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학원 정문, 그 거대한 아가리에서 막 새벽 강의를 마친 이들이 썰물처럼 밀려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인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내뿜는 뜨거운 날숨과도 같았다. 그들의 분주한 걸음걸이가 일으키는 미세한 바람결 하나하나에, 밤새도록 응축된 지식의 잔향과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집중의 열기가 눅진하게 배어 있었다. 다가올 하루라는 또 다른 전쟁터에 대한 서늘한 조바심과 뒤섞인 그 생생한 기운이, 마치 실체라도 있는 듯 살갗에 와 닿아 따끔거렸다.
간혹 생활의 여유를 찾으려는 듯, 잘 다려진 면바지에 고급 스카프를 두른 중년의 주부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단함보다는 지적 유희의 만족감이 서려 있었지만, 그들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질적인 섬처럼 떠다니다 이내 사라졌다. 대다수는 흐트러진 넥타이를 거칠게 고쳐 매거나, 묵직한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고쳐 쥔 직장인들이었다. 그들의 어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미세하게 굽어 있었다. 닳아빠진 구두 굽이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보이지 않는 신호탄에 쫓기는 패잔병들의 다급한 발소리처럼 처절하게 들렸다. 그들은 서둘러 각자의 일상이라는 이름의 참호, 혹은 유일한 안식처일지도 모를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피로를 넘어선, 녹록지 않은 삶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입시라는 첫 번째 관문을 넘던 그 아득한 시절부터, 사회라는 더 거대하고 무자비한 경쟁의 장에 내던져진 지금까지, 그들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려왔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기약 없이 이어질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경주의 트랙 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절망적인 예감을, 희미하게나마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질적으로는 이전 어느 세대보다 풍요롭다 일컬어지는 시대였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은 우리가 스스로 덧씌운 욕망의 두께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버겁고 수고로운 여정이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과거의 나, 치열하게 타오르다 한 줌 재로 변해버린 나의 불안한 그림자를 읽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쩌면 아주 먼 미래의 내가 저들 중 하나가 되어 무감각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들의 뒷모습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벗어나려 발버둥 쳤던 과거의 망령이었으며, 피하고 싶은 미래의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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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등지고 낙향한 직후의 몇 주, 혹은 몇 달이었을까. 시간 감각마저 무뎌진 채, 나는 짙고 축축한 안개 속을 영원히 헤매는 듯한 조급함과 속절없는 상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그저 끈적한 타르처럼 고여 나를 질식시킬 뿐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 도시의 심장부에서 나는 경쟁의 대열 가장 앞서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죽 가방의 물리적인 무게에 더해, 보이지 않는 중압감까지 짊어지고 수없이 이 거리를 오갔다. 그때의 나는 도시의 일부였고, 도시의 속도에 맞춰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익숙한 풍경들은 두꺼운 유리벽 너머의 박제된 풍경처럼 낯설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늘 걷던 길의 익숙한 모퉁이에 기댄 늙은 가로수, 저만치 언덕 너머로 지겹도록 펼쳐지던, 비현실적으로 새파란 하늘, 그리고 섬세한 빛의 파편들을 수면 위에 흩뿌리며 시시각각 다른 아름다움으로 포화 상태를 이루던 바다. 한때는 그토록 가슴 저미도록 좋아하고, 타지에서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풍경들이었다. 고향의 바다는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고, 변치 않는 순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갈 곳을 잃고 표류하는 나에게, 그 눈부신 풍경들은 그저 무념의 스크린 위에 무채색 물감을 되는대로 덧칠한, 공허하고 의미 없는 영상에 불과했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사치였다. 내 안의 모든 감각기관이 녹슬어 버린 듯, 나는 그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옷을 걸쳐 입고, 씻지 않아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모자로 감춘 채, 목적 없이 이 거리 저 골목, 발길 닿는 대로 부유하듯 떠돌아다녔다. 소금기를 머금은 차갑고 축축한 겨울바람이 어스름 속에서 살을 에는 듯 파고들 때, 나는 속수무책으로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실체 없는 공포가 내 몸의 통제권을 빼앗아 버린 듯했다. 밤새 불면으로 뒤척인 눈동자는 핏발이 선 채 붉게 충혈되었고, 세상의 모든 빛이 고통스러운 자극으로 느껴졌다. 실체 없는 불안은 끈질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영혼을 뒤흔들고 잠식했다. 온몸은 보이지 않는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듯, 발을 질질 끌며 도시의 어둡고 축축한 뒷골목을 헤매곤 했다.
