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구와 현수
미자는 콩나물 공장을 나서며 분노의 숨결을 내뿜었다. 새벽 1시, 밤의 고요함 속에서 그녀의 발걸음만이 울려 퍼졌다. 칠규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그녀는 그를 유혹하려 부단히 애썼으나, 칠규의 마음은 바위처럼 굳건했다. 그녀의 모든 유혹이 그에게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와도 같았다. 미자는 자신의 매력에 무감각한 그의 모습에 분노한 채, 이를 뽀득뽀득 갈며 차가운 공기 속에 걸음을 옮겼다.
“고자 같은 새끼! 줘도 못 먹는 새끼! 그러니 마누라가 야간도주를 할 수밖에는!”
미자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끓어올라 마침내 입 밖으로 쏟아진 것이다. 미자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고, 그녀의 눈빛에는 칠규를 향한 깊은 원망과 상처가 서려 있었다. 미자는 이제껏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미자는 자신의 유혹이 통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칠규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의 자존심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실 칠규가 미자의 유혹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은 한순간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미자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두세 달만 월세가 밀려도 무자비한 양아치들이 들이닥쳐 상가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그들의 보스였다. 미자와 얽히게 된다면 그 결말이 어떨지 칠규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미자의 유혹은 치명적이었으나, 그것에 빠지는 순간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대가가 무엇인지 칠규는 분명히 깨달을 정도로 현명했고 의지도 강했다.
미자는 다급했다. 남편 필섭이 언제 다시 자신을 찾을지 알 수 없었기에, 최대한 빨리 누군가의 씨를 받아 임신해야 했다. 미자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길을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녀는 뒤돌아서서 시선을 오뎅 공장으로 향했다. 형석과 엮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자의 마음은 한동안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형석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형석에 대해 꺼림칙함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상황의 절박함은 그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그날 밤 이후, 미자는 시 외곽의 한적한 러브모텔을 잡고 형석을 매일 밤 불러들였다.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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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미자의 아들 현구가 태어났다. 필섭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혔다. 그는 자신의 아홉 번째 아들을 품에 안고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손가락 개수, 발가락 개수까지 모두 살핀 그는, 어느 순간 딱 멈추어 섰다. 아들의 작은 발가락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구의 엄지발가락은 유난히 크고 특별한 모양이었다. 그는 이내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현구의 할아버지도 똑같은 모양의 엄지발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 필섭의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이 밀려왔다. 아들의 발가락에서 이어진 혈통의 끈을 느끼며, 그는 가슴 벅찬 행복을 만끽했다.
미자 또한 누구보다도 기쁨에 차올랐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걱정들이 얽혀 있었다. 혹시 딸이면 어쩌나, 남편 필섭의 얼굴과 너무 다른 아기가 태어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그녀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 모든 걱정은 현구를 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현구는 너무도 잘생긴 모습으로 태어났다. 작은 얼굴에 조화롭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그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의 맑은 눈동자와 고운 피부, 그리고 사랑스러운 미소는 미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미자는 현구를 바라보며 모든 불안을 잊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현구의 존재는 그녀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 적어도 같은 날 태어난 다른 아기를 십 년 만에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날, 저 멀리 6,000㎞나 떨어진 중동의 아부다비 종합병원에서 현수가 태어났다. 은정과 동규의 소중한 아들이었다.
은정은 어렵게 아들을 얻었다. 그녀의 분만 과정은 한없이 길고 고된 시간이었다. 밤은 깊어지고, 병실은 불빛으로 가득 찼다. 은정은 진통의 파도에 맞서 고통을 참았다. 동규의 손길과 위로의 말들이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의사의 결정으로 제왕 절개 수술이 진행되었다. 그 어렵고도 긴 여정 끝에, 현수는 세상에 태어나 눈을 감은 채, 은정을 향해 힘차게 울어 재꼈다.
현수가 세상에 첫발을 내딛자, 동규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너무나 기쁨에 차 있었다. 그의 거친 손이 부드러운 아기의 몸을 감싸며, 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따뜻해졌다. 그는 아들을 안고 눈을 감고,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 같았다. 밤새 진통의 시련과 기다림 끝에 태어난 현수는, 그들 가족에게 더 큰 행복과 축복을 선사했다.
동규와 은정은 중동 건설 현장에서 십 년을 함께 보냈다. 그 기간은 그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하루가 다르게 세워지는 높은 건물들과 그 현장의 활기는 그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서로를 지탱하던 그들은, 현수의 탄생과 함께 더욱 단단한 사랑으로 맺어지며, 힘든 타향살이에서 동반자로서의 가치를 굳건히 다졌다.
