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by 남킹

남자

이름 모를 새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얇고 투명한 비단으로 짠 그물처럼, 아침의 정적 위로 섬세하게 내려앉았다. 그 소리는 깊은 잠의 심연에 드리워진 무거운 장막을 부드럽게 걷어내며, 나를 현실의 가장자리로 천천히 이끌었다. 무겁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아주 느리게 들어 올려졌다. 흐릿했던 시야는 점차 초점을 되찾았고, 아침의 세상이 가진 섬세한 윤곽과 색채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 옆, 침대의 나른한 온기 속에는 미자가 여전히 고요한 숨결의 강물에 몸을 맡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녀의 얼굴 위에는 세상의 모든 시름이 잠시 잊힌 듯, 티 없이 맑고 평화로운 안온함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9월의 햇살은 늘 그렇듯, 자신만의 독특한 빛깔과 온도를 지니고 있다. 한여름의 폭염이 남긴 강렬한 자취는 어느새 희미해졌지만, 그 따스한 잔향만은 여전히 공기 중에 남아 방 안을 온화하게 감싸 안았다.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은 옅은 노란빛을 띤 반투명한 천으로,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미세한 기류에도 섬세하게 반응하며,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서 우아한 춤을 추듯 나풀거리며,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부드럽게 걸러내어 방 안 가득 은은하고 몽환적인 광채를 퍼뜨렸다.

책상 위에 놓인, 밤새 물을 담아두었던 유리컵의 표면은 햇살을 받아 작은 프리즘처럼 빛났다. 그 빛은 굴절되고 반사되어 맞은편 벽면에 찰나의 무지개를 그려냈다. 그것은 소리 없는 교향곡의 한 악장처럼, 고요함 속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시각적 선율이었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아침의 조화로운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처럼 낯설지 않고 수수했다. 그 속에는 도시의 번잡함이나 인공적인 향수의 흔적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대신, 저 멀리 이름 모를 산자락에서 밤새 머물다 온 듯한, 흙과 풀잎, 그리고 새벽이슬의 냄새를 머금은 숲의 청량한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그 바람은 내 귓가를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갔고, 오래된 비밀을 나지막이 속삭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순간들이 빚어내는 아침의 정경은 시간이 흐름을 멈춘 듯한 깊은 고요함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이 다한 듯한 공허한 정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자의 고른 숨소리, 커튼 자락의 미세한 나풀거림,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아주 멀리서, 다른 세상의 일처럼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도시의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손길 아래 하나의 완벽하고 충만한 교향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맞이하는 아침은, 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과 서늘한 가을의 시작점이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는, 완벽한 균형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더위도 추위도 아닌, 오직 상쾌함과 평온함만이 가득한 이 시간이야말로 하루 중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원석과 같은 순간이었다. 내 몸과 마음은 이 고요하고 충만한 아침의 기운을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받아들이며, 다가올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술 사이에 가만히 물었다. 낡은 은색 라이터의 작은 불꽃이 찰나의 섬광처럼 어스름한 방 안을 비추었다가 사그라들었다. 첫 모금의 연기가 폐부 깊숙이, 따뜻한 액체처럼 스며들며 잠기운에 흐릿했던 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일깨웠다. 담배 끝이 타들어 가며 내뿜는 미약한 온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침대는 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미세하게 출렁거렸고, 그 위에서 미자의 몸은 모든 풍파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고요한 섬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가슴은 숨결의 리듬에 따라 부드럽게 춤추듯 오르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짙은 색의 봉오리는 밀물과 썰물처럼 규칙적인 파동을 만들어내며, 잠든 생명의 신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것은 인위적인 기교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이 오랜 시간 공들여 빚어낸 가장 완벽하고 원초적인 예술품과도 같았다.

호기심과 부드러운 애정이 뒤섞인 나의 검지가, 성지를 순례하듯,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미끄러졌다.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은 잘 익은 복숭아의 표면 같기도 하고, 때로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비단구름을 만지는 것처럼 아득하고 말캉했다. 그 순간, 기억의 가장 깊숙한 서랍 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지난밤의 즐거움과 관능의 순간들이 봄날의 꽃망울처럼 예고 없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숙성된 최고급 와인처럼 깊고 그윽하며 복합적인 향기를 품고 있었다.

시간은 투명한 꿀처럼, 혹은 녹아내리는 밀랍처럼, 감각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흘러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담배 연기는 하늘하늘 피어올라 허공에서 잠시 형태 없는 춤을 추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여운만이 아련하게 남았다. 방 안의 공기는 미자의 따뜻한 체온과 나의 담배 연기, 그리고 창틈으로 스며드는 아침의 서늘한 기운이 뒤섞여 형언하기 어려운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담배 연기가 그리는 희미하고 하얀 궤적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우리의 짧은 이야기를 허공에 쓰는 붓끝 같았다. 그것은 잠시 머물다가 덧없이 사라졌지만, 나는 이 순간이 가진 덧없음 속의 특별함, 그 희소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담배 연기가 만들어내는 나른하고 희뿌연 안개 속에서, 나의 의식은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점차 흐릿해져 갔다. 그런데 그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감정의 물결 위로, 갑자기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앵앵 소리가 현실을 꿰뚫는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검고 작은 불청객, 파리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불현듯 나타나더니, 숙련된 곡예사처럼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달아났다.

시선을 돌리자, 탁자 위의 풍경은 지난밤의 무질서한 열기가 식어버린 작은 전쟁터의 폐허 같았다. 올이 나가 버려진 그물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는 스타킹, 그 옆으로 김밥의 잔해들이 고대 문명의 잊혀진 유적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리들은 자신들만의 탐욕스러운 성찬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중세 시대 그림 속의 혼란스러운 축제처럼 분주하고 열광적이었다.

검은 점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잘 훈련된 작은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때로는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끈적한 음식물 위에서 스크럼을 짜듯 뭉쳤다가, 어떤 신호라도 받은 듯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의 방향으로 날아가곤 했다. 그들의 무수한 날갯짓이 만들어내는 작지만 끊임없는 소음은, 불협화음 속에서도 기묘한 규칙성을 가진 작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들렸다.

