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by 남킹

여자

정시였다. 모니터 우측 하단에 떠오른 오후 여섯 시라는 숫자는, 마치 무대 뒤편의 스태프가 다음 막을 알리며 내리는 육중한 막처럼, 나의 하루를 단호하게 두 동강 냈다. 키보드 위에서 분주하게 오가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하루의 노동이 남기고 간 미지근한 열기가 손끝을 감돌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가방을 챙겼다. 변함없이, 학원으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사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부장의 탁한 숨결과 희미한 방향제 냄새, 그리고 침묵의 무게로 이루어진 혼합물 같았다. 그 끈적한 밀도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은 그러나, 문밖의 후텁지근한 여름의 대기에 자리를 내주며 금세 빛이 바랬다. 버스로 두 정거장. 야근만 없다면 나는 그 거리를 언제나 걸어서 갔다.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루 동안 내면에 쌓인 언어의 각질과 감정의 잔해들을 털어내는 나만의 정화 의식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딱딱한 아스팔트 위로 무형의 먼지들이 부서져 내리는 상상을 했다.

가끔, 아주 가끔 부장이 그 의식을 방해하고는 했다. 낡은 세단의 조수석을 턱으로 가리키며 "타"라고 명령인지 호의인지 모를 말을 던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주 잠시 망설이는 연기를 하곤 했다. 그의 차 안은 언제나 그의 세계를 압축해 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시큼한 담배 냄새와 오래된 가죽 시트가 풍기는 역한 냄새, 그리고 그가 뱉어내는 농담들이 안개처럼 자욱했다.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으나, 될 수 있는 한 거절의 말을 아꼈다. 하지만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다. 나의 생존법은 거절이 아니라 관찰과 인내였으므로. 불쾌함의 온도를 재고, 역겨움의 농도를 측정하며, 그 속에서 나의 형태를 잃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는 것. 그것이 내가 터득한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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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랬다. 외근을 나간 과장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텅 빈 책상은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사무실의 풍경을 허술하게 만들었다. 그 공백을 기다렸다는 듯, 부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정적을 깨고 다이얼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공간을 할퀴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때부터 부장의 입은 더러운 배설의 출구가 되었다.

부인은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내와 통화할 때의 건조하고 의무적인 톤과는 결이 달랐다. 마치 내가 꼭 들어야 한다는 듯, 혹은 이 공간의 유일한 청중인 나를 능욕하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점액질의 가래를 머금고 있었다. 온갖 싸구려 음담패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의 언어는 정교하게 조립된 비수가 아니라, 오물을 아무렇게나 그러모아 던지는 투척에 가까웠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욕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사무실의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 내 어깨와 머리카락, 책상 위 서류에까지 내려앉는 듯했다.

나는 전임자, 그녀의 경고를 떠올렸다. 입사 첫날, 인수인계의 마지막 항목이라며 그녀가 나에게 건넨 것은 업무 매뉴얼이 아니라 생존 지침서였다. 작은 메모지에 단정하게 적힌 몇 개의 문장들.

"어떤 이상한 말을 듣더라도 절대 아무 반응을 하지 말 것."

그녀는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노병처럼, 그러나 지독히도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대응을 하는 순간, 예를 들어 찡그리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자리를 피하는 기색이라도 보인다면, 놈은 그 미세한 균열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라고. 후각이 발달한 맹수처럼, 먹잇감의 작은 상처에서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들 것이라고.

만약 대화의 끝에 남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있다고 해도, 있었다고 해도, 혹은 없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있다고 하면 어떤 놈이냐고 물을 것이고, 있었다고 하면 왜 헤어졌냐고 물을 것이며, 없다고 하면 왜 없겠냐고 물을 것이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집요하고 능글맞게,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영혼을 잠식해 들어올 것이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피할 수 없는 예언과도 같았다.