한편, 미자는 자신의 치부를 완벽하게 감추기 위하여, 어느 날 형석을 찾아가 거액의 돈을 내밀었다. 조건은 단 하나, 형석이 서울을 벗어나 저 멀리 지방 도시에서 살면서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지 않으면 되었다. 그 당시 파산 직전이었던 형석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은 없었다. 그는 황급히 오뎅 공장을 정리하고 소리소문없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로써 미자의 계획 1단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된 셈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그의 아들, 현구를 최고의 인재로 키워, 필섭이 이룩한 왕국을 고스란히 물려받거나 혹은 그것이 어렵다면, 철저하게 파괴하는 거였다. 미자에게 복수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녀가 뜻밖의 복병을 만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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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가 10살 때, 은정과 동규는 귀국했다. 동규의 건설사가 다른 건설사에 흡수 병합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건설사의 주인이 하필이면 필섭이었다. 그들은 은밀히 따지면 동서지간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 악연이었다.
제주도의 대형 백화점 건설 현장에 현장 소장으로서 뛰어든 동규는, 회사의 명판이 바뀌었더라도 그가 하던 일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자기 경험과 노하우를 발휘해 건설 현장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며, 새로운 도전에 늘 기쁨과 활력을 느끼곤 하였다.
사실, 예전의 건설사는 동규에게 가족 같은 팀이었다. 그곳은 직원들 사이의 유대가 강하고 서로를 아끼며 지내는 따뜻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필섭의 건설사는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곳은 엄격한 실적 중심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려는 압박 속에서 철야 작업이 빈번했고 원가 절감을 내세워 불량 자재를 수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동규는 이런 변화에 점점 지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손으로 건설하는 모든 건물은 그의 작품이자 자부심이었지만, 그가 속한 환경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빌딩이 점점 올라갈수록 그에게는 마음이 편할 틈이 없었다. 그는 더는 자기 작품에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고, 건설 중인 건물과 함께 쓰러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느낌은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 오랫동안 일을 같이했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동규는 회사에 여러 경로를 통해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그의 노력에는 차가운 냉대만이 돌아왔다. 회사는 변하지 않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점점 더 분노하며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졌다.
그는 결국 자신의 신념을 위해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사의 비리와 부정행위에 대한 증거를 하나씩 모으며 내부 고발자가 되기로 한 그는, 어느 날 언론사에 그 모든 것을 제공했다. 그의 행동은 마치 자기 몸을 걸고 한 혁명과 같았다. 회사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며, 그는 정의를 위한 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이 결정은 그에게 많은 위험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내면에서는 자기 행동이 옳다고 믿는 확고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회사와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고, 그의 용기와 결단력은 동료들에게 좀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제공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언론사의 최대 후원자 중 하나였던 필섭과 그의 건설사에 관한 비리 기사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규와 오랜 동료들은 이 일로 인해 하루아침에 대량 해고되고 말았다. 그는 회사의 냉혹한 결정 앞에서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 세월 함께한 동료들이던 만큼, 이별의 아픔과 분노는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동규는 특히 더 큰 절망 속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되돌아보았다. 그의 용기와 희생이 언론에 의해 무시당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쉴 새 없이 이 불의를 향해 싸워왔던 일 년이 그저 억울하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동료들과 마지막 작별의 술잔을 기울인 그날, 동규는 대리 기사가 운전한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밤의 어둠 속, 교차로에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트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생명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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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이 된 현구는 불행했다. 어린 나이부터 현구는 엄마의 기대와 강압적인 통제 속에서 자라났다. 미자는 현구를 엄격하게 키우며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하도록 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강요했지만, 그 강요는 현구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항상 최고의 성적을 내야만 했고, 어떤 자유와 놀이의 시간도 없이 공부에만 몰두해야 했다. 엄마의 통제는 현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는 그 상처를 숨기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미자의 바람대로 현구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엄마의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하며 매번 전교 1등을 차지하는 최고의 아들이었다. 미자는 매 순간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느끼며 현구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항상 아들의 빛나는 미래가 보였고, 현구는 자기 능력과 열정으로 인해 더 큰 세계를 열어가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구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그해, 모든 것은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과부가 된 은정과 그녀의 아들 현수가 미자가 사는 시장으로 올 때부터였다.
