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춤을 춘다. 2

by 남킹

부장이 오기 전, 나는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바닥을 밀대로 닦았다. 휴지통을 비우고 새로운 비닐도 씌웠다. 그리고 탕비실에 무질서하게 뒹굴고 있는 컵을 세제로 깨끗이 씻었다. 전임자에게서 처음 교육받은 것이고 후임자에게 물려 줄 중요한 일이다. 나는 환기를 위하여 창문을 활짝 열고, 잠깐 항구의 배들과 그 위를 까옥거리며 날아가는 갈매기들을 쳐다봤다. 단조로운 울음이 마치 신세계를 연주하는 목관악기처럼 들렸다. 언제나 그들이 부러웠다. 나와 관계한 거추장스러운 사슬을 끊고, 끝없는 푸른 대양으로 훌훌 날아가고 싶었다.


훅하고 바다 내음을 담은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기름 냄새도 묻었다. 열어젖힌 창에 골이 난듯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도, 저음으로 창문턱을 슬슬 넘어오고 있었다.


현수는 바다를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토요일이 되면, 산 중턱이나 언덕에 있는 모텔들만 찾아다녔다. 이 도시는 평지보다 산이 훨씬 많다. 해안선을 따라 크고 작은 산들이 제멋대로 솟아있고, 그 산들의 허리춤까지는 빼곡하게 집이나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밤에 배를 타고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 선원들은, 맨해튼보다 더 화려한 야경에 원더풀을 연발하곤 하였다. 물론, 날이 밝으면, 곧 실망으로 바뀌지만 말이다.


우리는 산동네를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고불고불한 산복도로를 돌아다니다 마음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잽싸게 내려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식당이 있으면 밥을 시켜 먹고, 다행히 모텔이나 여관이 보이면 그곳에서 잠을 잤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음 버스를 또 기다렸다. 그러다 우리는 한마을에 고착하였다. 이곳은 마치 높은 성벽의 탑처럼 하늘에 맞닿아 있어, 어디에 위치하든 멀리 항구의 잿빛 바다와 배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마을 한가운데, 십자 도로 옆에 자리 잡은 낡은 모텔은, 어느 방에서나 푸른 수평선이 창에 걸쳐있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던 날 밤, 남자는 나를 모텔의 옥상으로 이끌었다. 드물게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철로 된 옥상 문을 통과한 우리는, 곧 눈 앞에 펼쳐진 풍부한 야경 속에서 다양한 자세로 섹스를 즐겼다. 남자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도 이곳이 좋아졌다.


과장이 어느새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였다. 그는 자주색 골이 파인 넥타이를 매고 있다. 처음 보는 거였다. 양복도 밝은 쥐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언제나 검거나 짙은 색의 옷과 넥타이만 하고 다녔다. 마치 가톨릭 사제가 입는 검은 수단처럼.


나는 공용 서랍에 수북한 동전 중 한 개를 꺼내 복도로 갔다. 그는 자판기 커피광이다. 그가 퇴근할 때쯤에는, 그의 책상 위에 버려진 종이컵이 수북하였다. 커피 자판기는 내가 관리한다. 내가 두 번째로 교육받은 일이다. 한 달에 한 번, 복도 양 끝에 놓인 자판기에서 동전을 수거하고 커피와 설탕, 프리마를 채우고 소독을 하였다. 수거한 동전은 한동안 서랍에 머물다 다시 자판기로 들어갔다. 즉 이곳 동전들은 서랍과 자판기만 들락날락할 뿐이다. 마치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평생 일과 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집안의 두 남자를 위해 빨래하고 청소하고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직장의 두 남자를 위해 똑같이 청소하고 커피를 제공한다. 여러 가지 직종을 거쳐 봤지만, 기본적인 나의 의무는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서랍 속의 동전처럼 낯선 누군가가 나를 집어 가 주기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간 충의 알일 수도 있다. 양의 항문에서 나와 세상의 혼란스러운 풀숲에서 뒹굴며 기약 없는 숙주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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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나는 두 학생의 집에 방문하여 영어를 가르친다. 그들은 형제로 각각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 위로 누나가 한 명 있는데,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카락이 다 빠진 상태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시력도 안 좋은지 TV를 바로 코앞에 바짝 갖다 붙이고는 심각하게 들여다보곤 하였다. 어쩌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지만, 병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 날이 갈수록 안타까웠다. 아버지는 선장인 듯, 큰 가족사진 속에, 멋진 제복을 차려입고 어색한 미소로 앉아 있었다. 그를 집에서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수개월이나 수년간 외국으로 다니는, 그런 큰 배를 타는 것 같았다.


