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블랙기업, 주식회사 세종대왕
짐은 그대를 보낼 생각이 전혀 없다
등장인물:
세종 (40대 후반): 백성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하들의 인권을 잊어버린 워커홀릭 군주. 고기 애호가. 악의는 없는데 결과가 악마적이다.
황희 (80대 후반): 조선의 명재상. 은퇴가 꿈인 장기 근속자. 허리, 무릎, 눈, 귀 성한 곳이 없다.
도승지: 눈치 빠른 비서실장.
(배경: 늦은 밤 경복궁 사정전. 촛불이 일렁이고, 서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세종은 한 손에 고기 산적을 들고 서류를 검토 중이다.)
도승지: (조심스럽게) 전하, 영의정 황희 대감 들었사옵니다.
세종: (화색이 돌며) 오! 들어오시라 해라. 안 그래도 농사직설 개정판 때문에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잘됐구나.
(문이 열리고, 황희가 지팡이를 짚고 거의 기어 들어온다. 백발이 성성하고 눈 밑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황희: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하... 신 황희,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을 아뢰러 왔나이다...
세종: (해맑게) 영의정! 어서 오시오. 낯빛이 아주 좋소. 회춘하신 것 같구려.
황희: (울컥하며) 전하, 신의 나이 올해 여든아홉입니다. 오늘내일하고 있습니다. 밥숟가락 들 힘도 없어 죽만 먹습니다. 제발... 제발 사직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여기 사직서(辭職書)를... (품에서 꼬깃꼬깃한 봉투를 꺼낸다)
세종: (봉투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기 산적을 씹으며) 에이, 농담도 잘하십니다. 어제 경연에서 목소리가 아주 우렁차시더이다.
황희: 그것은... 전하께서 자꾸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시니 억울해서 소리를 지른 것이옵고... 이제 귀도 잘 안 들립니다.
세종: (목소리를 낮게 깔며) 과인이 오늘 점심에 반찬 투정하다가 중전에게 등짝 맞은 건 들리시오?
황희: (자기도 모르게) 아니, 성군께서 어찌 그런...
세종: (씨익 웃으며) 거 보시오. 아주 잘 들리시는구려. 청력이 소머즈급이요. 반려.
황희: (털썩 주저앉으며) 전하! 다리가... 다리가 말을 안 듣습니다. 무릎 연골이 닳아 없어진 지 오랩니다. 관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릅니다. 출퇴근길이 지옥 같습니다.
세종: 아, 그건 과인이 미리 조치해 두었소.
황희: 예?
세종: 대감의 다리가 불편하다 하여, 궁궐 안에서도 가마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겠소.
황희: (경악) 아니, 전하! 그게 무슨... 가마를 타도 허리가 아픕니다! 덜컹거리는 진동을 이 늙은 몸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종: 걱정 마시오. 조선 최고의 가마꾼들을 선발해 '무진동 가마'를 준비했소. 물 잔을 올려놓아도 쏟아지지 않는 승차감을 자랑한다 하더이다. 이제 편안하게 누워서 서류를 보며 출근하시오.
황희: (절망) 누워서... 서류를... 보라고요?
세종: 그렇소. 시간을 아껴야지 않겠소? 아, 그리고 지팡이도 하나 더 하사하겠소. 아주 튼튼한 '청려장'이니, 그걸 짚고 힘내서 일하시오.
황희: (마지막 승부수) 전하... 사실은 제가... 치매(노망)기가 있습니다.
세종: (정색하며) 치매라니?
황희: 방금 들은 말도 까먹고,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나랏일에 구멍을 낼까 두렵습니다. 제가 누구인지도 가끔 헷갈립니다.
세종: 저런... 그럼 묻겠소. 태종 18년에 대감이 횡령... 아니, 잠시 유배 갔을 때, 그때 가져간 뇌물 목록이 어떻게 되오?
황희: (반사적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아, 그건 오해십니다! 당시 박 포가 억지로 준 말 두 필하고, 비단 다섯 필, 그리고 땅 문서는 잠시 맡아둔 것이었... (아차 싶어 입을 막는다)
세종: (박수를 치며) 브라보! 20년 전 장부 내역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시다니! 과인보다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치매는 무슨, 뇌가 20대 청춘이시구려. 반려!
황희: 전하!!! 제발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차라리 사약을 내려주십시오!!!
세종: 에이, 섭섭한 말씀. 대감은 나의 '국보'요. 국보는 함부로 폐기처분 할 수 없소. 자, 여기 힘내라고 하사품을 준비했소.
(도승지가 상을 들고 온다. 소고기국밥과 업무 서류 한 보따리가 놓여 있다.)
세종: 고기 국이 아주 진국이오. 한 그릇 뚝딱 비우시고, 저기 쌓인 '4군 6진 개척 관련 예산안' 좀 검토해 주시오. 내일 아침 조회 때까지.
황희: (허공을 응시하며 넋이 나감) 전하... 저승사자가 보입니다... 저기 문 앞에 서서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세종: 도승지, 뭐 하느냐. 영의정 대감 눈앞에 어의(御醫)를 대령해라. 침을 맞아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드려라. 오늘 밤은 길다.
황희: (울면서 고기 국을 억지로 떠먹으며) 아이고... 내 팔자야... 저승도 정년퇴직이 있는데 조선에는 없구나...
세종: (흐뭇하게 바라보며) 역시 대감뿐이오. 100살까지만 합시다, 우리.
(황희의 절규와 세종의 인자한 웃음소리가 경복궁의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 끝 -
2026년 1월 4일 스페인 알리칸테에서
남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