그녀의 전임자에게서, 또 그의 전임자에게서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비급 같은 이야기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각색되고 부풀려진 부분도 있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하나였다. 수많은 여직원이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을 채우지 못하고 부서 이동을 신청하거나 사직서를 던졌다는 것. 그녀들은 처음에는 그저 운이 나쁜 농담, 시대에 뒤떨어진 아저씨의 주책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야근을 명받는 것이 단순한 초과 근무 지시가 아니라는 것을, 퇴근 후 그의 차에 동승하는 것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 후에야, 비로소 선배들의 경고를 간과한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그는 피할 수도, 쳐낼 수도, 그렇다고 맞서 싸울 수도 없는, 그야말로 거대한 액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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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결함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 액운의 존재가 나에게는 오히려 기회로 작용했다. 2년짜리 전문대를, 그것도 스물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졸업한 나에게, 세상의 문은 생각보다 좁고 차가웠다. 수십 통의 이력서는 읽히지도 않은 채 휴지통으로 사라졌고, 몇 번의 면접에서는 나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학력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 앞에서 번번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런 나를 이곳에서는 놀랍도록 선뜻 받아주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세상에 조건 없는 환대는 없다는 것을. 이 정도의 결함은, 내가 지불해야 할 당연한 입사금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에게 단련이 되어 있었다. 나의 유년과 청춘은 저급한 인간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닳고 닳으며 보낸 시간이었다. 시장 바닥에서 욕설과 고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사람들, 월세 보증금을 들고 야반도주하던 이웃들,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아내를 때리던 남자들. 그들의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는 일찌감치 감정을 지우고 상황을 읽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들에게 비하면, 부장의 음흉한 접근은 차라리 예측 가능해서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의 모든 행동과 말은 너무나 교과서적인 '추함'이었기에, 분석하고 분류하기에 용이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데려다준다면 마다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그의 조수석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며, 그의 혼잣말 같은 질문들에 최소한의 단어로 답했다.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전임자의 주의사항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으나, 어떤 상황이 닥쳐도 피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침묵의 관찰자였다. 그의 행동과 말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의 표정 근육의 미세한 떨림까지 분석하며, 참을 수 없는 그 본능의 가벼움을 속으로 조롱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의 소극적인 복수이자, 적극적인 방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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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나서자 막 소나기가 그친 뒤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훅, 하고 온몸을 감쌌다. 아스팔트는 뜨거운 김을 뿜어냈고, 대기는 물기를 머금어 무거웠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미세한 바람의 결이 있었다. 바람이 민소매 속 겨드랑이를 살살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저만치에서는 아직 구름에 가려지지 않은 늦은 오후의 햇빛이, 경적을 울리며 달려가는 차들의 젖은 지붕 위를 섬광처럼 훑고 지나갔다. 세상은 젖어 있었고, 빛나고 있었고, 그리고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학원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강의를 마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왁자지껄하며 쏟아져 나왔다. 그들 속에, 현수가 있었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언제나처럼 그는 무리 속에서도 혼자만 다른 조명을 받는 사람처럼 선명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주변의 소음들을 단숨에 배경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었다.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 특유의 미안한 듯한, 그러나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무언가 짧게 말했다. 그들을 먼저 보내고, 성큼성큼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아직 소년의 탄력이 남아 있었다.

"이제 끝나?"

"응. 지금 가."

"우리 당구 치러 가기로 해서. 금방 갔다 올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수업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온다고. 약속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면서 씽긋 웃었다. 그 미소는 언제나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그 웃음 앞에서는 어떤 의심도, 어떤 원망도 형태를 갖추기 전에 녹아내렸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한번 툭 치고는, 다시 저만치 멀어져 가는 친구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구장 문을 열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가기 전에는, 그는 단 한 번도 먼저 돌아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금방"이라는 말은 언제나 무한히 늘어나는 고무줄과 같았고, 그의 "돌아올게"라는 약속은 지켜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편안하게 넘기기 위해 존재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기다릴 것이다. 학원 강의실 창가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행여나 복도를 지나가는 그의 발소리가 들릴까 귀를 기울일 것이다. 부장의 탁한 세계를 견뎌내는 나의 인내가 수동적인 방어라면, 현수를 기다리는 나의 인내는 능동적인 희망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희망은 언제나 배반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위태롭고 서글픈 희망이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학원 건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방금 전 현수가 내 어깨를 쳤던 그 자리에 그의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부장의 더러운 언어가 내려앉았던 바로 그 어깨였다. 한쪽 어깨에는 견뎌내야 할 현실의 무게가, 다른 쪽 어깨에는 붙잡고 싶은 낭만의 환영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불균형 속에서 위태롭게 걸으며, 또 다른 종류의 노동을 시작하기 위해 강의실 문을 열었다.

