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의 잔상

by 남킹


하나. 갈색 가을, 이국의 선율

알리칸테의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투명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지중해의 염분을 실어 나르는 가을바람이 도시의 좁은 골목길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오래된 석조 건물들의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바람결 속에는 마치 고향의 마당을 쓸던 어머니의 비질 소리 같은, 아련한 그리움의 입자가 섞여 있는 듯했다. 나는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순례자처럼, 이 낯선 도시의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거닐었다.

활기 넘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오후의 시장. 향신료의 이국적인 내음과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한 향기, 생선 비린내와 올리브 절임의 짭짤한 기운이 뒤섞여 오묘한 후각의 교향곡을 연주했다. 상인들의 외침과 흥정하는 목소리들이 낯선 언어의 벽을 넘어 정겹게 다가왔다. 문득, 한국의 시골 장터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마솥,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 허기진 속을 뜨끈하게 달래주던 잔치국수 한 그릇. 금방이라도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물까지 들이켤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이곳은 알리칸테. 뜨거운 멸치 육수의 위안 대신, 나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가슴 속 빈 공간에 다른 무언가를 채워 넣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래된 플레이리스트에서 왕자웨이 감독의 <화양연화> 사운드트랙을 찾아 재생했다. 시게루 우메바야시의 ‘유메지의 테마’. 첼로의 낮고 애절한 흐느낌으로 시작해 바이올린의 가늘고 예민한 선율이 뒤따르는 그 곡조가, 알리칸테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었다. 마치 시간의 주름을 펼쳐 보이며, 기억의 심연으로 나를 이끄는 마법의 주문과 같았다. 왈츠의 느리고 반복적인 리듬에 맞춰, 나는 의식의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지나간 시간들, 붙잡지 못한 순간들, 어긋난 인연들이 흑백 필름처럼 느리게 눈앞을 스쳤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피는 시절.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순간은 언제나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지독히도 누군가를 갈망하고, 그 존재만으로 세상이 빛나던 순간들. 어쩌면 지금 내가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그 아스라이 멀어진 ‘꽃 같은 시절’의 잔영(殘影)을 붙잡아두려는 처절한 몸짓일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그렇다.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헤매는, 영혼의 가장 내밀한 방랑이다. 나는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고, 그 방랑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둘. 갈색 가을의 독백

구름은 오늘따라 유난히 낮게 흘러가며

하늘의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저 하늘 아래, 당신의 희고 고왔던 이마 위엔

수줍게 피어난 수국 꽃잎처럼, 혹은 붉은 보석처럼

선명했던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었지요.

이제는 마른 그 흔적처럼, 당신의 눈빛에 어려 있던

축축한 슬픔의 기색도 모두 증발해 버렸을까요.

돌이켜보면, 나의 고백은 언제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고 소심했습니다.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했고, 돌아서야 할 때 머뭇거렸습니다.

나의 영혼은 여전히 그 아픔의 기억과 회한의 기슭 사이에서

길 잃은 조각배처럼 허우적거립니다.

모든 찬란했던 사랑은, 어찌하여 이토록 덧없이 짧은 것인지요.

그 짧은 순간이 남기고 간 긴 그림자,

사무치는 그리움은 어김없이 계절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가 되어 돌아옵니다.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으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나는 그저, 이 깊고 고요한 갈색 가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낙엽이 쌓이듯, 시간의 퇴적물을 묵묵히 견뎌내며.

셋. 알리칸테, 시간의 편린들

지중해 연안의 도시, 알리칸테에서 완연한 시월을 감각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살갗을 스치는 바람의 질감이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는 간데없고, 청량하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바람. 그것은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가장 정직한 전령사다. 둘째는 도시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올리브 나무들이다. 길가에, 공원에, 심지어는 주택가 담장 너머로도 초록 잎사귀 사이로 까맣게 익어가는 올리브 열매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마치 시간이 공들여 빚어낸 검은 진주알처럼, 세월의 숙성이 빚은 결실들이 도시의 풍경 속에 점점이 흩뿌려져 있다. 저 작은 열매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햇살과 바람,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을까 생각하니, 문득 숙연해진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레스토랑을 찾아 걷던 중, 발걸음을 멈추게 한 표지판이 있었다. 바다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 입구에 세워진 그것에는, 입맞춤하는 남녀의 그림과 함께 스페인어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필체. “¡Solo se puede pasar besándose!” (오직 키스해야만 지나갈 수 있는 길!)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의 등하굣길 안전을 위한 표지판이었지만, 그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발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역시, 사랑을 갈망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만국 공통의 언어인가 보다. 이 낯선 땅에서도 나는 익숙한 온기를 발견한다.