담배 연기는 멈추지 않고 방 안을 채워갔다. 창가에서 비스듬히 스며드는 희미한 아침 햇살 사이로 연기가 느릿느릿 피어오르며 만들어내는 모습은, 묽은 먹으로 그린 한 폭의 수묵화처럼 은은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속에서 파리들의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은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그들은 연기 기둥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듯 날아다녔고, 때로는 연기의 띠를 쏜살같이 가로지르며 순간적인 시각적 예술을, 혹은 혼돈의 미학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광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꿈결 같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그 순간, 나는 이 작은 방이라는 우주의 유일한 관찰자가 되어, 그들의 본능적인 춤사위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파리들의 무리가 만들어내는 그 예측 불가능하고 즉흥적인 안무는, 어쩌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삶의 어떤 본질적인 부분, 혹은 우리의 정돈된 일상보다 더 진실된 어떤 혼돈과 생명력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미자의 몸이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게 뒤척였다. 그녀의 미간에는 깊은 잠에 빠진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순수하고 무방비한 주름이 잠시 깊어졌다가, 이내 다시 평온하게 옅어졌다. 꿈속에서 어떤 심각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고민에 잠시 빠졌다가 다시 평화를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녀를 덮고 있던 이불은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몸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 찰나의,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연약한 행복을 마음 깊숙한 곳에 사진처럼 새기고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손바닥 위에 아침 이슬을 온전히 담아두려는 것처럼 헛되고 부질없는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감정, 이 순간의 공기와 빛깔, 그리고 그녀의 존재가 주는 안온함을 최대한 오래, 그리고 선명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시간은 고장 난 모래시계처럼, 혹은 떨어지기를 주저하는 마지막 잎새처럼, 지극히 느리게 흘러내렸고, 나는 그 느린 흐름 속에서 매 순간을 의식적으로 붙잡아 음미하려 애썼다.

잠든 여자의 고요한 숨결을 행여 방해할까 봐, 나는 거의 공중에 떠 있는 무용수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침대의 낡은 스프링이 혹시라도 비명을 지를까 봐, 외줄 타는 곡예사처럼 온 신경을 집중하여 몸의 중심을 잡으며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성긴 줄무늬 옷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자리에서 묵묵히 나를 맞이했다. 그것을 집어 들었을 때 손끝에 느껴지는 천의 감촉은 어제 입었을 때와는 어딘가 다르게, 조금은 서늘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피부를 잠시 빌려 입는 것처럼, 나는 하나씩 옷가지를 주섬주섬 꺼내어 몸에 걸쳤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는 손끝은 나도 모르게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은 어쩌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아직 가라앉지 않은 어떤 설렘, 혹은 다가올 일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대변하는 듯했다.

방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경첩이 내는 아주 작은 '끼익'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는 커다란 천둥소리처럼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 침대 위의 여자는 여전히 세상 모르고 평화로운 숨결을 이어가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비집고 들어온 복도의 공기는 방 안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금 더 차갑고 건조했지만, 동시에 갇혀 있던 공간을 벗어난 데서 오는 어떤 새로운 시작의 신선함도 희미하게 담겨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은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좁고 긴 통로를 따라 마르지 않는 피의 강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이곳은 익숙하면서도 늘 어딘가 비현실적인 미로처럼 느껴졌다. 양쪽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은은한 벽등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작은 등대처럼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껍고 촘촘하게 짜인 카펫의 섬유들은 나의 발소리를, 비밀을 삼키듯 완벽하게 흡수해버렸고, 그 덕분에 나의 이 은밀한 이별은 더욱 조용하고, 어쩌면 조금은 더 우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시간은 두 개의 다른 강물처럼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나뉘어 흐르는 것 같았다. 하나는 아직 꿈의 세계에 머물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여자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굳게 닫힌 문을 등지고 새로운 하루의 현실 속으로 걸어 나가려는 나의 시간이었다. 그 두 개의 시간이 명확하게 갈라서는 지점에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무언가 두고 온 것은 없는지, 혹은 무언가 놓고 가야 할 것은 없는지 잠시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굳게 닫힌 방문을 돌아보았다. 그 문 너머에는 아직 채 식지 않은 온기와 함께, 우리의 짧고 강렬했던 작은 우주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희미하게 떠도는 담배 연기의 흔적, 뒤엉킨 이불의 주름, 탁자 위의 어지러운 잔해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그녀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완벽하게 정지된 그림처럼, 혹은 잘 찍힌 한 장의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나는 그 장면을 마음속 필름에 각인시킨 후, 미련 없이 돌아섰다.

복도의 양쪽 끝, 이 어둡고 긴 터널의 출구를 암시하듯,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자연광 창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하고 연약한 빛은 이 길고 깊은 통로의 짙은 어둠을 온전히 밝히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늘 어딘가 낯선 이 공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지점을 걷는 것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한 느낌을 주었다. 현실인 듯, 꿈인 듯, 혹은 그 둘 사이의 어떤 중간 지대 같았다.

이 공간이 품고 있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깊숙한 욕망을 감추고 있는 두껍고 불투명한 장막과도 같았다. 도시의 은밀한 고해성사실처럼, 이 길고 붉은 복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감추고 싶은 욕망과 비밀스러운 쾌락의 순간들을 오랜 세월 동안 조용히 지켜보며 굳게 침묵해왔을 것이다.

벽을 따라 늘어선 굳게 닫힌 문들은 각각 그 안에 어떤 농밀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문 하나하나가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 안에 인간의 가장 솔직하고 때로는 추한 본성을 가감 없이 담아두고 있는 듯했다. 문마다 놋쇠로 만들어진 방 번호판은 어둠 속에서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희미하게 빛나며, 각각의 공간에 익명성을 부여했다.

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현실 세계의 명확한 경계선들이 흐려지고, 도덕과 욕망, 이성과 본능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듯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내면에 감추고 있는 이중성을 조용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기묘하게 관용적인 분위기였다. 죄책감과 쾌락이 불편하게 공존하는 이 특별한 공간에서, 인간의 가장 솔직한 본성은 더 이상 위선적인 가면 뒤에 숨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시간마저 이곳에서는 바깥세상과는 다른 속도로 흐르는 듯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없었지만, 느껴지는 시간의 밀도는 분명히 달랐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더욱 느리게, 그러나 동시에 더욱 강렬하고 농축된 형태로 흘러갔다. 압축된 경험처럼, 찰나의 모든 순간이 더욱 진하고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낡고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는 과거와 현재, 혹은 욕망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낡은 시간의 통로처럼 느껴졌다.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희미한 이끼 향과 오래된 먼지 냄새는 잊혀진 지하 도시의 숨결 같았다. 녹슨 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리며 열리고 닫힐 때마다, 지하 혹은 고층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세계와 지상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붉은색 디지털 숫자들이 하나씩 바뀌며 깜빡일 때마다, 나는 깊은 잠수에서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듯, 점차 욕망의 짙은 안개 속에서 멀어져 갔다. 마침내 1층에서 문이 활짝 열리고, 바깥의 신선하고 서늘한 지상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왔을 때, 그것은 긴 밤을 보낸 후 맞이하는 새로운 삶으로의 작은 부활이었다.