남자

형광등 불빛이 당구장의 푸른 벨벳 테이블 위로 사금파리처럼 쏟아졌다. 불빛은 생명력을 잃은 채 건조하게 부서져 내렸고, 그 빛의 파편들은 담배 연기로 자욱한 실내 공기 속에서 길 잃은 유령처럼 부유했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환풍기는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인 듯, 금속성의 신음과 함께 더러운 공기를 힘겹게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그 소음마저도 당구공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경쾌하고 단단한 파열음에 묻혀 희미했다.

게임은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승패의 향방을 가늠할 마지막 공 하나만이 외롭게 테이블 위에 남겨져 있었다. 붉은색의 목적구. 그것은 마치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남은 마지막 병사처럼, 혹은 무대 위 조명을 독차지한 비극의 주인공처럼 고독하고 선명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큐대를 고쳐 잡고 허리를 숙였다. 시선은 큐 끝과 내 공, 그리고 마지막 남은 붉은 공을 잇는 가상의 선 위에 고정되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그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의 궤적, 쿠션의 각도, 필요한 힘의 세기, 그리고 다음 공을 위한 최적의 위치까지. 이 작은 우주 안에서 나는 전능한 창조주이자 냉정한 집행관이었다.

바로 그 순간, 유리문 너머로 익숙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희미한 빛을 등진 채 서 있는 어두운 실루엣. 나는 그것이 그녀임을 직감했다. 애써 구축했던 집중의 성벽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둑이 무너지듯 모든 것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심장이 바닥 없는 늪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미미한 충격과 함께, 방금 전까지 몰두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의미를 잃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뇌리를 가득 채웠던 우주의 법칙과도 같았던 정교한 계산들은 그녀의 등장 앞에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졌다. 마치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무심한 파도에 휩쓸리듯, 내 안의 질서는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큐대를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초크 가루가 묻어 푸르스름해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내 차례의 공이 테이블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잊힌 존재나 다름없었다. 공은 이미 오래전에 제 길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내 시선은 자석에 이끌리듯 유리문 너머의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함께 게임을 하던 상대가 나지막이 불만을 터뜨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나는 이미 그의 존재조차 희미하게 느낄 뿐이었다. 그는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넸지만, 그 말들은 마치 물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웅얼거리며 의미를 상실했다. 나는 미련 없이 큐대를 거치대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나무의 감촉이 손바닥에서 멀어지자, 비로소 나는 내가 속해있던 작은 우주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계산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그만하지."

나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상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이미 게임의 흐름이 끊어졌음을, 그리고 내 마음이 이곳에 없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의 눈빛에는 짧은 아쉬움과 더불어,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한 미묘한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당구장 주인은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계산서를 내밀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얼굴 근육이 어색하게 경련하는 듯 보였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 늦은 밤, 또 한 명의 손님이 떠나는 것을 무감각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네는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지폐의 감촉이 유난히 끈적거렸다. 몇 시간 동안 당구대 주위를 서성이며 흘린 땀과, 큐대에 문지른 초크 가루가 뒤섞여 만들어낸 불쾌한 흔적일까. 아니면, 다가올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만들어낸 신경과민일까. 어쩌면 이 모든 불쾌함은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거스름돈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다시 유리문 너머의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어깨에 맨 가방끈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깜빡이는 복도등 아래 서 있었다. 짙게 내려앉은 복도의 어둠이 그녀의 윤곽선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마치 수묵화처럼 그녀의 존재를 희미하게 번지게 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위태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부동의 자세 속에는 무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기다림의 지루함, 혹은 분노, 어쩌면 깊은 슬픔 같은 것들이 뒤섞인 채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확 끼쳐왔다. 당구장 안의 후텁지근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공기와는 다른, 서늘하고 날카로운 공기였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잠수했다가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폐부 깊숙이 들어온 공기는 상쾌함 대신, 오히려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무게감으로 변했다.