나는 종종 버려진 항구의 방파제 끝에 홀로 앉아 있었다. 거친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는 소리는 마치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웅장하고 위협적이었다. 바다의 검푸른 심연을 들여다보며, 나는 그곳으로 뛰어드는 상상을 하곤 했다. 차가운 물이 내 몸을 감싸고, 모든 고통과 기억을 지워버리는 순간을. 그러나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나는 죽고 싶을 만큼 살고 싶은, 모순된 욕망에 사로잡힌 겁쟁이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의미 없이 걷던 나의 발걸음이, 어떤 이끌림도 없이, 그저 무심코 한 곳에 멈춰 섰다. 퇴락한 건물의 빛바랜, 그러나 어쩐지 정감 있는 필기체로 쓰인 영어학원 간판 앞이었다. 간판의 페인트는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고, 그 모습이 마치 나의 닳아빠진 영혼을 닮아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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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했던 겨울이 마침내 그 맹렬한 기세를 잃고,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여린 숨결 같은 초봄의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거리의 앙상한 가로수 가지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에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미약하나마 생명의 온기가 실려 귓전을 부드럽게 맴돌았다. 그것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내 마음의 표면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내는, 희미한 신호탄과도 같았다.
학원 입구를 분주히 드나드는 학생들 사이로, 나는 보이지 않는 열정의 기류가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생기 있게 파닥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하고,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 생명력 넘치는 에너지는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혹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삶의 약동이었다. 멈춰버린 내 시간 속으로, 그들의 활기가 파문처럼 번져 들어왔다.
나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길고 탁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 한숨에는 지난 몇 달간 쌓여온 절망과 무기력, 그리고 자기 연민의 찌꺼기들이 뒤섞여 있었다. 한숨이 끝나자, 아주 미세한, 그러나 분명한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났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녹으며 질척거리듯, 내 마음속에도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주 조금씩, 세상에 첫 걸음마를 내딛는 아기처럼, 어색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학원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유리문이 끼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상보다 넓고 밝은 홀이 나를 맞았다. 바닥에는 표면이 고르지 않은 격자무늬의 회색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은은한 광택을 뿜어냈다. 그 모습 그대로 천장의 거대한 거울에 반사되어 공간을 더욱 깊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그 공간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나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내가 알던 나는 없었다. 까칠하게 자라 턱과 뺨을 뒤덮은 수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움푹 팬 눈,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하고 푸석한 안색, 그리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초점 없이 텅 비어버린 눈동자. 그 낯선 남자의 모습이 너무도 생소하여, 마치 타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거울 속의 나는 소리 없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맞은편 안내 데스크에는 하늘거리는 감색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정형화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보는 이를 안심시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수많은 사람들을 응대하며 만들어진 직업적인 미소였지만, 그 속에는 기묘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먼저 말을 걸기를, 혹은 이 낯선 공간에 적응하기를 기다려주는 듯, 그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그마처럼 들끓는 혼란스러운 내면을 감추려 애쓰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발소리가 텅 빈 홀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윽고 내가 그녀 앞에 마주 서자, 그녀는 마치 오래전부터 나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영어, 배우시려고 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물기 없는 나뭇잎처럼 바삭하면서도 명료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데스크 위에 놓인, 물기가 완전히 말라 오그라든 장미 꽃잎들이 담긴 작은 유리병에 잠시 머물렀다. 그 마른 꽃잎들은 마치 나의 시간처럼 박제되어 있는 듯했다. 그녀의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미소 속에서, 나는 왠지 모를 자부심, 혹은 이 공간이 제공하는 어떤 가치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의 희미한 흔적을 느꼈다. 이곳은 단순한 학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을 제공하는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멈춰 있던 내 시간의 톱니바퀴를 다시 돌리는 아주 작은, 그러나 결정적인 첫 번째 힘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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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약속된 시간에 다시 학원을 찾았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는 나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안쪽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있는 외국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데이비드’라고 소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가득했지만, 그 주름들은 고된 삶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오랜 지혜와 연륜의 훈장처럼 보였다.
간단한 레벨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먼지 쌓인 창고에서 수십 년 만에 꺼낸 낡은 기계처럼, 내 머릿속은 삐걱거렸다. 한때는 유창하게 구사했던 단어들이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졌고, 간단한 문법조차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데이비드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깊고 푸른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내가 스스로 기억의 파편들을 맞춰나갈 시간을 넉넉히 주었다.