거리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한적했다. 느릅나무들은 도시의 충직한 보초병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길가에 늘어서서, 밤새 도시를 지킨 후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성한 잎사귀는 이른 아침의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거리며, 나의 조용한 귀환을 환영하는 듯한 속삭임을 만들어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내리는 햇살은 모텔 복도의 인공적이고 붉은 조명과는 달리, 눈부시도록 순수하고 깨끗했다.

나의 발걸음은 자석에 이끌리듯, 혹은 오래된 습관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길 건너편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제 이 작은 의식은 나의 일요일 아침을 구성하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루틴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맑고 청량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 소리는 타락하고 혼란스러웠던 밤의 세계에서 묻혀 온 마지막 잔향마저 깨끗이 씻어내는 듯한 정화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선반 사이에서 분주하게 물건을 정리하던 젊은 여직원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하게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와 가볍게 까딱하는 목례는 이제 이 시간대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매주 일요일 아침, 거의 같은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나 비슷한 물건들을 사가는 이 예측 가능한 단골손님의 패턴을 속으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약간의 호기심과 함께.

형광등 불빛 아래 가지런히 정돈된 진열대 사이를 걸으며, 나는 이제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늘 사던 종류의 담배 한 갑, 허기를 달래줄 삼각김밥 두어 개, 그리고 잠을 쫓기 위한 차가운 캔커피 하나. 이 소소하고 단출한 장바구니는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모텔 방의 여자가 깨어나 다시 나를 찾거나 혹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기까지, 이 도시의 어딘가에서 시간을 버텨내게 해줄 나의 작은 생존 키트이자 무기가 될 것이다. 내가 이 물건들을 계산하는 동안에도, 저 바깥의 도시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어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은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는 깊은 명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근처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목적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거나, 혹은 아무런 목적지 없이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깨어나는 도시의 숨결과 소음을 느끼는 것. 이런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들은, 방금 떠나온 모텔이라는 고립된 세계와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라는 두 개의 다른 세계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듯한, 기묘하고 불안정한 감각을 선사했다.

편의점 문을 다시 밀고 나서며,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나가던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하게 펼쳐진 푸른 하늘은, 방금 전까지 내가 머물렀던 그 붉고 어두운 복도와는 전혀 다른, 다른 행성의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농밀한 붉은 복도와 이 눈부시게 맑은 하늘 사이에서, 나의 일요일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실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방금 편의점 앞에서 쭈그려 앉아 먹은 뜨거운 컵라면 국물의 온기가 아직도 목구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남아 따끈한 감각을 전해주고 있다. 입가에 번들거리는 기름기를 무심하게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나는 다시 거리 위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술에 물고 불을 붙이자, 희뿌연 연기가 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도시의 건조한 공기 속으로 급하게 흩어지며 뒤섞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작은 시름이 연기와 함께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내 발걸음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아까 왔던 길, 모텔이 있는 방향을 되짚어 가고 있다. 하지만 불과 한두 시간 전과는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햇살의 각도가 변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많아지면서 도시의 표정도 미세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었다. 조금 더 많은 차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조금 더 바쁘게 도로 위를 달린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잠시 멈춰 선 흰색 승용차 안에서는, 젊은 여자가 백미러를 보며 신중하게 입술연지를 덧바르고 있다. 그녀에게 오늘 일요일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만남을 준비하는 것일까?

밤새 화려한 불빛을 뿜어냈을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간판들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이른 아침의 햇살 아래서 어색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밤의 흔적을 아직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어딘가 피곤하고 지친 듯 힘겹게 깜빡이는 불빛들.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땀을 흘리며 조깅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목줄을 잡고 반려견과 함께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며, 또 다른 누군가는 경건한 표정으로 새벽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각자의 일요일이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흰 구름들이 거대한 물고기 떼처럼, 혹은 생각의 조각들처럼, 아주 느릿느릿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그들은 아무런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롭게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때로는 저 구름처럼 아무런 책임감이나 목적 없이 그저 흘러가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과는 달리, 제자리에 깊이 뿌리박힌 채,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을 그 자리에서 묵묵히 도시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말이 없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여자들의 다양한 모습이 잠시 나의 시선을 붙든다. 누군가는 몸에 딱 붙는 화려한 색상의 운동복 차림으로 이어폰을 낀 채 땀을 흘리며 힘차게 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높은 하이힐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그녀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각기 다른 향수 냄새가 잠시 코끝을 스치다가 바람에 흩어진다. 각자의 인생이 저마다 다른 향기와 속도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도시의 삶이란 끊임없이 흔들리는 만화경처럼, 매 순간 다른 패턴과 색깔을 만들어내며 변화한다. 누군가의 하루가 막 활기차게 시작될 때, 또 다른 누군가의 길었던 밤은 이제야 끝나가고 있다. 간밤의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비틀거리며 귀가하는 젊은 청년의 옆으로, 새벽 신문 배달이나 음식 배달을,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가는 낡은 오토바이가 소음을 내며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아주 잠시 동안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다가, 곧 각자의 길로 흩어져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 그것이 도시의 법칙이다.

이제 공원으로 이어지는 낮은 돌계단이 눈앞에 나타난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발길과 비바람에 닳고 마모된 돌로 만들어진 낡은 계단은 시간의 흔적을 피부처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신발 밑창과 돌이 부딪치며 내는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가 이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잠시 깨뜨린다.

계단을 다 오르자, 산굽이를 따라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위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야 내가 찾는 쉼터가 나온다. 아침 햇살은 길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들의 잎사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길 위에 얼룩덜룩한 금빛 그림자를 수놓고 있었다. 천천히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아래쪽 도시의 희미한 소음은 점차 멀어지고, 대신 숲 속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점점 더 선명하게 채우기 시작한다.

이 한적한 길을 오르는 동안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저 아래의 도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분주하게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적당하고 알맞은 속도로 움직이는 것 같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이 완만한 산굽이 길의 경사를 따라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나는 잠시 그 느려진 시간 속에 발을 맞춰 걷는다.