어느 집 담벼락에는 익살스러운 표정의 도깨비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눈, 툭 튀어나온 입, 뿔처럼 솟은 머리카락. 우리의 하회탈 중 각시탈이나 양반탈의 어떤 표정을 닮은 듯한 친근함이 느껴졌다. 이토록 아득히 먼 곳에서도, 무의식은 끊임없이 고향의 익숙한 형상들을 찾아내어 연결 짓는 모양이다. 영혼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질긴 것일까.

마침내 찾아낸 햄버거 전문점. 그런데 메뉴판에서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제품, <김치 햄버거>. 이역만리 스페인 땅에서 만난 김치라니! 마치 타국에서 조국의 국가대표라도 만난 듯, 묘한 자부심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다. 주저 없이 주문했다. 맛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두툼한 패티와 치즈, 양상추 사이 어디에서도 김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름만 ‘김치’일 뿐, 맛은 여느 느끼한 서양식 햄버거와 다를 바 없었다. 혀끝을 아리게 하는 매콤함도, 아삭하게 씹히는 배추의 질감도, 깊고 시원한 발효의 풍미도 없었다. 마음속의 바다가 다시 속삭이는 듯했다. "쯧쯧, 이 집 사장님에게 제대로 된 포기김치 한 통 보내드려야겠네." 씁쓸한 웃음과 함께, 나는 진짜 김치의 맛을, 그 짜릿하고 강렬한 고향의 맛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그것은 단순한 미각의 문제가 아니었다. 혀끝이 아닌 심장을 찌르는, 짙고 아릿한 향수였다.

넷. 영혼의 작은 집, 소박함의 미학

돌아오는 길에 아주 자그마한 예배당을 만났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낡은 문, 소박한 돌담, 그리고 지붕 위의 작은 십자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그저 경건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문득 오래전, 한국의 어느 유명한 수필가가 쓴 글귀가 떠올랐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하고 느꼈던 감상.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눈부신 화려함 앞에서, 과연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이토록 거대하고 호화로운 자신의 집을 보며 마음이 편하실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 수필가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며, 나는 유럽 여행 중 종종 마주치는 이런 작고 소박한 교회나 예배당에서 오히려 더 큰 위안과 평화를 얻곤 했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극치의 웅장함보다, 꾸밈없이 소박한 공간이야말로 상처받고 지친 영혼을 진정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어쩌면 글쓰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현란한 수사나 기교로 치장된 문장보다, 투박하더라도 진심을 담아 건네는 소박한 이야기가 더 깊은 울림을 주고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처럼. 진정성은 화려함이 아닌, 단순함과 솔직함 속에 깃드는 법이다. 나는 그 작은 예배당 앞에서 잠시 머물며, 내 글 또한 그러하기를 소망했다.

다섯. 책상 앞의 항해자: 속박과 자유의 변증법

집에 돌아와 불을 켜고, 나는 다시 익숙한 의식처럼 유튜브를 열어 음악을 골랐다. 오늘은 메이지 스타(Mazzy Star)의 'Fade Into You'. 희뿌옇고 몽환적인 기타 리프와 나른하게 속삭이는 듯한 보컬이 방 안의 공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속박이자 동시에 가장 완전한 자유의 시간이다.

가끔 스스로에게 놀랄 때가 있다. 이토록 치열하게 자유를 갈망하는 내가, 어떻게 매일같이 이 좁은 책상 앞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육체는 사각의 틀 안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지만, 나의 정신은 이 순간 가장 멀리, 가장 깊이 항해할 준비를 한다. 이 역설적인 행위는, 어쩌면 시간이라는 거대한 바다, 혹은 내면이라는 미지의 심연 속으로 안전하게 잠수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책상이라는 앵커, 키보드라는 산소 호흡기—를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심연의 바닥에는 내가 마주해야 할 진실과 욕망의 실체가 가라앉아 있음을 알기에, 나는 기꺼이 이 속박을 감수한다.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고 싶은 방랑자의 영혼이, 어째서 미동도 없이 책상 앞에 좌정하는가? 그것은 육체의 부동(不動)을 통해 정신의 무한한 비행을 꿈꾸기 때문이다. 보이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우주, 상상력의 광활한 영토를 탐험하기 위한 역설적인 의식. 글쓰기는 육체의 속박을 제물로 바쳐 정신의 해방을 얻어내는, 나만의 샤머니즘이다.

물론, 이 고독하고 지난한 작업을 계속하는 데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재능과 능력 중에서, 글쓰기만큼 ‘가성비’가 뛰어난 행위는 드물다는 냉정한 판단. 최소한의 물리적 자원으로 최대한의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 과정 자체가 나를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는 용광로가 된다는 믿음. 그것은 맹목적인 희망이라기보다는,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일종의 낙관적인 앎에 대한 투자다. 글쓰기는 평범한 일상의 납덩이를 문학이라는 황금으로 바꾸려는, 시간과 노력을 연료 삼아 이루어지는 고독한 연금술사의 비술(祕術)인 것이다.

