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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Oct 20. 2024

즐거운 제나

단편소설

                                                                                                                                                                        

에픽테토스가 말했다. 마치 항해 도중에 배가 어느 항구에 정박하여 물을 구하러 배에서 잠시 내렸을 때, 해변을 걷다가 조개나 고둥을 줍는 것과 같다. 그것을 줍다 보면 점점 재미가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배에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선장이 부르면 줍던 것을 모두 던져 버리고 달려갈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에는 많은 것들이 주어지지만 결국 저승사자가 부르면 모든 것을 남겨두고 어둠 속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제나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뜻밖이었다. 잠시 되짚어보니 처음이었다. 늘 내가 먼저 묻고 그녀가 답했다. 어떤 날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 듯, 그 답마저 없었다. 무자비하게 기울어진 관계. 물론 내게도 책임이 있을 터였다. 따지고 보면 일방적인 나의 애정행각인 셈이니까. 그녀는 고결한 야만인처럼 혹은 제스처 게임을 하는 가벼움으로 나를 착취하였다. 하지만 방탕하거나 불경하거나 사악하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익살과 말장난으로, 그녀가 내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나는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옅은 햇살이 창을 가로질러 내 손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진. 벗은 몸. 한 장, 두 장, 석 장. 나는 음침한 눈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입가에는 다정한 기미. 제모한 사타구니. 핑크빛 젖꼭지. 팔에 새겨진 매화 문신. 몸에 대한 확고부동한 자신감. 마치 그녀의 피부에 흡입이라도 된 것 같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대리석 홀의 정적 속에, 값진 반투명 망토를 펄럭이며 사타구니를 벌렸고, 끽연실의 코발트 색 가죽 의자에, 창을 등지고 순진무구한 자태로 드러누웠다. 간결하고 발랄한 탐미주의. 그녀는 내게 호사다.     

내일 마인츠로 출장 갑니다. 거기서 하룻밤 잘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마지막 사진. 그녀는, 회전 걸상이 딸린 기다란 포마이카 식탁에 기대어, 한 손으로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높이 쳐든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Supertramp 의 Breakfast in America 음반 표지 오마주. 다른 게 있다면, 그녀는 벗었고 무척 날씬하다는 것. 그리고 하얀 종이로 만든 주방장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전면에 내 세운다. 그리고 내게 무엇인가를 묘사한다.     

당신이 아주 현명하다면, 당신과 잠자리에 들기 위해 내가 옷을 벗고 싶게 만드세요.     

그럼, 우리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나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나고 싶어요. 우리 첫 만남이잖아요.     

*************     

연골이 박힌 햄버거 패티를 입에 문 채 집을 나섰다. 비는 그쳤다. 맞은편 집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낡은 외투를 걸친 채, 푸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퍼티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미소를 짓는다. 숱이 적은 반백의 모습. 그녀는 늘 늙어 보였다. 나 보다 겨우 다섯 살 많은데 마치 어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좋은 아침, 소피아.     

당신도 좋은 아침, 토마스.     

그녀는 직업이 없다. 자식도 없다. 일찍 죽은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일 년에 두 번, 휴가철을 빼고는 항상 집에 머물렀다.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꾸미기다. 화단 꾸미기, 집 꾸미기, 차 꾸미기. 나치 시절에 지은, 그녀의 단층집이 마치 엊그제 시공한 것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온갖 종류의 꽃들이 계절에 따라 피고 졌다. 그녀의 차고에는, 좀처럼 떠나지 않는, 노란 구형 폭스바겐이 머물렀다. 앙증맞고 귀여운 그 차는, 모처럼 햇살이 비추는 오후가 되면, 부지런한 주인의 목욕 세례를 받고 반짝반짝 즐거워했다.      

소피아의 또 다른 꾸미기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내가, 모처럼 늦잠에 빠져 있는 주말이면, 밍밍한 샌드위치나 에그 크림, 롤빵에 요란한 장식을 붙여 문 앞에 두곤 했다. 혹은 석양이 차분히 동네 어귀를 붉게 물들 때쯤이면, 한 번씩 자신의 외로운 저녁에 나를 초대하곤 했다. 그녀의 집 내부는 그녀 자체였다. 모든 게 질서 정연하고 반듯하고 깔끔했다. 내가 이 동네로 이사하고, 그녀가 이주쯤 뒤 나를 초청했을 때, 나는 소피아의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본능적으로 신발을 벗어 금전등록기처럼 생긴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 장면이 그녀를 웃게 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집의 관습을? 누가 일러준 거예요?     