나무들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난 돌길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노인의 등처럼, 혹은 누군가의 복잡한 상념처럼, 구부정하게 뻗어 있었다. 그 표면은 시간의 무게와 무수한 발걸음을 견디지 못하고 군데군데 깨지고 파여, 세월의 상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혼란스럽고 헝클어진 생각이 그대로 길 위에 새겨진 듯한 모습이었다. 마모된 돌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니, 발밑에서 밟히는 작은 돌멩이들이 자잘하고 건조한 소리를 냈고, 발길이 닿는 곳마다 묵직한 차가움과 거칠고 울퉁불퉁한 감촉이 신발 밑창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렇게 얼마간 돌길을 따라 걷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밝고 너른 마름모꼴의 작은 광장이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아마도 예전에는 사람들이 제법 찾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찾는 이의 발길이 거의 끊어진 탓인지, 흘러간 세월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진 채 깊고 고요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아마도 어떤 공공미술의 의도로 세워졌을 법한 추상적인 형태의 조형물이 외롭게 자리 잡고 있지만, 그 모습은 화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초라하고 지쳐 보였다. 녹이 슬고 벗겨진 금속 조각들은 아침 햇살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하고 빛바랜 얼룩과 흔적만을 남겼고, 그 표면엔 지난 계절 동안 바람에 날려와 쌓인 먼지와 오래된 낙엽들이 겹겹이 쌓여 퇴적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혀져버린, 어떤 쓸쓸하고 애처로운 역사의 조각 같았다.

처음 광장에 들어섰을 때는 오직 깊은 정적만이 느껴졌고, 그 평온함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내 귀를 기울이자, 전혀 다른 차원의, 미세하지만 분명한 소리들의 세계가 서서히 펼쳐졌다. 주변의 나무와 풀숲 사이를 휘몰아치며 불어오는 바람 소리는 때로는 잔잔하게 속삭이다가도, 때로는 나뭇가지를 흔들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냈다.

아주 멀리서,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하게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지만, 그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희미한 기척에 불과했다. 누군가가 광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선 그 소리는 잠시 이어지다가 이내 사라졌고, 다시 한동안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침묵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자그마한 산새들의 재빠른 날갯짓 소리와 짧고 날카로운 울음소리였다. 그들의 작고 분주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악보 위를 오가는 음표들처럼 공기를 가로지르며, 이 고요한 광장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심장이 뛰고 있음을 은밀하게 드러냈다.

저 아래, 도시 쪽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자동차 경적 소리는 이 고요하고 정적인 장면에 미묘한 긴장감, 혹은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더했다. 그 소리는 이곳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어딘가에 놓여 있음을, 그리고 이 광장이 단지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고요의 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지막하게 암시하는 듯했다. 이곳은 지나온 시간의 퇴적층과 지금 이 순간의 살아있는 숨결이 조용히 조화를 이루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속삭이는, 한 편의 살아 움직이는 풍경화였다.

이곳의 모든 소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그리고 낮게 속삭이고 있었다. 바람은 광장 바닥의 거친 돌 틈과 주변 나무들 사이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며 작은 먼지들과 바짝 마른 잎사귀들을 공중으로 가볍게 띄워 올렸고, 그것들은 마지막 춤사위를 추듯 잠시 허공을 맴돌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다시 내려앉았다. 그 소리는 전체적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조용했지만, 가까이 귀를 기울이면 바람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거친 돌의 미세한 틈새를 훑고 지나가며 내는 아주 작은 마찰음과 미세한 울림까지도 느껴졌다.

이 모든 미세한 소리들과 풍경들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이곳이 번잡한 도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어쩌면 도시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버려지거나 혹은 스스로 비켜난 변방임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듯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한때 있었을지도 모를 삶의 활기찬 흔적들이 시간 속으로 희미하게 스러져버린 공간. 하지만 바로 그 희미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숨결과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잔잔하고 끈질긴 생명감이었다. 나는 광장 가장자리에 서 있는 오래된 떡갈나무의 넓은 그늘 아래로 들어가, 나무의 거친 기둥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머리 위에서 햇살은 나무의 촘촘하고 무성한 잎사귀들을 통과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미세한 빛의 점들을 만들어냈고, 그 부서지는 빛들은 광장 바닥의 먼지 위에서 작고 가냘픈 금빛 조각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언덕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그것은 이곳 광장의 깊은 적막함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바다는 시야의 끝까지 한없이 넓고 깊은 푸른색으로 펼쳐져 있었으며,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그 모습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침묵과도 같았고, 동시에 세상의 모든 비밀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무한한 깊이를 느끼게 했다.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파도가 리듬을 타며 먼 해안선을 끊임없이 어루만지는 모습은 누군가가 아주 오래된 자장가를 낮은 목소리로 끝없이 부르는 것처럼, 단조로우면서도 일관되고, 신비롭게 다가왔다. 떡갈나무의 서늘한 그늘 아래에서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어느새 이곳이 단순히 도시와 맞닿은 변방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외따로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인 듯한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동전 몇 개와 구겨진 지폐 몇 장의 감촉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넣어 더듬거리자, 동전들은 손가락 사이에서 차갑고 단단한 감촉을 남기며 서로 부딪쳐 가볍게 짤랑거렸다. 그것들 각각은 나를 향해 자신이 가진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가치를 필사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장 되지 않는 지폐는 동전들보다 무게는 가벼웠지만, 주머니 안에서 아무렇게나 꾸깃꾸깃 접힌 채로 나의 오랜 무관심과 방치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씩, 특별한 이유 없이도, 주머니 속의 이 불확실한 감촉만으로 나의 현재 경제적 상황의 얄팍함을 가늠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내 생활비에서 가장 빈번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출 항목인 담배값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나의 흡연 습관은 단순한 기호나 습관을 넘어, 거의 '줄담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담배 연기가 내 손끝과 입술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만들어내는 그 짙고 뿌연 흐름은 나에게 단순한 니코틴 충족 행위가 아니라,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의식,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수한 순간들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일종의 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담배는 내게 불안을 잠재우고 무료함을 달래주는 값싼 위안이자, 동시에 시간을 죽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고 즉각적인 위안이 나의 얼마 되지 않는 수입 대비 식료품비 외 지출 비율, 즉 엥겔지수를 얼마나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지 문득 깨달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혼자서 씁쓸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짓곤 했다.