그의 질문들은 단순히 나의 영어 실력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당신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10년 전의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같은 질문들은, 잊고 있던 나의 과거와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의 서랍을 뒤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오랫동안 외면했던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소중한 추억들, 뼈아픈 후회,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꿈의 조각들.
테스트가 끝나고, 데이비드는 잠시 침묵하더니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나에게 건넸다. ‘중급 1단계 (Intermediate Level 1)’.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안도감이었을까, 혹은 초라한 현실에 대한 비참함이었을까. 모든 것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내 안에 무언가 남아있다는 작은 증거. 완전히 녹슬어 버린 줄 알았던 내 안의 기계가, 아주 조금은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
나는 교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늦겨울의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직 갈 길은 멀고, 내 앞에는 여전히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안갯속에서 무작정 헤매는 대신, 아주 작은 등불 하나를 손에 쥔 기분이었다. 그것은 ‘영어’라는 이름의 등불이었고, ‘배움’이라는 이름의 희망이었다.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 잿더미 속에서, 과연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나는 내일에 대한 미세한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었다. 그저 내일 아침, 다시 이 학원에 와야 한다는 아주 사소한 목적의식.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자
부장님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출근하기 전, 나는 언제나 투명한 유령이 되어 사무실을 배회했다. 어젯밤, 야근의 흔적이 역력한 부장님의 책상은 미지근한 한숨과 식어버린 커피의 산미, 그리고 희미한 담배 냄새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우선 축축한 행주로 끈적하게 말라붙은 음료 자국을 닦아냈다. 컵의 밑바닥이 남긴 동그란 윤곽은, 마치 내 삶의 무한궤도처럼 지워도 다시 생겨날 운명이었다. 결재 서류 더미 옆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과자 부스러기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았다. 그 바삭한 잔해들은 누군가의 짧은 위안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치워야 할 또 하나의 번거로움에 불과했다.
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각질들이 쌓여 있었다. 간밤에 빠졌을 누군가의 머리카락, 구두 밑창에 딸려 들어온 외부의 먼지들, 서류의 모서리에서 잘려 나간 미세한 종잇조각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낡은 밀대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수도승과 같은 경건함으로 바닥을 밀고 나갔다. 밀대의 접착포에 먼지와 머리카락이 엉겨 붙는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은 오염된 세계로부터 더러움을 훔쳐내는 행위이자, 나의 하루를 정결하게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다.
넘칠 듯 목구멍까지 서류와 구겨진 종이컵을 물고 있던 휴지통을 비워내는 것은 그 의식의 정점이었다. 묵직한 쓰레기 봉투를 들어 올릴 때마다, 타인의 무심함과 피로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 어깨를 짓눌렀다. 텅 빈 휴지통에 새로운 비닐을 씌우는 순간,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더러워진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 상쾌함은 지극히 찰나적이었다. 곧 다시 채워질 운명을 알기에.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작은 탕비실, 그곳은 방치된 영혼들의 무덤과도 같았다. 싱크대에는 저마다 다른 입술 자국과 커피의 갈색 눈물을 매달고 있는 머그컵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나는 뜨거운 물을 틀고, 초록빛 세제를 수세미에 듬뿍 묻혔다. 뽀드득, 뽀드득. 유리와 사기그릇이 마찰하며 내는 청량한 소리가 탕비실의 눅눅한 공기를 갈랐다. 컵의 안쪽까지 손가락을 넣어 꼼꼼하게 닦았다. 하얗고 풍성한 거품이 묵은 때를 벗겨내는 동안, 나는 내 마음의 얼룩들 또한 그렇게 깨끗이 씻겨 내려가기를 잠시나마 기원했다. 이것은 내가 이 회사에 처음 발을 들인 날, 희망 없는 눈빛을 하고 있던 전임자에게서 인수인계받은 첫 번째 업무였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곳을 떠나는 날, 나 역시 새로운 누군가에게 이 굴레를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나의 유산이었다.