그들의 엄마는 소위 복부인이다. 아주 잘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38층의 대궐만 한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 대리석 입구가 쫙 펼쳐졌다. 부엌, 안방, 거실, 베란다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신기한 물건이 가득하고, 또한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유추할 만한 물건들도 보였는데, 거실에 거대한 바다거북과 붉은 새우 박제가 걸려 있고, 현관 입구에는 병 속에 갇힌 정교하기 짝이 없는 범선도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우리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대도시지만 작은 규모의 모서리 동네에서, 삼 형제가 모두 우등생으로 명문대학을 진학했으니, 자식 둔 부모치고 흘러가는 얘기라도 한 번쯤은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학생의 엄마는 나와의 첫 대면 자리에서 긴 한숨으로 일관했는데, 자신이 이룬 놀라운 부에 대한 대단한 만족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학업을 중단한 딸과 성적이 밑바닥을 기는 아들들에 대한, 도저히 어떤 방법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욕심의 한계에 절망한 듯이 보였다. 우리 사회는 돈과 학벌의 잣대 위에 세워지고, 신분이나 계급으로 정착되었으니, 그녀의 눈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혹은 채울 가능성이 희박한 학벌이 한스럽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아들의 성적만 올려 달라고 내게 부탁하였다. 아직 검증되지도 않은 나에게, 단지 학벌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맹목적으로 나를 신뢰하고, 자신의 기대치를 한 단계 높이려고 발버둥 치는 듯이 보였다. 그녀의 아들들은 사실, 숱한 과외선생과 학원들을 거친 상태였고, 또 지금도 그러하였다. 나를 포함하여 주요 과목 당 선생들이 따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족집게 선생으로 유명한 이들도 있고, 심지어 학교 선생도 끼어 있었다. 선생들은 그들이 터득한 놀라운 비법으로 무장한 채, 정해진 시간에 이 가여운 학생들에게 찾아와 무차별 폭격을 퍼붓고 돌아가지만,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는 중하위권을 그나마 유지할 뿐이었다.


내가 본 바로는, 이 학생들은 놀라운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뇌는 선생의 설명을 듣는 동안, 기본적으로 반응해야 할 동작을 적절한 시기에 적당하게 표현하는 데 약간 할애할 뿐, 그 외 나머지 대부분은, 학교 수업에서나 과외 수업에서나 할 것 없이, 상상 속의 세상을 노닐고 있었다. 우리 세상에서는 이게 가능한 일이었다. 책상에 앉아, 눈만 선생을 향하고 있으면 무사통과가 되니깐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설명도 잘못했다. 도대체 누구를 가르쳐 본 경험도 전혀 없었다. 학생들과의 첫 대면은, 긴장 속에 뻣뻣한 선생과 너무도 익숙하여 무심하기까지 한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달았다. 그들이 지금까지 거쳐온 선생들과 확연히 다른 나의 존재를….


그래서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어에 관해서 어느 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시켰다. 영어 교과서를 펼쳐 놓고는, 읽고 해석하라고 했다. 모르는 단어는 사전에서 찾아보라고 했다. 놀랍도록 엉성한 그들의 발음만큼이나 해석은 엉망이었다. 그렇다고 잘못된 해석을 그냥 무상으로 고쳐 주지도 않았다. 사전을 뒤져보고 다시 생각해보라고만 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제껏 익숙하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에 불편해했고,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머리를 굴리느라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진도는 느리게만 나갔다. 학생들은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그들 스스로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하여 모든 뇌세포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실에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시간은 아마 무척 더디게 흘러갔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짧은 몇 마디의 말로 2시간을 수월하게 채울 수 있었다. 내가 뱉은 말은, 아냐 다시 생각해봐, 틀려서 혹은 나아졌어,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이상한 선생의 출현은,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온 그들의 수업방식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을 것이고, 당황한 그들은, 그들의 엄마에게 선생에 대한 각종 험담을 늘어놓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게 되지만, 턱없이 비싼 유명 강사를 붙여도 실패한 전례가 있는지라, 어쩌면 몇 달 정도는 지켜보기로 하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학생들의 영어 성적은 놀라보게 향상되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학생 엄마의 나에 대한 신뢰는 굳어지고, 수업 시간도 늘고 수업료도 대폭 올랐다. 어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돈을 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자가 한 달 동안 열심히 회사에 다녀서 번 돈 만큼을,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각각 3시간의 과외로 벌었다. 세상은 돈과 학벌이 지배하고, 나는 그 틈에서 수혜의 꿀을 빨아 먹고 있었다. 나는 만족하게 되고 안주하게 되었으며 이기려고 달려드는 세상에서 비켜 나와 천천히 걷고, 먹고 싶은 것만 먹고, 그녀를 만나 섹스하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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