한 갑의 담배가 나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 하얀 재와 연기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돈의 흔적을 남길 때마다, 나는 때때로 그것이 말 그대로 아무런 생산성 없이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리는 돈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자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오랜 습관을 끊어낼 만한 결단력이나 용기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담배는 나에게 더 이상 단순한 소비품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의 일부, 어쩌면 가장 정직한 부분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내게 아무런 대가나 이유 없이 담배 한 갑을 툭 던져 준다면, 나는 아마 본능적으로 그 사람에게 아주 깊고 진심 어린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그 고마움은 단순히 몇 천 원의 금전적인 이득을 넘어, 내가 매일같이 갈망하고 의존하는 그 작고 확실한 위안을 아주 잠시나마 아무런 노력 없이 공짜로 얻게 되었다는 데서 오는, 깊은 안도감과 해방감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때로는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 작은 고마움의 감정마저 스스로 부정하려는 듯한, 쓸데없고 어리석은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비싼 담배를 고르거나, 혹은 누군가 내게 담배 한 개비만 달라고 했을 때, 속으로는 아까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흔쾌히 한두 개비를 건네주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런 미묘한 행동들은 아마도 나 자신에게 "나는 아직 궁핍하지 않다", "나는 아직 무언가를 나눌 여유가 있다" 혹은 "나는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라는 식의 필사적인 메시지를 보내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호기 뒤에는 언제나 계산처럼 정확하게 약간의 후회와 자책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행동을 통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그 사소하고 덧없는 자존감의 충족감은, 결국 주머니 속에서 점점 더 가벼워지는 동전과 지폐의 감촉으로, 혹은 다음 담배를 사기 위해 얼마를 더 아껴야 하는지에 대한 계산으로 냉혹한 대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모순과 자기기만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여전히 담배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그리고 그 명백한 사실은 때로 나 자신을 한심하고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내 편의점 카운터에 내밀고 새로운 담배 한 갑을 사는 그 반복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니코틴 중독 이상의 무엇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 삶의 어떤 근원적인 빈 공간, 혹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잠시나마 잊기 위한 필사적인 습관이자, 동시에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달콤한 착각 속에서 아주 잠시나마 나 자신을 위로하는 유일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파칭코 게임장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 털어 넣으며 텅 빈 주머니를 확인하는 일이 잦았고, 혹은 가진 돈을 전부 털어 로또 복권을 잔뜩 사서 가방 깊숙이 쑤셔 넣고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잊어버렸다가 세탁기에 돌려 너덜너덜해진 종이 뭉치를 우연히 발견하고 허탈하게 웃던 날들도 있었다. 그런 무의미하고 방향성 없는 날들을 떠올려 보면, 미자를 만난 것은 어쩌면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행운임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돈을 타 쓰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나는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삶에 뚜렷한 목적지가 없으므로, 서두르거나 조급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강박도,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지도 않고,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안일함 속에 안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허영심을 충족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나는 참으로 기묘할 정도로 멋지게, 그리고 놀라울 만큼 보기 좋게, 세상의 주류적인 흐름과 가치관의 옆으로 비스듬히 비켜나 존재한다. 아주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조차 그러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이 창조해낸, 세상이 나에게 기대하거나 규정하는 인격의 틀을, 나는 거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감지하고 교묘하게 피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유일한 재능일지도 모른다.

느긋하고 관조적인 나의 중심은, 서두르지 않고 아주 찬찬히, 지상의 이름 없는 피조물들과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하찮고 때로는 아름다운 산물들을 두루두루 살피며 시간 속을 유영한다. 그러다가 문득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면 주저 없이 담배를 피우고, 배가 고프면 편의점에 들러 김밥이나 라면으로 간단히 허기를 달래고, 목이 마르면 망설임 없이 차가운 콜라 캔을 따서 마신다. 지금쯤 모텔 방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를, 잠든 여자의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별로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와 보낸 지난밤의 기억은, 그 전주 토요일 밤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고, 그 전주의 밤 역시 지지난 주 토요일의 밤과 거의 흡사한 패턴의 반복이었다. 감정의 깊이나 색깔의 변화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와 처음 만나 뜨거운 감정을 나누었던 초기 몇 달 동안은, 매주 토요일이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탐험을 하듯 이 여관 저 모텔을 옮겨 다니며 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오로지 이곳, 이 산 중턱의 낡은 모텔에서만 주말 밤을 보내게 되었다. 왜 하필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나 자신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어쩌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로 비슷비슷한 색깔과 밝기의 네온사인, 판에 박힌 듯 유사한 구조의 입구, 언제나 같은 붉은색의 카펫, 거의 동일한 가구 배치와 침대 시트의 감촉, 심지어는 무뚝뚝하면서도 어딘가 체념한 듯한 여관 주인들의 말투에 질려버린 나머지, 더 이상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며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라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깨닫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기에는 너무 번거롭게 높은 산 중턱의 외진 자락에 위치해 있지만, 그 덕분에 주변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낮고, 외롭고, 한적하며, 때로는 고즈넉하기까지 한 이곳의 독특한 분위기가,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서 있는 나의 내면 풍경과 오래된 분신처럼 서로를 은밀하게 알아보고 끌어당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고립감과 나의 자발적 소외가 기묘한 공명을 이루는 것일 수도.

아무튼, 나는 이제 내 집 앞 골목처럼 익숙해져 버린 이 동네 언저리를 특별한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태평양의 외딴 섬 갈라파고스에 서식하는,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느린 시간 속을 살아가는 거대한 거북이처럼, 나에게 주어진 이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시간만큼이나 두껍고 딱딱해진 등껍질을 등에 지고, 그저 느릿느릿 땅 위를 질질 끌며 나아갈 뿐이다. 내 움직임에는 방향도, 목적도, 속도도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유일하게 선명한 감정이라면, 그것은 지난밤 그녀의 곁에서 느꼈던,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아련하고도 아늑했던 육체적, 감정적 편안함의 잔향을 기억 속에서 더듬거리며 반추하는 것뿐이다. 그것만이 이 무미건조한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작고 따뜻한 현실의 조각이다.

여자

어떤 부석거림이었을까. 잠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것은. 눈꺼풀은 아직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닫혀 있었지만, 귓가에 와 닿는 소리는 선명했다. 침대맡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는 소리, 혹은 새것을 꺼내기 위해 구겨진 담뱃갑을 매만지는 소리. 이내 익숙하고도 지독한 향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어둠의 농밀한 공기 속으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담배 연기. 그는 언제나 그랬다. 밤의 가장 이른 시간에 잠들고, 아침의 가장 이른 시간에 깨어났다. 그리고 그의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은, 거의 예외 없이, 담배 연기와 함께였다.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단어들은 지독히도 단출하다. 담배, 콜라, 김밥, 그리고 라면. 때로는 여기에 값싼 인스턴트커피가 추가되기도 했다. 이 단어들은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이자, 그 자신을 외부 세계에 드러내는 희미한 표식이었다. 그는 자신을 비추는 모든 종류의 거울을, 마치 오랜 적수를 대하듯, 본능적으로 회피했다. 그의 시선은 결코 매끄러운 유리 표면에 머무는 법이 없었고, 설령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외양을 가꾸는 행위는 물론이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 자체를 그는 불필요하거나 혹은 두려운 일로 여기는 듯했다.