모든 정리가 끝나고, 나는 사무실의 탁한 공기를 몰아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끼익, 하고 낡은 창틀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훅, 하고 바다의 날숨이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소금기를 머금어 비릿하고, 정박한 어선에서 흘러나온 기름 냄새가 짙게 배어 있으며, 밤새 썩어갔을 해초의 냄새까지 뒤섞인, 항구 도시 특유의 복잡하고도 생생한 공기였다. 그 거친 숨결이 내 뺨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창밖으로는 언제나처럼 익숙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잿빛 바다 위로, 거대한 강철의 고래 같은 화물선들과 작은 종이배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고깃배들이 부표처럼 떠 있었다. 그 위를 하염없이 배회하는 갈매기 떼. 까옥, 까옥. 그들의 울음소리는 단조롭고 처연하여, 마치 이 도시의 모든 상실과 체념을 대신하여 곡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소리는 미지의 신세계를 향한 동경을 연주하는 목관악기의 선율처럼 아련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언제나 저 자유로운 새들이 부러웠다. 중력과 의무를 벗어던지고, 오직 날갯짓 하나로 대기의 흐름을 타는 저들의 존재 방식이 경이로웠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이 지긋지긋하고 거추장스러운 관계의 사슬들, 딸과 여동생이라는 이름의 의무, 직장 여성이라는 이름의 책임, 그 모든 것을 끊어내고 싶었다. 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대양을 향해, 아무런 미련 없이 훌훌 날아가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열어젖힌 창 유리에, 걱정과 피로로 잔뜩 골이 난 듯한 내 얼굴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흐릿한 상 뒤로 펼쳐진 항구의 풍경과 겹쳐져, 나는 마치 바다에 잠긴 유령처럼 보였다. 그때, 저 멀리서 부우웅, 하고 낮고 길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가 바람을 타고 창문턱을 스르르 넘어와 귓가에 내려앉았다. 출항을 알리는 신호일까, 혹은 입항을 알리는 안도일까. 내게는 그저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진혼곡처럼,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장엄한 레퀴엠처럼 들릴 뿐이었다.
현수는 바다를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는 바다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을 사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분리된 관찰자가 되었고, 나는 그의 곁에서 유일한 관객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주말의 온전한 자유가 허락된 토요일 오후가 되면, 으슥한 산 중턱이나 가파른 언덕 위에 유령처럼 자리 잡은 낡은 모텔들을 찾아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평지보다 산이 훨씬 많은 기형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크고 작은 산들이 짐승의 등뼈처럼 제멋대로 솟아 있고, 그 산들의 가파른 허리춤까지 빈틈없이 낡은 집과 상가 건물들이 이끼처럼 빼곡하게 들어차 기묘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산복도로'라 불렀다. 밤에 배를 타고 이 항구에 처음 들어오는 외국 선원들은, 어둠 속 산비탈을 따라 보석처럼 박힌 불빛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에 넋을 잃고 감탄하며 맨해튼의 야경보다 더 화려하다고 '원더풀'을 연발하곤 했다. 물론, 다음 날 아침, 눈부신 햇살 아래 그 보석들이 실은 녹슨 양철 지붕과 금이 간 시멘트 벽이라는 무질서하고 낡은 현실임이 드러나면, 그들의 감탄은 이내 실망감으로 바뀌곤 했지만 말이다. 현수는 그 양면성을 사랑했다. 밤의 환상과 낮의 진실, 그 모든 것이 이 도시의 진짜 얼굴이라고 했다.
우리는 산동네의 좁고 가파른 길을 곡예 하듯 오르내리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산복도로를, 마치 제 운명을 아는 늙은 짐승처럼 느릿느릿 기어 올라갔다. 창밖으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멀어지는 집들의 옥상, 위태롭게 널린 빨래들,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현수의 눈빛이 머무는 곳,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느껴지는 곳이 나타나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탐험은 예측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낯선 마을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헤맸다. 담벼락에 그려진 유치한 벽화를 보며 웃기도 하고, 볕 좋은 평상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노인들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으려 발소리를 죽이기도 했다. 허름하지만 음식 냄새가 정겹게 새어 나오는 식당이 있으면 주저 없이 들어가 끼니를 해결했다. 주인 할머니가 무심하게 던져주는, 그러나 깊은 맛이 우러나는 국밥 한 그릇은 세상 어떤 진수성찬보다 우리를 충만하게 했다.