우리는 나란히 어둠에 잠긴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인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간혹 어둠 속에서 나타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마저도 밤의 침묵 속에 흡수되어 버리는 듯했다. 밤바람은 비밀스러운 속삭임처럼 고요하게 살랑거렸고, 골목 양옆으로 도열한 낡고 낮은 건물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공허하고 쓸쓸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바람 소리만이 우리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가늘게 흔들었다. 우리의 발걸음 소리는 그 바람 소리에 섞여들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도드라지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변명, 혹은 그 어떤 해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단어들은 목구멍 근처에서 맴돌다 끈적한 침과 함께 속으로 삼켜졌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느릿한 걸음걸이에 내 보폭을 맞추며, 기계적으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보이지 않는 벽처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 침묵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녀의 낡은 구두가 아스팔트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들려왔다. 사박, 사박. 나는 마치 메트로놈처럼 그 소리에 내 걸음의 리듬을 맞추려 애썼다. 혹시라도 내 발소리가 너무 크거나 빠르면, 이 위태로운 균형이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바늘은 11시를 향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위장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두어 시간 전, 당구장에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시켜 먹었던 짜장면 냄새였다. 당구를 치는 내내, 정신없이 입안으로 밀어 넣었던 그 검고 기름진 소스의 기억이 아직도 위장에서 불쾌하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포만감이 아니라, 약속을 저버린 채 채웠던 이기적인 욕망의 잔재였다. 그녀도 이 냄새를 맡고 있을까.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이 배신과 무책임의 냄새를. 나는 불안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딸깍. 라이터를 켜는 순간, 작고 불안정한 불꽃이 어둠 속에서 잠시 피어올랐다. 그 찰나의 빛이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은,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깊이 화가 나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깊은 침묵에 잠길 때면, 나는 항상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숨 막히는 고요함 같은 것을 느꼈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잘 깎아놓은 상아 조각처럼 차갑고 단단해 보였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 차갑게 식은 밤공기 속으로 무력하게 흩어졌다. 마치 내뱉어 버린 변명처럼, 혹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처럼. 그 연기는 형체를 잃고 사라졌지만, 그 씁쓸한 향은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다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긴 속눈썹에 내려앉아, 뺨 위로 가늘고 섬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감은 듯 내리깐 눈꺼풀이 파르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왜 늦었는지, 왜 그녀를 이 차가운 골목길에 세워두고 기다리게 만들었는지. 그녀의 침묵은 그 어떤 날카로운 질문보다 더 아프게 나를 할퀴었다.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질문과 비난, 그리고 깊은 실망감이 응축되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무거운 침묵을 끌고 걷던 우리는 어느새 불빛이 요란한 사거리에 다다랐다. 횡단보도 앞의 신호등이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으며, 분주했던 도시의 밤을 잠시 멈춰 세웠다. 우리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멈춰 서 있었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품고 있을 얼굴들 위로 붉은빛과 녹색 빛이 교차하며 명멸했다. 어디선가 터져 나온 젊은 남녀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잠시 밤공기를 갈랐다가, 이내 다시 무거운 적막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다른 세상의 언어처럼 낯설고 아득하게 들렸다. 갑자기 정수리 부근이 뜨거운 모래를 뒤집어쓴 것처럼 뜨끔뜨끔 욱신거렸다. 깊은 죄책감의 발현일까, 아니면 단순히 피로 누적으로 인한 두통일까. 어쩌면 그 둘 모두가 뒤섞인, 이름 붙일 수 없는 종류의 통증일지도 몰랐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뭐라도 먹을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고 어색하게 터져 나왔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부자연스러운 톤이었다. 사실, 내 배는 이미 불렀다. 당구장에서 먹은 짜장면이 아직도 소화되지 않은 채 위장 속에서 불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질식할 듯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에게 무언가 제스처라도 취해야만 했다. 직접적인 사과 대신, 나는 서투르게 음식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비록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준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할 터였다. 위장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더라도, 그녀의 얼어붙은 분노를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해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그 자리에 잠시 못 박힌 듯 멈춰 서 있더니, 아주 천천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깊은 침묵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나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처럼 느껴졌다. 붉은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자, 우리는 다시 말없이 발걸음을 옮겨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한 허름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이라는 간판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몇 글자의 네온 불빛이 꺼져 있었고, 먼지와 기름때가 뿌옇게 앉은 유리창 너머로는 식당 내부의 희미한 불빛과 형체들만이 어렴풋이 비쳤다. 그곳은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비켜난 섬처럼,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에서 외롭게 빛나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쿰쿰하고 진한 청국장 냄새가 먼저 우리를 맞이했다. 이미 영업 종료 시간이 가까워진 듯, 식당 내부는 한산했다. 대부분의 손님은 떠나고, 그들이 남긴 빈 그릇들과 음식 찌꺼기들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몇몇 테이블에는 서둘러 계산하고 나간 듯, 젓가락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반쯤 마신 물컵들이 위태롭게 가장자리에 걸쳐 있었다. 낡고 끈적거리는 비닐 식탁보, 등받이가 삐걱거리는 플라스틱 의자, 누렇게 변색된 벽지와 천장까지, 식당의 모든 것에서 깊숙이 배어 나온 청국장과 오래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몇 년, 아니 어쩌면 몇십 년 동안 이곳에서 끓고, 지지고, 볶아져 온 무수한 음식들의 향기가 겹겹이 쌓여 하나의 거대한 퇴적층을 이룬 듯했다.