아뇨. 그냥 집이 너무 깔끔하길래….     

맞아요. 결벽증 때문에…. 저도 늘 힘들어요. 이웃들도 힘들어하죠. 하지만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것만큼은 고쳐지지 않네요.     

그날, 그녀는 남편이 아끼던 시가와 고급 와인을 꺼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리고 추레한 차림으로 온 사실에 부끄러웠다. 재떨이가 꽉 차고 와인 병이 비자, 그녀는 뒤돌아서서, 깡마른 어깨에 걸친 브래지어 끈을 내렸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말을 걸었다.     

그냥, 밤이 너무 길어서 그래요. 미안해요. 무슨 뜻인지 알아주기를 바라요.     

나는 카펫에 흩어진 담뱃재를 훔치지 않아도 되겠다고 느꼈다. 일순간, 오랜 연인을 마주한 듯, 회연의 아픔이 가슴을 휘 젖었다. 나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두 손으로, 바싹 마른 젖꼭지를 눌렀다. 한 줌 밖에 안되는 욕망이었지만, 외로운 그녀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     

전철에 타자마자 제나의 새 메시지를 찾았다. <네>라고만 적혀 있다.      

이건 뭐지? 어쩌면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인가?     

나는 제나에게 보낼 쓸만한 얘깃거리를 잠시 생각하다 관두었다. 틱톡에서 본, 시시껄렁한 세상 이야기뿐이었다.     

염병할! 얼간이 같이! 이럴 때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우스갯소리조차 없다니!     

나는 혀로 패티 속 뼛조각을 골라내며 자신에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한물간 바나나의 껍질을 벗겨 하얀 속살을 한입 베어 물었다. 맞은 편에 앉은 여인이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마치 백화점 진상 고객처럼, 깐깐함이 얼굴 전체에 박혀있다. 나는 그녀에게 보란 듯이, 남은 바나나를 입 속에 꾸역꾸역 쑤셔 넣고는, 껍질을 벽에 붙은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한 번씩 이렇게 삐딱하게 군다. 흥분이 다시 몰려왔다.      

그녀를 마침내 만난다!     

나는 이 기분을 간직하기 위한 욕망에 사로잡혀 배낭에서 공책을 꺼냈다. 내가 독일로 오던 날, 다시 한번 작가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공항 면세점에서 산 열권의 공책 중 마지막이다. 공책을 펼칠 때마다, 괘선이 내가 좋아하는 넓은 칸으로 그어져 있음이, 만족으로 다가온다. 절반 이상 채워진 내용을 나는 습관적으로 쓱 훑으며 지나간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이 생긴다. 나의 타임머신. 나는 현재로 다가갈수록 엄지로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며 찬찬히 살펴본다. 내 생각과 관찰 내용 그리고 낙서 쪼가리.      

잠시 후 나는 상의 호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공책의 빈칸에 꽂아둔, 책갈피 대용으로 사용하는, 오래된 연극 초대권 동강이를 집어내고 공책을 손바닥으로 눌러 펼친 다음, 날짜를 기록하고 첫 문장을 썼다.     

제나와 첫 만남. 마인츠 시내. 시간, 장소는 미정.     

머릿속이 그녀의 고혹적인 피부로 채워진다.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솟구친다. 손쓸 수 없을 만큼 강한 끌림이 내 몸을 조급함으로 이끈다. 어떻게 누그러뜨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기다려야 해. 내일 밤까지. 그래, 하루하고 한나절 정도만 참으면 되는 거지. 낙원으로 입장. 순진무구한 욕망의 덩어리로 회귀. 삶의 과정에서 비롯하는 어쩔 수 없는 강제, 분쟁 그리고 주변인의 재판, 중상모략, 악의와 시기에서 잠시 벗어남.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노트에 몇 줄을 남겼다. 모든 인간에게 저마다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선인들이 남긴, 섹스에 대한 모든 장면과 그 행위를 기대하는 상상력은, 내게 삶 그 자체의 혼란과 절망을 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늘 나를 탐색한다.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을 주된 본보기로 삼을 뿐이다. 나는 존재를 묘사하지 않는다. 내가 묘사하는 것은 과정이다. 나는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냥 무지할 따름이며 단지 끊임없이 탐구만 할 뿐이다.     