운 좋게 '장', '여관', '모텔' 같은 글자가 새겨진 낡은 간판이 눈에 띄면,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의 안식을 구했다. 그런 곳들은 대개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여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성역이었다. 마땅한 잠자리를 찾지 못한 날이면, 우리는 다시 하염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어둠이 내린 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보다 오히려 충만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마침내, 어느 한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은 하늘과 맞닿을 듯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여, 마을 어디에 서 있든 저 멀리 펼쳐진 항구의 잿빛 바다와 그 위에 점점이 떠 있는 배들의 모습이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마을의 중심부, 십자 모양의 좁은 도로 옆에 자리 잡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항구장 모텔'은, 신기하게도 어느 방을 배정받든 창문 너머로 아득한 푸른 수평선이 그림처럼 걸쳐 있었다.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어느 무더운 여름밤의 기억은 내 몸의 모든 세포에 각인되어 있다. 그날 밤, 현수는 나를 이끌고 모텔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에 있는 낡고 녹슨 철문은, 이 도시의 무심함 덕분인지 드물게도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나서자, 후끈한 밤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 발아래로는 숨 막힐 듯 펼쳐진 도시의 야경이, 마치 신이 실수로 쏟아버린 보석 상자처럼 지상에 어지럽게 흩어져 반짝였다. 머리 위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밤하늘의 별들이, 도시의 불빛에 지지 않으려는 듯 끈질기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풍요롭고도 비밀스러운 야경 속에서,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겨진 듯한 완벽한 해방감에 취했다. 현수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옥상 바닥에 깔린 거친 방수포 위로 이끌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떤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천천히 눕혔다. 까슬까슬한 바닥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의 그림자가 내 위로 겹쳐지며, 나는 도시의 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을 동시에 잃었다. 오직 그의 실루엣만이 나의 세계를 가득 채웠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아 겹쳐졌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탐색적으로, 그러나 이내 서로의 타액과 숨결을 게걸스럽게 탐하는 격렬한 입맞춤으로 변했다. 그의 손은 내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서두르지 않는, 그러나 확고한 그의 손길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되었다. 마침내 맨살 위로 밤공기가 스며들자,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체온으로 나를 덮으며,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아, 아무도 없어. 우리뿐이야."
그의 손은 내 몸의 지도를 그리듯, 구석구석을 유영했다. 목덜미를 지나 쇄골의 오목한 부분을 훑고, 젖가슴의 봉우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엄지가 유두를 스치자, 나는 숨을 멈췄다. 쾌감의 전류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척추를 관통했다. 그는 내 치마를 말아 올리고, 속옷의 얇은 천 위로 나의 가장 민감한 곳을 지그시 눌렀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던 나는, 그 압력에 참지 못하고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속옷을 옆으로 밀어내고, 그의 손가락으로 나의 내밀한 공간을 침범했다. 하나, 그리고 둘. 그의 손가락은 부드러우면서도 집요하게 내부를 헤집고, 숨겨진 쾌감의 핵을 찾아 자극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몸을 비틀었다. 도시의 소음,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간간이 울리는 뱃고동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직 그의 손길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폭풍만이 나의 모든 것이었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일부를 내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 나는 가득 차는 충만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처음에는 아주 천천히, 마치 나의 내부를 음미하듯이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의 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질척한 마찰음이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도시의 야경이 은하수처럼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며, 나는 우리가 단순한 육체의 결합을 넘어, 서로의 영혼을 탐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움직임은 점차 빠르고 격렬해졌다. 나는 그의 리듬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쾌감의 파도가 한 겹, 두 겹 밀려왔다. 우리는 다양한 자세로 서로를 탐했다. 내가 그의 위로 올라가 도시의 야경을 등지고 그를 내려다보며 움직일 때, 나는 마치 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는 여왕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가 나를 뒤에서 껴안고, 나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허리를 찧어 올릴 때, 나는 완벽한 피지배의 쾌락 속에서 자아를 잃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땀과 밤공기에 흠뻑 젖은 채 나란히 누워 숨을 고를 때였다. 현수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
그의 목소리는 격정 후의 나른함과 깊은 만족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나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이곳이 사무치게 좋아졌다. 그의 마음에 드는 곳이라면, 그곳이 설령 지옥이라 할지라도 나의 마음에도 들게 되는 것 같았다. 그의 취향은 곧 나의 세계가 되고, 그의 기쁨은 나의 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차가운 옥상 바닥에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누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과 아득한 별빛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사무실의 유령도, 누군가의 딸이나 동생도 아니었다. 나는 오롯이 현수의 여자였고, 이 도시의 밤하늘 아래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커피 한 잔."