그의 내면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황폐해진 집과 같았다. 어떤 확고한 신념이나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번번이 배반당했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사상의 흔적 대신, 그 자리에는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백만이 느껴졌다. 때로는 그 텅 빈 공간의 광활함에 압도되어, 차라리 이 모텔 방의 벽지 대신 그의 얼굴을 그린 수백 장의 데생으로 채워 넣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매 순간 미묘하게 달라지는 그의 표정, 그늘진 눈매, 굳게 다문 입술, 무심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들을 포착하여,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동시에 해체하고 싶었다.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는 단순한 기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퇴적물이었다. 방 안의 공기 속에 녹아들어 벽지의 누런 얼룩과 뒤섞이고, 싸구려 가구의 틈새에 배어들며, 그렇게 세월의 더께를 덧씌웠다. 어떤 날 오후, 창문으로 비스듬히 햇살이 쏟아져 들어올 때면, 자욱하게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마치 붉게 물든 저녁노을처럼 방 안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 부유하는 연기의 장막 속에서 그의 얼굴은 때로는 놀랍도록 선명하게, 때로는 꿈결처럼 아스라이 떠올랐다. 마치 그의 실존을 강력하게 웅변하는 듯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신기루처럼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했다. 그 모호함이야말로 그의 본질일지도 몰랐다.

가늘게 뜬 눈으로 천장을 응시한다. 밤새 뒤척인 흔적이 역력한 하얀 시트 위로, 내 몸의 절반쯤이 미명의 푸른빛 속에 희미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아직 여리고 부드러웠지만, 그 빛줄기 속에서 나의 윤곽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형태를 갖추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하듯, 아주 느리게, 몸을 돌려 누웠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부터 뻐근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젯밤의 격렬했던 흔적이었다.

시선은 다시 천장의 한 지점에 머물렀다. 붉은 기운이 희미하게 스며든 듯한 얼룩. 오래전 누군가 흘린 와인 자국일까, 아니면 그저 세월이 만들어낸 기묘한 무늬일까. 그것은 마치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편린처럼, 혹은 이 방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처럼, 늘 그 자리에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밤과 아침을 이 방에서 보냈고, 그때마다 같은 자리의 얼룩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얼룩마저도 내 삶의 일부처럼, 지독하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격렬한 본능의 탐닉으로 시작되어, 질퍽한 밤의 시간을 통과했다. 그리고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은, 예외 없이, 켜켜이 쌓인 육체의 피로와 둔중한 통증이 칡넝쿨처럼 내 온몸을 휘감는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후를 향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는 마음과는 달리, 아직은 이른 아침의 정신은 비교적 가볍다는 사실이었다. 그 가벼움에 기대어, 나는 잠시 더 이 침대 위에서, 현실의 무게로부터 달아나듯, 누운 채 버티곤 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낮고 둔탁하게 울렸다. 그가 나간 것이다. 삐걱거리는 낡은 문과, 복도를 울리는 그의 무심한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는 이제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전까지, 어쩌면 오후 늦게까지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변함없는 패턴이었다. 그가 떠나고 나면, 내 마음의 한구석이 텅 하고 비어버린 듯 아련한 상실감이 밀려왔다. 텅 빈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공허함은, 이미 충분히 버거운 내 삶의 무게 위에 또 다른 무게를 더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감정들에 저항하거나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체념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저 이렇게, 이 텅 빈 공간 속에서, 그의 부재를 견뎌내는 수밖에는.

방문이 완전히 닫히며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는, 마치 운명의 마지막 선고처럼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그 짧고 단호한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돌아 누웠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아침에 저 소리를 들었던가. 셀 수 없이 반복된 그의 떠남과 나의 남겨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침에 이와 똑같은, 혹은 더욱 깊어진 공허함을 느꼈던가. 시간은 상처를 무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벼리는 듯했다. 그의 부재가 남기는 상실감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더 날카롭게, 더 아프게 나를 파고들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몸을 아주 천천히 일으켰다.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져 있던 옷가지들을 주워 걸쳤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밤새 빠끔히 열려 있던 창문을 조금 더 활짝 열어젖혔다. 창틀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 있던, 민들레 홀씨처럼 보이는 하얀 부유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황급히 창밖으로 탈출했다. 그것들은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던 영혼들처럼, 자유를 향해 허공으로 쏜살같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 찰나의 해방감이 부러웠다.

침대 시트의 구겨진 주름 사이로, 어젯밤의 흔적이 보였다. 서둘러 벗겨져 내팽개쳐진 나의 속옷 한 조각이, 마치 무언의 증인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의 단절을, 그리고 그 밤의 열기와 허무를 동시에 증언하는 듯했다. 어제의 나는 그의 거친 숨결과 탐하는 손길에 취해, 이성과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텅 빈 자리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현실의 무게를 오롯이 견뎌내야만 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결코 같을 수 없었다.

창밖의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고, 하늘에는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 흰 구름들이 마치 거대한 범선처럼, 유유히 바다 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저 멀리, 리아스식 해안의 복잡하고 구불거리는 선을 따라, 크고 작은 어선들이 깨알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섬세하게 명암의 계조를 살려 인화한 한 폭의 흑백 사진을 창문에 걸어둔 듯, 비현실적인 정적과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햇살은 창문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방바닥 위에 기하학적인 사각형의 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밝은 빛의 영역 속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던 무수한 먼지들이 금빛 가루처럼 떠다니며 춤을 추고 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군무를 추는 은하수 같기도 했고, 혹은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며 부유하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의 시각적 현현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빛 속에 가만히 손을 넣어보았다. 손등에 와 닿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빛이 닿지 않는 방의 다른 구석들은 여전히 서늘한 그늘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내 마음속에 공존하는 희망과 절망, 열정과 냉담의 두 얼굴처럼.

시선을 더 멀리 던지자, 해안선 끝자락을 따라 인간이 세운 도시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내가 속해 있는, 그러나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 다른 모든 대도시들이 그렇듯, 그곳 역시 구불구불하고 불규칙적인 도로망과, 무질서하게 덩어리져 솟아오른 건물들로 이루어진,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딱딱하게 경직된, 그러나 그 속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거대한 용광로 같은 모습이었다. 도시의 배후, 산 쪽으로는 마치 인공적으로 심어진 거대한 나무들처럼, 하얀색 고층 아파트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수많은 창문들 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삶과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을까.