*************     

전철에서 내린 나는, 프레스코 기법을 흉내 낸, 성좌와 궁수가 그려진 벽화가 내려다보는 지하 통로를 지나 지상으로 나왔다. 유토피아적 상상을 잠시 내려놓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낮은 하늘. 한가롭기 그지없는 거리. 세월의 풍파에 거무스름하게 퇴색되어 생동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된, 풀죽은 건물들. 늘 느끼지만, 출, 퇴근이 번거롭기 짝이 없다. 산속에 있는 나의 회사는 조촐한 마을의 끝자락에 있다. 미용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업시설이 하나씩 만 있다. 슈퍼마켓, 우체국, 호텔, 교회, 학교, 은행, 유치원, 빵집, 이탈리안 레스토랑, 케밥 집, 축구장, 창고, 물류센터 등등. 여기서 물류센터가 나의 직장이다.      

이곳 사람들은 당최 경쟁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꽃, 말이다. 어딜 가던지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슈퍼마켓, 우체국, 은행, 빵집, 식당까지…. 늘 사람이 멍하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사업에 사자도 모르는 내가 봐도, 업종과 관계없이 그냥 오픈만 하면 무조건 돈을 벌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용실이, 마을의 중앙, 교회 앞 광장을 중심으로 정반대로 뻗은 두 갈래의 돌길 입구에 각각 하나씩 있다는 게 재밌기는 하다. 하나는 크고 나머지는 작다. 큰 쪽은 당연히 미용사가 많고 작은 쪽은 단 한 명이다. 많은 쪽 미용사는 대부분 남자고 작은 쪽은 여자다. 큰 미용실은 이름도 길다. HAARWERKSTATT. 외국인인 내가 외우기 벅차다. 반면, 작은 미용실은 이름이 친근하다. HERA Lee. 그래, 그녀는 한국계 미용사다. 그녀가 이런 촌구석에 미용실을 오픈 한 이유는 단 하나다. 수십 명의 한국인이 근무하는 우리 회사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나는 HAARWERKSTATT 미용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왠지 그곳에서 머리를 깎다가 HERA Lee 주인장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창피할 것 같았다.      

Lee에 대한 소문은 내가 입사할 때부터 이미 회사 안팎으로 퍼져 있었다. 그 소문은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그녀의 이름은 종종 뒷담화의 주제가 되었다. 회사는 워킹 홀리데이로 단기 근무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고용했는데, 그들과 어울리는 Lee를 시내에서 자주 본다는 이야기였다. 독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중년의 이혼녀가 젊은 남자들을 유혹해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는 식의 험담이었다. 이혼녀라는 타이틀은 마치 그녀의 모든 과거와 미래를 덮어씌우는 낙인처럼 작용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다르게 보았다. 그냥 외롭고 상처받은 한 사람의 몸부림을 느꼈다. 다가오는 황혼 속에서 사랑이든, 혹은 그보다 덜 고귀한 감정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붙잡으려는 의지로 비쳤다. 나는 그녀와 교류하며 생의 집착을 보았다. 그리고 그 집착이 얼마나 아름답고 동시에 슬픈지 깨달았다.     

*************     

제나가 나를 찾은 날에 비가 내렸다. 이곳은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드물어서, 나는 그러려니 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줄곧 응시하며 걸었다. 빗방울이 그저 굵어지지 않기 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마중을 나갔다. 제나와 첫 번째 만남. 그녀는 대뜸 서류 가방을 내게 맡겼다. 그리고 조용하고 소박한 미소를 잠시 짓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내게 키스하였다. 나는 그녀를 안았다. 내가 추측하였던 것만큼이었다. 그녀는 손을 제외한 모든 곳에 물풍선을 집어넣은 듯한 탱글탱글한 촉감이, 마치 러브돌이라고 착각이 들 만큼 내밀하게 끌어당겼다. 몸이 즉각 반응하였다. 나는 엉덩이를 조금 뺐다. 그녀의 이가 네게 딱하며 부딪쳤는데, 그러자 그녀는 포옹을 풀고 배시시 웃으며, 백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이빨을 비추었다. 지나치게 하얀 이.     

일은 어땠어?     

나는 그저, 뭘 하나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형식적인 질문을 하였다. 물론 그녀도 나의 질문이 주는 의미에 무신경하였으므로, 그저 형식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응, 괜찮았어. 뭐, 항상 그렇지만. 너는 어때?     

나? 나야 좋지. 나도 뭐 늘 그렇지.     

비가 안개처럼 내렸다. 하늘의 절반은 이미 구름이 사라졌다.      

나는 오늘 이미 이 도시에서 가장 빛나고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식당의 주방을 샅샅이 뒤지고 왔으니까.     