주방 입구 근처에 서 있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중년의 종업원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무심하게 흘낏 쳐다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무슨 손님이람' 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기색도 없이,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창가 쪽 빈자리에 가 앉았다. 마치 이곳이 아주 익숙한 장소라는 듯이, 혹은 그저 어디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무심한 태도였다. 나도 서둘러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끈적거리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괴자, 불쾌한 감촉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이 청국장 백반 두 개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작은 수첩에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무언가를 짧게 휘갈겨 적고는, 다시 주방 쪽으로 느릿하게 사라졌다. 식당 안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다. 주방 안쪽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냄비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설거지하는 듯한 접시 부딪히는 소리만이 무거운 정적을 간헐적으로 깨뜨릴 뿐이었다. 벽 한쪽에 위태롭게 매달려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에는 먼지와 기름때가 두껍게 엉겨 붙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선풍기 날개가 힘겹게 돌 때마다, 그곳에 붙어 있던 미세한 먼지들이 풀풀 날려 희미한 불빛 아래서 부유했다. 문득 옆 테이블을 보니, 손님이 먹다 남기고 간 잔반 더미 위로 검은 파리 몇 마리가 극성스럽게 윙윙거리며 몰려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파리 떼에서 시선을 거두어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짙고 까만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뒤로 질끈 묶은 그녀의 머리 위에도, 어느새 날아온 파리 한 마리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녀석은 작은 더듬이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날아올라 식탁 모서리를 잠시 짚고는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는 파리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 혹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맞은편 벽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섬세하게 조각된 마론 인형처럼 가늘고 곧은 선을 가지고 있었다. 전형적인 동양인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서양 인형의 정교하고 차가운 아름다움을 닮은 듯한 윤곽이었다.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특히 관자놀이 부근에서 날렵하게 떨어지는 턱선은 단호하고 날카로운 느낌마저 주었다. 나는 그녀의 텅 빈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벽에 걸린 낡은 액자로 시선을 옮겼다.