도시의 불빛들 중 일부는 아직 밤의 잔영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세상을 밝혔던 그 불빛들은, 이제 환한 아침 햇살 속에서 겨우 그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격렬했던 사랑의 열정이 식어버린 후, 희미한 미련만이 남아 있는 연인들의 모습처럼. 저 불빛들 사이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까. 어쩌면 나와 비슷한 공허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 혹은 나와는 전혀 다른, 희망과 활기로 가득 찬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모든 삶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아득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조금 더 열어젖히자, 훅하고 강한 바람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에는 바다의 짠 내음과 갯벌의 비릿한 향기, 그리고 축축한 흙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 바람과 함께, 눈앞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누군가 제멋대로 칼로 깎아낸 듯한, 검붉은 흙빛의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그리고 그 언덕 아래로는, 낡고 색 바랜 지붕들이 마치 조가비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초라한 어촌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그곳의 풍경은, 도시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왠지 모를 애잔한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을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듯한 도로의 사거리. 즉, 내가 머무는 이 모텔의 바로 맞은편에는, 둥근 플라스틱 차양을 머리에 인 주유소와 24시간 편의점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곳은 이 작은 마을의 유일한 현대 문명의 상징이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작은 중심지처럼 보였다.

주유소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가격표가 세찬 바람에 몸을 살짝 비틀며 흔들렸다. 휘발유와 경유의 가격을 알리는 숫자들은, 시장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동할 것이다. 마치 예측 불가능하게 오르내리는 내 감정의 기복처럼. 주유소 앞에는 각기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차들이 몇 대 서 있었다. 연료를 채우고,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나갈 것이다. 언젠가 나 역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언제가 언제일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창문을 통해 끊임없이 밀려드는 바람은, 바다의 냄새를 짙게 품고 있었다. 짭조름하면서도 동시에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 향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처음 이 낯선 해변 마을에 발을 들였을 때도, 바로 이 냄새가 났었다. 그때는 이 냄새가 어쩌면 새로운 시작, 혹은 잠시나마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는 신호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 수많은 밤과 아침을 이곳에서 보낸 지금, 이 냄새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익숙해진 절망일까, 아니면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는 미련의 향기일까.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직원의 모습이 얼핏설핏 보였다. 그녀는 늘 같은 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한 듯한 지루함과, 밤샘 근무의 고단함이 뒤섞인 무표정한 얼굴. 그녀는 어쩌면 이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은밀한 일들의 목격자일지도 몰랐다. 밤늦게 누가 누구와 함께 이 모텔로 들어섰는지, 누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거리를 헤매는지, 누가 외로운 밤을 홀로 지새우는지. 그녀의 눈에는, 주기적으로 주말이면 나타나 저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홀로 떠나는 도시 여자인 내가, 과연 어떻게 비칠까. 그녀는 나를 속으로 판단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그림자 중 하나로 무심히 여기고 있을까.

그리고, 그 여직원의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 사이로, 희미하게 그의 모습이 보였다.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피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김밥을 먹으면서 동시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식사와 흡연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행위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그는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파는 값싼 김밥 한 줄과 뜨거운 컵라면 국물로 허기를 달래고, 입에는 다시 담배를 문 채, 이 한적한 해변 동네를 정처 없이 배회할 것이다. 오전 내내.

그의 지독한 담배 습관은, 우리의 관계 초기에 몇 차례나 가슴이 터질 듯한 격렬한 다툼으로 이어졌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나의 잔소리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그의 완고한 고집이 부딪혔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무뎌졌다. 반복되는 싸움에 지친 우리는, 암묵적인 휴전 상태에 들어선 지 오래였다. 이제 나는 그의 담배 연기를 그저 그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체념과 포기의 경계 어딘가에서.

그가 걷는 길은 놀라울 정도로 일정했다. 편의점을 나와서는 으레 해안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고, 방파제 끝에 외로이 서 있는 하얀 등대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같은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망망대해 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언젠가 그 바다로부터 올 어떤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처럼. 때때로 그 뒷모습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지독히 외로워 보였고, 또 어떤 때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를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에 따라, 그의 모습은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그 의미를 달리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우리는 불규칙하면서도 끈질기게 만남을 이어왔다. 그 시간을 통해 내가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일상과 행동, 생각과 말의 패턴이 무서울 정도로 습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마치 삶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를 생략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선택이 주는 미묘한 갈등의 긴장감, 혹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설렘과 즐거움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의 동요가 그에게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마치 잘 짜인, 그러나 너무나 단조로운 악보처럼 예측 가능하게 흘러갔다.

그의 옷장 속을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그가 입는 옷들은 늘 비슷했다. 빛바랜 네이비색 점퍼, 목이 늘어난 검은색 티셔츠, 무릎이 튀어나온 회색 운동복 바지. 마치 그의 내면세계를 반영이라도 하듯, 그의 옷들은 무채색의 단조로움 속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마 그의 감정의 스펙트럼 역시 그 옷들의 색깔처럼 제한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머물러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방에는 책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생명력을 가진 존재는 창가에 놓인 작은 선인장 화분 하나였다. 가시 돋친 그 작은 식물은, 마치 그 자신처럼, 최소한의 관심과 물만으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생존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마치 고장 난 시계의 초침처럼, 규칙적이지만 어딘가 공허하게 흘러갔다. 그의 하루는 마치 누군가 미리 짜 놓은 각본처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반복되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 편의점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해안가와 공원을 정처 없이 걷다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다시 담배를 피우는 식이었다. 그는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 어떤 종류의 안정감을 찾는 듯 보였다. 혹은, 그 반복 자체가 그의 유일한 존재 방식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 남자는, 선택이라는 무거운 의무가 제거된 그 빈 공간을, 어떤 종류의 느긋함, 혹은 체념에 가까운 평온함으로 채워 넣은 듯 행동했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듯, 혹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반면 나는 늘 조급했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는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변화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듯 일정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나는 작은 파도에도 쉽게 흔들리는 배처럼, 불안으로 가득 차 변덕스러웠다.

내 삶은 언제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할지, 오늘은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피해야 할지… 끝없이 이어지는 선택의 갈림길 위에서, 나는 종종 방향을 잃고 헤매거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후회에 시달렸다.

그에 반해 그는,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를 자신의 삶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중요한 선택을 끝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선택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나는 끊임없이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보며 후회하고 자책했다. 그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나는 과거라는 거울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없어 보였고,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가늘고 다양한 감정의 결에 얽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시간이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혹은 시간에 쫓길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반면 나의 발걸음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쫓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으며, 어떤 열의나 감정의 고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녹슨 악기처럼. 반면 나의 말투는 종종 불필요할 정도로 감정에 휘둘렸고, 때로는 과장된 감상에 젖어들곤 했다. 그는 정해진 직업이 없었고, 어쩌면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지도 몰랐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며 나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그의 일상은 이렇듯 거의 모든 면에서 정확하게 나의 반대편 극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존재 방식은 나에게 어떤 견고함과 동시에 기묘한 유연성을 느끼게 했다.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떤 종류의 단단함과 자유로움.