그래, 뭐라도 건진 거야?     

주방은 무척 깨끗했어. 내 손수건보다 하얗더구먼. 그런데 한가지가 우리 모두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지.     

뭔가 나왔구나?     

응, 쥐가 나왔어.     

와! 그건 사건인데.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옥상에 있는 물탱크에서 나왔다는 거야.     

맙소사!     

그래, 그거야! 어머나! 그 쥐가 언제부터 물탱크에 빠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대형 사고인 것만은 확실하지. 만약 SNS에 그 장면이 실렸다면, 그 식당은 문을 닫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틀림없이 줄소송이 이어지겠지. 왜냐하면 그 식당의 단골 중에는 꽤 힘 있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런데 어떻게 찾은 거야? 원래 물탱크도 조사하고 그러는 거야?     

아니, 전혀. 지금까지 한 번도 물탱크를 조사한 적은 없었어.     

그런데 왜 한 거야?     

순전히 넷플릭스 때문이야.     

넷플릭스?     

응, 전날 호텔에서 다큐멘터리를 봤거든. 그냥 보고 싶어 본 것도 아니고, 나와 같이 있던 녀석이 다큐멘터리 광이었거든.     

무슨 내용인데?     

제목도 잘 기억이 안 나. 뭐, 대충 내용이 이런 거야. 조현병을 앓고 있는 한 여대생이 미국 여행하다가 어떤 호텔에서 실종이 되었어. 며칠 뒤, 물탱크에서 그녀는 벗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경찰이 그녀의 CCTV 일부를 공개했어. 그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지. 소름 끼치기도 하고.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에 말을 하고 거부하고 버튼을 누르는 장난을 치기고 하고 얼굴을 문밖으로 내밀기도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에는 오직 그녀뿐이었어. 아무도 없지. 오직 그녀만 보이는 누군가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더욱 놀라운 점이 뭔지 알아?     

뭔데? 나는 마치 비밀 첩보원처럼 속삭였다.     

그 호텔이 이상해. 그곳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지난 10년 동안 죽어 나갔지. 이유는 다양해. 우선 그 호텔의 위치야. 호텔 주변은 그야말로 노숙자의 천국이더구먼. 그러니 그 호텔에 투숙하는 이들은 정상은 아니겠지. 아니면 그 호텔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투숙하던가. 왜냐하면 호텔 홈페이지 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좋거든. 마치 중세시대 귀족의 성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야.      

그럼 너는 그 식당에서 전날 본 다큐멘터리에 이끌려 물탱크를 보게 된 거구먼?     

그렇지. 그게 문제야. 내가 물탱크의 뚜껑을 열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완벽했거든. 식당 주인과 주방장은 대단한 자부심으로, 내가 하는 모든 검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응했거든. 그러므로 그 뚜껑을 연 게, 어찌 보면 우리 모두의 운명을 두려움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인지로 모르겠어.      

그럼 너는 너의 행동을 후회하는 거야?     

지금은 후회해.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오싹한 기분을 느꼈지.      

그래서 사후 처리는 어떻게 한 거야?     

나는 돈을 받았어. 이건 비밀이야. 절대로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되는 거야. 이 비밀은 나와 너, 그 식당 주인과 주방장. 이렇게 4명만 알고 있는 거야.      

그거, 그러니까. 내가 알아도 되는 거야? 이 사실. 내가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너는 가진 거야?     

뭐, 사실 그런 확신은 없어.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잖아. 단지, 나는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입이 간지러울 뿐이야. 그리고 그 순간, 너를 만난 것뿐이고. 그러니 제발 부탁이야. 오늘 나는 너에게 기분 좋은 선물을 안겨줄 거야. 왜냐하면 그들이 쥐여 준 돈은 나의 한 해 봉급보다 많아. 바로 이런 게 행운이라는 거지. 왜냐하면 누구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는 못할 테니까. 설령 하더라도 누가 알겠어. 이미 쥐는 끄집어냈고 물통은 깨끗이 비웠으니까. 단지 내가 찍은 사진이 다였지. 그리고 물론 나는 그 사진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깨끗이 지웠지. 두툼한 돈 봉투를 지갑에 넣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양심에 찔리거나 그러지는 않아?     

당연히 양심에 찔리지.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불쌍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그 식당을 찾지는 않거든. 그곳 단골손님은, 무척 많은 돈을 벌거나 대단한 권력을 간직하거나 얼굴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 그들에게는 좀 위해가 되는 뭔가를 해도 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들에게는 좀 가혹해도 된다고 느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알겠어. 그런데 그 여자는 누가 죽인 거야?     