액자 속에는 기도하는 소녀의 그림과 함께,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시 한 구절이 인쇄되어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낡을 대로 낡은 나무 액자에는 시간의 때가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유리 표면에는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뿌연 먼지층이 얇게 형성되어 있었고, 액자 가장자리는 습기와 세월에 의해 누렇게 변색되어 얼룩덜룩했다.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갔던 동네 이발소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의 벽에도 똑같은 그림과 글귀가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다. 비단 이발소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목욕탕의 휴게실 벽에도, 가끔 타던 시내버스의 운전석 위에도, 심지어는 학교 앞 분식집에도 이와 비슷한 액자가 심심찮게 걸려 있었다. 너무나 익숙하게, 그래서 거의 잊힐 만큼 무심히 지나쳤던 글귀였다. 하지만 때로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요동치는 감정의 깊은 골짜기를 따라 헤매다 지칠 때, 그 무심했던 글귀가 예기치 않게 다가와 위태로운 내 삶의 작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다.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스무 살 무렵, 머리를 짧게 깎기 위해 찾아갔던 입영소 이발소에서였다. 앞으로 닥쳐올 낯설고 엄격한 군대 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해 들어올 때, 벽에 걸린 바로 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나는 다가올 미지의 시간들에 대한 공포를 애써 떨쳐내기 위해, 마치 주문처럼 수없이 그 시구를 속으로 되뇌었었다. 슬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말자고. 그 주문은 마법처럼 불안을 잠재워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액자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정말로 그 액자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투명한 벽 너머의 다른 세계를 응시하듯, 혹은 자기 안의 깊은 심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 듯 보였다. 나는 무언가 말을 건네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번번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태의 그녀에게 섣불리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쓰디쓴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때, 종업원이 김이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엽차 두 잔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차는 탁한 갈색 빛을 띠고 있었고, 표면에는 미세한 기름기 같은 것이 엷게 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입안에 차가 닿는 순간, 시큼하고 퀴퀴한 쉰내가 확 풍겨왔다. 너무 오랫동안 주전자 속에서 우려낸 찻잎이 상해 버린 듯했다.

순간 역한 욕지기가 안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속이 울컥하며 메슥거리는 느낌에 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아내며, 나는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격한 분노와 혐오감에 휩싸였다. 이 불결한 공간, 상한 차, 그리고 이 숨 막히는 침묵까지, 모든 것이 견딜 수 없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나는 문득 여자의 눈에 고인,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말았다. 그녀의 크고 검은 눈망울 가장자리에 투명한 이슬방울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식당의 흐릿하고 누런 조명 아래서 위태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감추려는 듯, 혹은 참아내려는 듯 눈을 세차게 깜빡거렸지만, 그럴수록 눈물은 더욱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제 그만 만나도 괜찮아."

마침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낮고 차분했지만, 끝부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길고 긴 침묵 끝에 나온 그녀의 첫 마디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거의 기어들어 가는 듯한 말끝을 따라 아주 희미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 짧은 문장 속에는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듯한 단호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입 밖으로 꺼낸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동시에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우리의 관계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소원해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재는 언제나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하염없이 사라지나. 그리고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그것 역시 푸시킨의 시구였다. 벽에 걸린 액자에 적힌 구절과는 다른 내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 입에서는 그 구절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서툰 변명이었을까, 아니면 다가올 이별에 대한 예감이었을까.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 속에는 슬픔인지, 분노인지, 혹은 깊은 체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식당 안의 낡은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그 공허한 시선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우리 관계의 마지막을 알리는 초침 소리처럼, 무겁고 냉정하게 울려 퍼졌다.

여자

결국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남자는 주문한 청국장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숟가락으로 몇 번 뒤적거리다 말았을 뿐이다. 나는 달랐다. 뚝배기 바닥이 보일 때까지 말끔히 비웠다.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진하고 구수한 청국장의 맛이 이상하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서였을까. 그래서 본능적으로 하나라도 더 먹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빈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이었을 수도 있다.

