯했다. 투명하지만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단단한 벽에 둘러싸여,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미묘하고도 확고한 거리감을 영원히 유지하는 사람.

내가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기이한 조합을 통해서였다. 아무도 없는 초여름의 텅 빈 학원 옥상, 녹슨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푸른 담배 연기를 권태롭게 허공으로 길게 뿜어내던 그의 고독한 뒷모습. 방학이라 학생들의 발길이 끊겨 적막감마저 감돌던 도서관의 가장 구석진 자리,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두꺼운 영어 원서에 깊이 고개를 묻고 있던 그의 지적인 옆얼굴. 혹은 모든 불이 꺼지고 스크린마저 암전된 시청각실에서, 마치 정지된 영상의 일부처럼 멍하니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던, 그 공허하고 초점 없는 눈동자. 그때 내가 어렴풋이나마 감지했던 그의 본질적인 모습과 지금의 그는, 나와 단둘이 싸구려 모텔의 침대 위에 벌거벗고 누워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외부의 자극에 무감한 존재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아끌면,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혹은 아무런 의문이나 호기심도 표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따라나설 뿐이었다. 그 도착지가 어디든,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로. 마치 흐르는 강물에 제 운명을 온전히 내맡긴 채 정처 없이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그는 그렇게 세상을 표류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정말로, 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만남과 의례적인 섹스는 그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아니면, 그는 정말 아무런 감정의 동요나 미세한 파문조차 없이, 그저 주어진 상황에, 혹은 다가오는 외부의 자극에 조건반사적으로,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 이유도 되지 못한 채, 그저 각자의 지독한 외로움을 잠시 달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혹은 견딜 수 없는 권태와 무의미를 견디기 위한 무의식적인 습관처럼 만나고, 가장 원초적인 본능의 명령에 따라 섹스하고, 그리고 아무런 감정의 잔여물이나 기억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공기처럼 가볍게 헤어지는, 그런 텅 비고 무의미하며 심지어는 모독적이기까지 한 행위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진실한 감정의 교류가 철저히 거세된,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제의(祭儀)처럼.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길하고 서늘한 예감이, 차가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라 내 의식 전체를 천천히 잠식해 들어온다. 그는 애초에 내 삶이라는 이 불안정하고 초라한 둥지에 속하도록 예정된 존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예측 불가능한 변덕스러운 바람결에 실려 와, 아주 우연히, 지극히 잠시 동안만, 다른 새가 온 힘을 다해 애써 지어놓은 둥지 위에, 뻐꾸기라는 뻔뻔하고 이기적인 새처럼 제멋대로 툭, 하고 제 존재를 떨어뜨려 놓은, 그런 이질적이고도 위험한 알 같은 존재는 아닐까. 잠시 이곳에 머물며 온기와 양분을 취하다가, 때가 되면 결국은 아무런 미련이나 망설임 없이 훌쩍, 본래 제 갈 곳을 향해 날아가 버릴, 혹은 더 나아가 이 둥지 자체의 위태로운 평화를 잔인하게 깨뜨리고 파괴해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낯설고도 본질적으로 위험한 존재. 이 깊고 어두운 불안감의 근원은 어쩌면 그가 아니라, 그의 실체도, 내 감정의 정체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 위태롭고 불확실한 관계의 끈을 차마 놓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차갑고도 잔인한 자각이, 날카로운 얼음송곳처럼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과 함께 훑고 지나갔다.

지하철은 여전히 둔중한 소음과 함께 어둠 속을 질주하며 흔들리고 있었고, 그 불규칙한 진동에 맞추어 내 안의 불안과 혼돈 역시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창밖은 여전히 짙은 어둠뿐이었고, 내가 내려야 할 다음 역은 아직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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