누구? 그 다큐멘터리 여자?     

응.     

내야, 모르지. 결론이 명확하게 나지 않았거든. 그냥 음모만 무성해. 하지만 그들은 자살로 보고 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 나는 아냐. 나는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고 봐. 왜냐하면 이상하고 만만한 여자를 보면 남자들은 우선 겁탈부터 하려고 들거든.     

그 남자들에 나도 포함되는 거야?     

뭐, 글쎄, 내가 보기에 너는 아닌 것 같아.     

왜 나는 아냐?     

너는 내게 변태적인 영상을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하지만 나의 내면에도 변태의 자격은 갖추고 있어. 단지 그게 끔찍하다고 느낄 뿐이지만.      

그러니까 너는 아니라는 거지. 바보야!     

흐린 하늘이 맑았다, 다시 구름이 잔뜩 끼기를 반복했다. 우수수한 빗방울이 비스듬히 내리는 공간 사이로, 그녀와 나는 끝없이 걸었다. 종잡을 수 없는 도시의 바람이 발밑을 간지럽히고 우산 끝을 휘게 했다. 나는 그녀의 푸른 눈에 물방울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혀끝으로 그녀의 눈 가장자리를 훔쳤다. 그리고 다시 키스했다. 우리는 많은 차가 동서남북으로 느리게 지나가는 도로 옆 인도에 서서 꽤 오랫동안 서로의 혀를 홡았다.     

그럼, 너는 누가 범인이라고 추정하는 거야?     

범인은 웨이터야. 단언하건대.     

왜?      

최초의 발견자거든. 이전에 물탱크의 뚜껑을 열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 경찰도 관리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 그런데 그 녀석이 나중에 다시 연 거야.      

그건 좀 이상한데. 그가 범인이라면 자기가 죽인 여자를 굳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을까?      

그건 그렇지. 당연히 숨기겠지. 하지만 물탱크야. 물통에 시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맛있게 물을 마시겠지. 하지만 녀석은 아니지. 너 같으면 물통에 시신이 있는 물을 마실 수 있겠어?     

웨이터가 물을 안 먹을 수는 없는 거야?     

당연하지. 그 물탱크에서 모든 물이 나오니까. 녀석이 외부에서 물을 가져오지 않는 한. 설령 물을 가져왔다고 하더라고 그가 먹는 음식에는 당연히 그 물이 쓰일 수밖에 없는 거지. 즉, 녀석은 사람들이 물통을 뒤졌는데도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자 답답한 거지. 빨리 물통을 비우기를 바란 거야.     

와! 대단하다! 우리 제나!     

그녀와 나는 기분 좋게 무거운 하늘을 벗 삼아 도로를 건너고 강 옆을 벗어나 낭만과 사치가 흘러내리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익숙하게 메뉴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리스트를 꼼꼼히 읽고 나서, 내게 묻지도 않고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가장 비싼 것만 주문했어. 오늘은 행운이 깃든 날이니까.     

잠시 후, 포도주가 웨이터의 품에 아기처럼 누워서 왔다. 그는 조심스레 아기 얼굴을 제나에게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익숙하게 와인 뚜껑을 비틀어 땄다. 목에서 하얀 연기가 흐느적거리며 나타났다. 나는 그때, 어두운 물통에서 눈을 부릅뜬 채, 창백한 얼굴을 내미는 죽은 여자를 떠올렸다. 웨이터는, 제나의 엉덩이보다 더 볼록한 유리잔에 붉은 피를 짜냈다. 와인 잔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여자는 와인 한 모금을 머금고 양치하듯이 꿀럭꿀럭하더니 꿀떡 삼켰다. 그리고 잔을 다시 웨이터에게 내밀었다. 제나의 살짝 벌어진 입가가 붉게 빛났다. 웨이터는 좀 더 많은 와인을 그녀의 잔에 따랐다. 제나는 마시기 전, 나를 한번 힐끗 보면서 윙크하고 다시 한번 꼴깍 삼켰다. 나는 그 순간, 이 식당의 물탱크가 궁금했다.     

앙증맞은 접시에 트뤼프 튀김이 요란한 장식과 함께 나타났다. 나는 죄스럽게도 이 장식을 깨부수는 작업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 만남의 긴장을 벗어버리자 허기가 심하게 솟았다. 목구멍에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제나는 술을 과하게 마셨다. 그녀는 잔을 바닥에 놓을 때마다 입술에 묻은 와인을 매번 혀끝으로 쓸어 담았다. 그리고 오목한 표정으로 포커를 사용해 트뤼프 조각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창은 서서히 구름에서 벗어나 단조로움에 식상한 제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봐요! 마침내 비가 멈췄어요. 지겨운 비.     