여섯. 심연의 잠수부, 문학의 중력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문학이라는 이름의 깊고 어두운 바다로 뛰어드는 잠수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을 탐독하고, 그 안에 담긴 무수한 서사의 갈래와 기법들을 파고드는 여정. 그것은 때로는 나에게 숨 쉴 공기를 제공하는 산소통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납덩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위대한 작가들의 성취는 경이로움과 동시에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오고, 그들의 빛나는 문장들은 때로 나의 미숙함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묵직한 중력을 견뎌내고 더 깊은 심연으로, 더 어두운 해구(海溝) 속으로 내려가야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나만의 진주가 있다는 것을.

언젠가 나는 판타지 장르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마법과 용, 기사와 공주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두려움과 용기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나의 상상력은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지 못했고, 판타지라는 허울 좋은 외피 속에 담아내려 했던 죄의식과 실존적 고뇌는 결국 현란하지만 공허한 입놀림으로 끝나버렸다. 마법은 설득력을 잃었고, 용의 포효는 공허했으며, 인물들은 생명력을 얻지 못했다. 그것은 문학적 허상과 내가 발 딛고 선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명백한 실패였다. 나는 여전히 그 실패의 쓴맛을 기억하며, 문학의 길 위에서 끊임없이 진실과 허구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아 헤맨다. 화려한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서도, 결코 현실의 고통과 무게를 외면하지 않는 글. 마법 같은 이야기 속에서도 인간 영혼의 가장 진솔한 떨림과 고뇌를 담아내려는, 그 고단한 줄타기를 계속할 뿐이다.

일곱. 독자라는 거울, 책의 무게

나는 때때로 상상한다. 언젠가 나의 책이 세상에 나와, 누군가의 손에 들려 읽히는 순간을. 낯선 독자들이 한 자 한 자, 나의 문장들을 눈으로 따라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설명할 수 없는 설렘과 함께 깊은 통증 같은 것이 밀려온다. 그들의 눈빛 속에 담긴 갈망과 호기심이, 혹시 그들의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헛되이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내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남는 것 없는 허망함만을 안고 책을 덮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어쩌면 나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허언증 환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작가의 책임감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자에게 잠시나마 위안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 있는 파장을 던져줄 수 있는가. 혹독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다시 현실로 돌아갈 용기와 지혜를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의 무게는 실로 감당하기 버겁다.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 그는 늘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으며, 지식과 사유로 단련된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는 내면의 불의와 외면의 생활고에 분노하며, 때로는 광장에 나가 불어오는 혁명의 불씨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그 대가로 차가운 감옥의 독방에서 사색에 잠기기도 하는, 이상주의자이자 비판적 지식인이다. 나의 가장 엄격한 독자이기도 한 이 안경 낀 내면의 자아는, 내가 밤새 고뇌하며 써 내려간 소설의 초고를 읽고 나면 늘 한결같은 평을 내린다.

"아직, 부족해."

그 한마디. 세상의 어떤 찬사보다도 무겁고, 어떤 비난보다도 아프게 파고드는 그 한마디가,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그것은 나를 더 깊은 성찰과 더 치열한 글쓰기의 세계로 이끄는, 잔인하지만 정직한 나침반이다. 나는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키보드 앞에 앉는다.

여덟. 알리칸테의 가을, 다시 화양연화

이제 나는 다시, 화양연화의 순간들을 되짚어본다. 왕자웨이의 영화 속, 좁고 어두운 복도에서 스치듯 마주쳤던 장만옥과 양조위의 눈빛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간의 잔상들. 알리칸테의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서, 낯선 도시의 이름 모를 골목길에서, 실망스러웠던 김치 햄버거의 맛 속에서도, 나는 어쩌면 나만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늘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가 속절없이 스쳐 지나간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행복의 감각은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남는 것은 희미한 온기와 애틋한 그리움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찰나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려 애쓰는 것일 테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리고, 붙잡지 못한 감정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글이라는 형태로 박제하려는 노력.

깊어가는 갈색 가을, 올리브 열매가 익어가는 도시 알리칸테에서, 나는 또 다른 화양연화를 꿈꾼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는 나만의 방식이다. 책상 앞이라는 속박 속에서 역설적으로 발견한 영혼의 자유로운 비행.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허락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메이지 스타의 노래가 끝나갈 무렵, 나는 천천히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글 속으로, 시간 속으로, 기억의 심연 속으로. 마치 물에 잉크가 번지듯, 나의 존재는 희미해지며 이야기 속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당신의 기억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간다.

Fade Into You.

바티칸의 최종 병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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