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새벽반을 끝낸 학원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을 스칠 때마다, 미세한 바람결이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간간이 주부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직장인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그들의 목적지로 달려 나간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녹녹지 않다. 어린 학생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여전히 경쟁해 왔고 앞으로도 기약 없는 경쟁이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풍요의 세대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일은, 우리가 덧붙인 욕심만큼 수고스럽다.
낙향 후, 처음 몇 주 동안은 조급함과 상실감으로, 경쟁에 앞서기 위하여 무거운 가방을 메고, 또 그에 덧붙여진 무게의 중압감을 달고, 수 없이 다녔던 이 도시의 거리가 낯설기만 하였다. 늘 걷던 길의 끝 모서리, 저 언덕 너머 질리도록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과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늘 포화상태를 이루던 바다를 언제나 좋아하고 그리워했건만, 갈 곳이 없었던 나에게는 무념의 영상에 무채색으로 덧칠한 것으로 만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이 거리 저 골목 발 닿는 데로 돌아다녔다. 소금기 먹은 겨울바람의 어스름 속에 떨면서, 불면에 시달린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불안에 흔들리며, 온몸은 쇠사슬을 엮은 듯 질질 끌면서 다니곤 했다. 그러다 바로 이곳. 영어학원 간판 앞에 무심코 멈춰 섰다. 긴 겨울이 끝나고 초봄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가로수의 잎은 아직 나지 않았지만, 바람은 따사로움을 안고 귓전을 맴돌았고, 학원 입구를 들락거리는 학생들 사이로 불어오는 열정이 생기 있게 파닥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멈칫하다가 크게 한숨을 쉬고 조금씩, 마치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기처럼, 발을 조심조심 떼면서 학원으로 들어갔다. 넓고 밝은 홀이었다. 바닥은 고르지 못한 격자 모양의 대리석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같은 모습이 천장 거울에 반사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텁석부리 얼굴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넋이 다 빠진 창백한 모습이었다. 맞은편에 하늘거리는 멋진 제복을 입은 여자가 나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내가 가까이 올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 앞에 마주 서게 되자 내게 물었다.
“영어 배우시려고요?” 건조되어 오그라든 장미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당당한 그녀의 미소에서 왠지 모를 자부심에 대한 흔적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나는 원어민 선생 앞에서 영어 테스트를 받았다. 고급 1단계를 배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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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지하철은 항상 어느 날보다 더 붐빈다. 시내 쪽으로 다가갈수록 수많은 사람이 내리고, 그보다 더욱 많은 사람이 늘 올라탄다. 사람들은 콩 시루 마냥 이미 빼곡히 찬 틈새를 용케 비집고 잘도 들어왔다. 전철 문이 열다 닫기를 반복하다 불안하게 닫혔다. 지하철은 그의 육중한 몸이 힘겨운 듯, 저음의 신음을 내뱉으며 서서히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였다. 문가 쪽에 파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파들거리던 나는, 어렵게 핸드백을 고쳐 들고, 버틸 수 있는 자세를 잡은 채,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무표정한 남자와 여자가 저마다의 생각 속에 빠져 있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들은 전철이 요동칠 때마다, 쇳소리에 맞추어, 마치 한 몸처럼 순간적으로 흔들어 재꼈다. 덩달아 그들의 얼굴은, 몽환의 저편에서 막 숨 가쁘게 달려온 듯, 씰룩거리거나 이죽거리며, 다양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마치 고비사막의 짧은 우기에, 삽시간에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나는 수많은 야생화처럼….
인고의 세월을 땅속에서 숨죽여 지내다가, 살아가는 모든 생물의 유일한 목적인 자손 번창을 위하여, 재빨리 물을 빨아들이고 몸을 부풀려서 척박한 땅을 뚫고, 햇빛을 향하여 이파리를 내고, 곤충을 유혹할 꽃을 조상이 물려준 각자의 표정으로 분출한 그들은, 씨앗을 흩날리기 무섭게, 이내 또 갈라진 흙 속에 파묻혀, 다음 우기를 기약하며 꿈속으로 사라진다.
현수에게서 야생화 향기를 맡을 때가 있다. 그는 일정하고 무표정하며 관습적이고 사교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빈둥거리면서도 품의가 느껴지고, 태평하면서도 어느 순간 용의주도함을 풍겼다. 나는 그가 왜 좋은지를 모르겠고, 그도 나를 왜 좋아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물론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니 좋아하는지 안 하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우리는 지겹도록 같은 요일에, 같은 모텔의 같은 호실에서 같이 있다가 그냥 헤어지고, 다시 또 만나 같은 곳을 또 갔다. 다음을 위한 약속은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면, 그는 항상 육교 건너편 길가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불안하다. 마치 사막의 죽은 씨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그에게서, 나는 불길한 자태의 꽃내음을 순간순간 맡을 때가 있다. 그는 나와 같이 있지만 있지 않고, 나와 섹스하지만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는 학원 동료들과 당구장, 술집, 나이트클럽 등등을 빠짐없이 훑으며 쏘다니지만, 마치 딴 세상 사람처럼 이질적일 때가 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흘러가는 소문으로 주워듣고, 그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게 될 때, 남자의 모습은,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도서관에서 영어 소설을 읽거나 혹은 시청각실에서 방송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모습은, 나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바뀐 게 거의 없다. 단지 누군가 그를 이끌면 그는 따라갈 뿐이었다. 그곳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그는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냥 만나고 섹스하고 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그냥 뻐꾸기 둥지 위에 우연히 툭 떨어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