내 귓전에는 늘 카산드라의 불길한 예언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 관계의 끝은 분명 행복이 아닐 것이라는, 어쩌면 파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속삭임.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는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졌지만,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나 역시 그러한가? 이 만남이 결국 나에게 상처만을 남길 것이라는 예감을 느끼면서도, 그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카산드라의 저주받은 운명처럼, 나의 내면에서 울리는 경고의 목소리 역시 무시당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가 그 예언을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반면 그의 존재 방식에는, 마치 풍요로운 삼각주(델타)의 비옥함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삶의 고단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는 듯, 혹은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그는 정말로 삶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무게를 너무나 오래 짊어져 온 나머지, 이제는 그 무게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완전히 받아들여 버린 것일까. 때로는 그의 그 지독한 무심함이, 질투가 날 만큼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이 남자가 좋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그와의 관계를 통해 내가 더 즐거워지고,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지며, 궁극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달콤한 희망을 품게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기대는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땀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체취가 좋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주는 기묘한 안정감이 좋다는 것일까? 혹은 그가 내게 허락하는 이 일시적인 고요함과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좋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나도 모르게 길들여진, 익숙함에서 비롯된 습관 같은 감정일 뿐일까? 사랑과 습관, 혹은 필요와 중독의 경계는 어디일까. 때때로 그 경계는 너무나 희미해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그의 벗은 몸을 보았을 때, 그의 등과 팔뚝에는 여러 개의 오래된 흉터들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칼에 베인 듯한 날카로운 자국도 있었고, 어딘가에 긁히거나 찢어진 듯한 거친 상처의 흔적도 있었다. 그것들은 그의 침묵하는 과거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하는 유일한 단서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상처들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은 이미 완전히 잊어버린 과거의 파편인 것처럼.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 깊은 상처들이, 그의 지독한 무심함과 세상을 향한 냉담함의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난 몇 달 동안, 어쩌면 몇 년 동안, 나의 일요일 오전은 거의 변함없이 이 모텔 방 창가에 서서 시작되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하늘과 구름, 검푸른 바다, 그리고 그 풍경 속을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나의 일요일을 여는 의식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렇게 정지된 듯 흘러가는 순간순간의 풍경과 감정들을 내 마음속에 섬세하게 아로새기는 행위 자체를 은밀하게 기대하게 되었고, 그것을 나만이 아는 내밀한 즐거움으로 조용히 변환시키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번잡함이 잠시 멀어지고, 오직 내 가슴 속에서 고동치는 심장 소리와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복잡한 현실의 역할극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었다. 그 누구의 딸도, 직원도, 친구도 아닌, 그저 창가에 서서 무심히 세상을 관망하는 한 명의 여자로서.

세상의 시간은 아귀다툼을 벌이는 전쟁터와 같았다. 서로를 밀치고, 헐뜯고, 상처 내고, 또 그 상처에 대한 자책과 후회로 변죽을 울리다가, 어느 순간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듯 뚝하고 멈춰버리는 순간. 바로 그런 순간이 찾아온 듯한 고요한 아침이었다. 이곳, 이 해변 마을의 낡은 모텔 방 안은, 세상의 모든 소란으로부터 격리된 작은 피난처와 같았다. 밤새 내린 이슬을 머금고 막 발아한 새싹의 싱그러운 향기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 아름답고도 위태로운 피난의 순간이, 창문을 통해 훅하고 밀려드는 신선한 아침 바람 속에 오롯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이 작은 해변 마을의 아침은, 내가 떠나온 도시의 아침과는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느리고, 고요하고, 단순했다. 마치 시간이 이곳에서는 다른 속도로, 다른 밀도로 흐르는 것 같았다. 치열한 경쟁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매 순간 벌어지는 도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듯한 기묘한 평화가 감돌았다. 어쩌면 그가 이 척박하면서도 평화로운 곳에 오래도록 머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도시의 숨 막히는 속도와 무게로부터 달아나, 그저 존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이 시간 속에 자신을 맡기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면 그에게는 돌아갈 도시가 애초에 없었던 것일까.

그의 방에는, 그리고 그의 소지품 속에는, 사진이라고는 단 한 장도 없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과거를 기록하거나 추억하지 않는 사람.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사람. 그의 지워진 과거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이토록 모든 것에 무심하고 냉담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혹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자석처럼 그에게 이끌리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창가에 서서 그의 어슬렁거리는 뒷모습을 그저 이렇게, 최대한 초연한 시선으로,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격렬하게 요동치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행위는 이제 나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았다.

그의 뒷모습은 언제 보아도 한결같이 외로워 보였다. 넓지만 어딘가 불안하게 처진 어깨, 세상의 모든 무게를 홀로 짊어진 듯 약간 구부정한 자세, 느리고 망설이는 듯한 걸음걸이. 그는 마치 투명한 유리 벽에 둘러싸여 세상과 분리된 채 자신만의 시간 속을 걷고 있는 듯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법이 없었다. 오직 정면, 혹은 더 정확히는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순례자처럼.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어쩌면 그 자신조차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는 기묘하게 솔직하면서도 동시에 철저하게 무심했다. 그의 행동거지에는 늘 외로움의 짙은 징후가 배어 있었지만, 그는 결코 동정이나 연민을 갈구하지 않았다. 그는 내 마음을 의식적으로 건드리거나 흔들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내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으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행위는 어딘가 수동적이었고, 그의 시선은 결코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법 없이 늘 멍하니 허공의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모순과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매번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마치 자력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그의 품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그의 가슴에 귀를 대면, 규칙적이고 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의 숨결에서는 언제나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의 손길은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어떤 종류의 서툰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 모든 모순적인 감각들이 역설적으로 나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 안정감은 언제나 불안의 그림자를 동반했다. 이 위태로운 평화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 예측 불가능한 관계는 과연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가.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자, 아침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가 보였다. 잔잔한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해변을 적시고 있었다. 저 광활한 바다처럼, 우리의 관계 역시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넓은 바다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 그 끝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끝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그 끝을 맞이하게 될 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나는 창가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젯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의 흔적들이 방 안 곳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빈 와인 병,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옷가지들, 그리고 방 안 가득 배어 있는 그의 지독한 담배 냄새.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가고 있는, 위태롭고 불완전한 이야기의 증거들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그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우리가 써나갈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흩어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챙겨 입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이곳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적어도 내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까지는. 혹은, 이 기다림 자체가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릴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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