과장님의 목소리가 과거의 꿈에서 나를 현실로 세차게 끌어당겼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평소와 달리 자주색 바탕에 자잘한 골이 파인 넥타이가 매여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양복도 늘 고수하던 검거나 짙은 감색이 아닌, 한 톤 밝아진 쥐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만의 규칙에서 아주 살짝 벗어난 듯한 그 미세한 변화가 낯설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의 복장은 언제나 가톨릭 사제가 입는 검은 수단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격하고 단조로웠다. 색과 형태의 변화를 극도로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방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늘, 그 견고한 성벽에 작은 균열이 생긴 것이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어젯밤 좋은 꿈이라도 꾼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일까. 나는 무심한 척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과장님."
사무실 공용 서랍을 열었다.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수북이 쌓여있는 동전들이 금속성의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동전 더미 속에서 100원짜리 하나를 꺼내 복도로 나갔다. 과장님은 자판기 커피의 광적인 애호가였다. 그의 미각은 오직 설탕과 프리마, 그리고 인공적인 커피 향이 만들어내는 그 저렴한 조합에만 반응하는 듯했다. 그가 퇴근할 때쯤이면, 그의 책상 위에는 입구가 구겨지거나 내용물이 갈색으로 말라붙은 종이컵들이 작은 탑처럼 쌓여 있곤 했다.
복도에 놓인 커피 자판기는 내가 관리하는 물품 중 하나였다. 이 회사에서 두 번째로 교육받은 업무였다. 한 달에 한 번, 복도 양쪽 끝에 놓인 자판기 두 대의 배를 갈라 동전을 수거하고, 부족한 커피와 설탕, 프리마 가루를 채워 넣고, 더러워진 내부를 소독하는 일. 그렇게 수거한 동전들은 한동안 내 책상 서랍 속에서 다른 동전들과 뒤섞여 잠자고 있다가, 다시 누군가의 커피값을 치르기 위해 자판기 속으로 들어가 순환했다. 즉, 이곳의 동전들은 내 서랍과 자판기 사이의 좁은 세상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는 운명에 갇혀 있었다.
100원짜리 동전을 자판기 투입구에 넣었다. 찰카닥, 하는 소리와 함께 동전이 기계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나는 밀크 커피 버튼을 눌렀다. 윙, 하는 기계음과 함께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리고,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복도에 퍼졌다. 그 동전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동전들처럼, 나 역시 정해진 공간과 역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해진 동선 안에서만 끝없이 맴돌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
집에서는 아버지와 오빠, 두 남자를 위한 그림자였다. 그들의 식사를 챙기고, 그들이 벗어놓은 옷을 빨래하고, 그들이 어지른 공간을 청소하는 것. 직장에서는 부장님과 과장님, 또 다른 두 남자를 위해 똑같이 청소하고, 커피를 타고, 그들의 심기를 살피는 시녀였다.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 여러 종류의 직업을 거쳐왔지만, 기본적인 나의 역할, 즉 누군가를 돌보고 시중드는 이 의무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나의 노동은 언제나 투명했고, 나의 존재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어쩌면 나는 저 서랍 속의 동전처럼, 스스로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언젠가 낯선 누군가가 나를 이곳에서 꺼내어, 이 자판기와 서랍의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기를, 그리하여 상점의 계산대 위에서, 혹은 누군가의 따뜻한 주머니 속에서 새로운 쓰임으로 사용되기를, 그런 헛된 꿈을 꾸고 있는지도.
혹은 더 비참하게는, 초원 위를 떠도는 간충(肝蟲)의 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의 배설물을 통해 세상에 나와, 축축하고 혼란스러운 풀숲을 뒹굴며, 자신을 품어줄 새로운 숙주, 또 다른 양이 나타나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미미하고 수동적인 존재. 오직 우연에 의해 풀잎과 함께 섭취되어야만 비로소 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그 무력하고도 처절한 기다림의 운명. 현수는 나의 유일한 숙주일까. 그가 나를 삼켜주었기에, 나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의 생명을 얻고 그의 몸속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누리는 것일까. 하지만 숙주가 사라지면, 기생하는 존재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그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을 느꼈다. 내 삶의 의미는 이토록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들고 과장님에게 다가갔다. 그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당연하다는 듯 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모니터 속의 숫자들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의 새로운 넥타이와 쥐색 양복은, 그의 세계에서 일어난 작은 파문일 뿐, 나의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잿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갈매기들은 변함없이 처연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은, 완벽하게 정지된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또다시 투명한 유령이 되어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