나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맴돌았다. 나는, 나의 여인이 벗은 옷에서 나는 향수에 심취한 듯 가늘어지는 눈으로, 음탐한 상상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욕망의 절정은 바로 다음이었다. 푸아그라가 슬픔을 가득 안은 고통을 표현하며 식탁의 중앙을 차지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갈망을 묻힌 포크로 콕 찍어 톡 쑤셔 넣었다. 나는 푸아그라의 지나친 끌림에 대하여 가끔 고단한 실연을 느끼곤 한다. 그 이유는, 이 음식이 풍기는 끔찍한 단면 때문이었다.      

그래! 모든 것은 우리가 봄으로써 간직할 수밖에 없는 추함에 이르곤 한다. 그날, 내가 본 영상은 틀림없이 그러하였다. 썩은 냄새가 뿌려놓은, 낡고 거친 농장에서 눈물 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거위. 그의 목에 망설임 없이 깊이 박히는 작대기. 그 속을 파고드는 사료. 캑캑거리는 거위. 그 위에 겹치는 외계인. 나는 내가 상상하고 만들고 싶은 인간 사육 영화를 그려본다. 어쩌면 AI로 일 분이면, 내 노트북 동영상 폴더에 그럴싸한 외계인 영화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서 외계인이 나타난다. 혹은 땅에서. 혹은 바다에서. 아니면 우리 파충류 중 어느 날, 돌연변이로 인하여 심하게 똑똑한 종자가 나타난다. 아무튼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좋다. 그들은 지구를 정복하고 인간을 사육한다. 지나치게 좁은 공간에 수백의 인간이 더럽게 벌거벗은 채 서성거린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플라스틱 사료. 바닥에 똥이 가득하고, 여름 더위는 천장에 먼지 가득 붙어 있는 팬을 돌리기도 벅차다. 인간의 피부는 모두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고 벌레 유충이 살을 파고든다. 모든 게 완벽하다. 이보다 더 멋있는 환경 보호 영화가 있을까. 인간은 그들이 15세가 될 때를 마지막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긴 트럭이 나타나고 인간은 모두 갈고리가 채워진 채 실려 도살장으로 간다. 긴 행렬을 지키는 건, 변함없는 우리의 영원한 친구, 개. 그들은 인간이 쓰러지거나 이탈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물어 재낀다.      

마침내 도살장 입구. 맛있는 고기를 위해, 외계인은 끝이 뾰족한 망치를 인간의 정수리에 세게 내리쳐 단박에 죽인다. 그리고 거꾸로 매단 다음 피를 쭉 뽑는다. 다음 차례는, 음 그렇지. 목을 절단하고 사지를 절단하고 거위의 부풀어 오른 간을 절단한다.     

그녀는 웃음을 흘리며, 고상한 피아노 음악이 시작할 때쯤 나온, 이 음식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주저 없이 이빨 사이로 집어넣는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나의 외람된 사치와 도도한 상념이 마주치는 이 순간에 대한 느낌은, 그녀를 꼭 매달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목을 절단하고 사지를 절단하고 그녀의 부풀어 오른 간을 절단한다. 타일 바닥을 흥건히 수 놓은 고급 와인.     

웨이터가 다시 나타났다. 누가 봐도 이 녀석이 범인이다. 그는 탐욕에 절은 눈으로, 내 여자의 볼록한 가슴골을 훑어 재낀다. 그는 카비아를 우리 중간에 놓고, 와인 병을 조금 안쪽으로 당긴 뒤, 랍스터 비스크를 두고 간다. 나는 그의 빛나는 눈을 줄곧 지켜봤다. 제나가 물탱크의 문을 여는 순간,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 사타구니로 향하고 있다. 검은 카비아는 별처럼 빛났다. 랍스터는 형체도 없이 비스크 속으로 붉게 물들었다. 나는 무엇이라도 홀릴 수밖에 없는 이 순간에 대한 보답과 상대할 수밖에 없는 환상에 젖는다. 제나는 실크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그녀의 봉긋한 흰색 투명 유방을 타고 내리는 부드러운 숨결은, 메스를 꽂았을 때 주르르 흐르는 피의 자국이 선명하게 불타는 그 지점으로, 나의 시선이 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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