다시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서자, 낮 동안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던 바람이 밤이 깊어 가면서 그새 파르스름하고 싸늘하게 돌변해 있었다. 맨살에 와 닿는 공기가 제법 차가워 한기를 느끼게 했다. 이제 뜨거웠던 여름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계절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바람만이 휑하니 골목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밤하늘은 도시의 현란한 불빛에 오염되어 단 하나의 별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칙칙하고 불투명한 암갈색의 거대한 천막이 우리 머리 위를 무겁게 덮고 있을 뿐이었다. 간간이 골목 끝을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어둠을 잠시 갈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식당 안에서 나눈 그 짧고 위태로운 대화 이후, 우리 사이에는 더욱 깊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의 대화는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쯤 걸었을까. 남자가 불쑥, 그러나 망설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밤… 같이 있자."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웠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낮게 웅크린 듯한 톤이었다. 내 반응을 살피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골목 안쪽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얼굴 윤곽은 어둠에 잠겨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빛을 반사하며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깊은 슬픔과 불안, 그리고 약간의 절박함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순간, 어디든지 좋으니 구석진 곳에 그냥 콕 처박혀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밀려왔다. 벌써 스물아홉.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먹고 자고 싸고, 그리고 가끔 이렇게 섹스하며 무의미하게 늙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아무래도 내게 주어진 이 인생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길고 버겁게만 느껴진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어 이 지긋지긋한 권태와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결국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오늘이 정말 우리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저 이 차가운 밤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와 함께 있을 때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갈망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 모든 이유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라면, 적어도 오늘 밤 몇 시간 동안은 이 지긋지긋한 현실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남자와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여관을 향해 걸었다. 낡고 허름한, 그러나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탐하고 관계를 맺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한때는 거의 매일같이, 집처럼 드나들었던 곳.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우리는 이곳에서 서로를 위안 삼고 현실을 잊으려 했었다. 오랜 단골이 된 우리를 여관 입구에서 졸고 있던 주인은 말없이 알아보았다. 그는 눈짓으로 익숙한 열쇠 하나를 카운터 위에 툭 던져 놓았다. 302호. 우리가 항상 묵던 방의 번호였다. 그 무심한 몸짓 속에는 우리의 관계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혹은 그저 지겹다는 듯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층계를 한 칸 한 칸 올라가는 동안, 나는 우리의 과거를 필름처럼 떠올렸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어색함과 설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던 비밀스러운 긴장감.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무뎌지고 습관처럼 변해버린 방문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방문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다른 새로운 모텔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마치 낡은 장소를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면, 우리의 관계도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은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그가 몇 군데의 새로운 장소를 거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관계에서 ‘주중 정사’라는 뜨겁고 밀도 높았던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뒤였다.

익숙한 302호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코를 훅 찌르는 특유의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벽과 천장에 스며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으로 사용하는 값싼 세제 냄새,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피우고 남긴 담배 냄새가 역겹게 뒤섞여 있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빛바랜 꽃무늬 커튼은 어설프게 반쯤만 쳐져 있었다. 창밖에서 요란하게 깜빡이는 술집의 네온사인 불빛이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와 방 안을 온통 저속하고 음란한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스프링이 주저앉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침대 옆의 낡은 협탁 위에는 전화기와 누렇게 변색된 메모지 몇 장이 흐트러진 채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변함없었지만, 그 변함없음이 오히려 더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 발치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전화기가 놓인 협탁 옆으로 다가갔다. 습관처럼 집으로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집에는 내가 몇 시에 들어오는지, 아니 들어오기는 하는지조차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혹은 그저 의무감에 전화를 걸었다. 낡은 다이얼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는 감촉이 뻑뻑했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 길고 지루한 신호음만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아무도 받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 섞인 생각이 들 때쯤, 마침내 수화기 저편에서 누군가 전화를 받는 듯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것은 아버지였다. 잔뜩 혀 꼬부라진, 불분명한 발음의 음성.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그의 숨결에서는 역한 술 냄새가 한 움큼 묻어나는 듯했다. 아버지는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채지 못한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것인지 유난히 슬프고 처연하게 들렸다. 마치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것이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슬픔은 언제나 값싼 소주와 함께 찾아왔고, 술이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곤 했다.

나는 의례적인 안부 몇 마디만 건네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오늘 밤 자고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사실,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내가 이 남자와 함께 집 밖에서 일주일을 뒹굴다 들어가든, 혹은 며칠 밤을 새우고 들어가든,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라고는 – 물론 달랑 아버지와 오빠, 두 사람뿐이지만 – 그들에게서 내가 듣게 될 소리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고프다, 밥 차려라." 그뿐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의 생존을 위한 끼니를 책임지는 가사 도우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외에 내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그들은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가면, 방 안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라면 봉지와 빈 술병들을 치우고, 싱크대에 쌓인 곰팡이 핀 그릇들을 씻고,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식재료로 겨우 흰쌀밥을 짓고, 냉동실의 고등어 통조림을 데우거나 달걀 몇 개를 부쳐 내놓으면, 아버지와 오빠는 마치 며칠을 굶주린 걸신이라도 들린 듯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그들의 식탐은 마치 밑 빠진 독처럼 끝이 없었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내 노고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먹을 뿐이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날, 엄마가 말없이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는 급격하게 쇠락해갔다. 한때는 건장했던 그의 몸은 거칠고 메마른, 마치 대청마루 구석에 방치된 시래기처럼 볼품없이 시들어 갔다. 넓었던 이마는 더욱 훤하게 벗겨졌고, 그 위에는 짙고 검은 주름들이 계곡처럼 깊게 파여 더욱 거칠게 얼굴을 휘감았다. 성기게 돋아난 옆머리와 뒷머리는 허옇게 센 채로 땀과 기름에 절어 찰떡처럼 두피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뜩이나 앙상했던 어깨는 속으로 움푹 팬 볼만큼이나 위태롭게 구부러져 갔다.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한때 가장으로서의 위엄이나 인간다운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마치 살아있는 송장처럼 아무런 의욕 없이 집안을 배회했다.

아버지는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텔레비전 앞에 멍하니 앉아 몇 시간이고 채널만 돌렸다. 넋 나간 사람처럼 화면을 응시했지만, 사실 텔레비전이 아버지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옆에 놓인 소주잔을 까딱 기울이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혼자 횡설수설 중얼거리다가 스르르 잠들곤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오면, 그는 마치 어젯밤의 무기력함은 모두 잊었다는 듯이, 어딘가에서 싸구려 개를 사거나 얻어오기 위해 이 도시의 변두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오빠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살았다. 그는 결코 밑바닥 세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투견 도박이 주는 짜릿한 흥분과 일확천금의 망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다 가진 돈이 다 떨어지거나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지면, 그는 슬그머니 집으로 기어들어와 마치 깊이 반성이라도 하는 듯 자숙의 몇 주를 보내는 척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아버지나 옛 친구들, 혹은 동네 보신탕집 주인을 교묘하게 꾀어 다시 얼마간의 푼돈을 손에 쥐게 되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다시 어둠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의 삶은 끝없는 도주와 잠시의 회귀가 반복되는 무의미한 궤도의 연속이었다.

나에게 가족이란, 존재하지만 잡을 수 없는 뜬구름 같은 것이었다. 우리를 이어주던 희미한 연결고리는 이미 오래전에 연기처럼 부서져 사라졌다. 그들의 팍팍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 한 투명 인간이었고, 반대로 내게 그들은 그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영역을 결코 침범하지 않는, 완전히 별개의 세 우주와 같았다. 각자의 정해진 궤도를 침묵 속에서 묵묵히 돌며, 아주 가끔 어쩔 수 없이 스치듯 교차하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행성들처럼.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남자는 어느새 외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놓고,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고 있었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익숙하게 단추 구멍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처연하고 슬퍼 보였다. 마치 아주 중요하고 소중했던 무언가를 스스로 포기하고 해체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붉은 네온사인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내가 침대에 앉자마자, 남자가 다가와 갑자기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훅, 하고 그의 뜨겁고 거친 입김이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그의 숨결에서, 아까 골목길에서 맡았던 그 역한 짜장면 냄새가 다시 한번 강하게 풍겨왔다. 그 냄새는 이 밤의 공기를 무겁게 채우며, 질식할 듯한 불쾌감과 함께 나를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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