동규의 죽음 이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은정은 마침내 언니인 미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미자는 그런 그녀를 선뜻 받아들였다. 시장 한쪽 귀퉁이에 채소 장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골방을 마련해준 거였다. 미자가 은정에게 그렇게 선심을 베푼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곁에서 동생의 초라한 모습을 매일 지켜보며 얻게 되는 쾌감 혹은 승리감이었다. 성장기 시절 동생의 미모에 그렇게 심하게 질투하였지만 결국 자신이 월등히 나은 재력과 미모, 뛰어난 아들까지 두게 되었다는 우월감이었다. 하지만 미자의 이 선택은, 그녀가 평생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종의 시발점이었다.
그 암울한 출발은 어느 날 현구가 받은 성적표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미자는 현구의 성적표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1등이라고 생각하고 펼친 그곳에는 너무도 낯선 전교 2등이 찍혀 있었다. 그 순간, 미자가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도대체 누가 내 아들을 앞질렀던 거지?’
“현구야! 누구야? 누가 전교 1등을 한 거야?”
고개를 푹 숙인 현구는 그저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며 떨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냐니까? 응? 누구야?”
엄마의 고함에 현구는 떠듬떠듬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이 이번에 새로 전학 온….”
“새로 전학 온 누구? 누구냐니까?”
“강현수.”
“현수? 현수라고?”
“응, 엄마. 이모 아들 현수.”
“현수가 전교 1등을 했다고? 진짜로 현수가 1등을 했다는 거야?”
현구는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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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교실, 현수는 마치 빛나는 별처럼 등장했다. 그가 전학 오자마자, 전교 1등의 자리를 단숨에 차지하면서 그의 이름은 금세 학교 전역에 퍼져나갔다. 현수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얼굴로 친구들에게 다가갔고, 그의 따뜻한 말과 친절한 행동은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친구들의 마음을 녹였다. 그의 인기는 마치 봄꽃이 피어나듯 날로 치솟았다.
반면, 교실 한구석에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 공부에 몰두하는 현구가 있었다. 그는 늘 혼자였다. 현구의 눈은 책 속에만 머물렀고, 그의 주변은 마치 겨울의 냉기처럼 차가웠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교실에서도, 그는 홀로 고독한 섬처럼 존재했다. 두 학생의 모습은 서로 대조되며, 마치 따뜻한 봄날과 차가운 겨울날이 공존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현구에게 현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퍼즐이었다. 자신은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끊임없이 책상 앞에 앉아 밤낮으로 문제집을 풀고, 시험지를 분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현수는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현수는 마치 공부와는 담을 쌓은 듯 보였다. 그런데도 자신처럼 항상 맨 위에 성적표가 자리 잡은 것을 볼 때마다, 너무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졌다. 현구의 마음은 점점 더 쓰라렸다. 그의 노력과 헌신이 무색해지는 것만 같았다. 현구는 참을 수 없는 질투와 좌절감에 휩싸였다. 타고난 천재와 노력형 천재. 아니, 자신은 노력해야만 따라잡을 수 있는 범재였다. 이 불공평한 현실 앞에서, 현구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현수가 마치 빛을 가로막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자리 잡았고 그의 감정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점점 더 현수를 멀리하게 되었고, 그와의 모든 교류가 불편해졌다.
미자의 통제도 점점 더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자기 동생, 은정의 아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그녀를 히스테리컬한 여자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현구가 집에 돌아오면 그날 배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복습하고, 다음날 배울 내용을 미리 예습하도록 강요했다. 현구의 일상은 이제 그녀의 철저한 계획 속에 갇혀버렸다.
가련한 현구는 공부의 노예가 되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소년의 순수한 기쁨이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교과서와 문제집이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펜과 노트가 그의 유일한 도구가 되었다.
현구의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꿈꾸던 운동장도, 친구들과의 웃음도 이제는 사치였다. 그의 하루는 끝없는 학습의 연속이었고, 미자의 거센 요구는 끊임없이 그를 압박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그의 귀에 박혔고, 그의 마음속에서는 점점 더 깊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삶은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바람 한 점 없는 감옥 속에 갇힌 새처럼, 자유를 갈망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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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현구의 마음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현수를 이기고 전교 1등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결심이 그를 위태롭게 채찍질했다. 그의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그는 책상을 떠날 수 없었다.
반면, 현수는 마치 시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뛰놀거나,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험 준비에 대한 걱정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인 듯했다. 현구는 그런 현수를 보며 더욱 불안해졌다. 그의 펜은 쉬지 않고 종이 위를 달렸고,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공식과 단어들이 떠다녔다.
그러나 시험 전날 밤, 현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 오기 전까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존재했다. 전교 1등.
결국, 시험 당일 아침이 밝아왔다. 총 3일 동안 이어지는 기말시험. 교실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학생들은 하루에 두세 과목씩 치러지는 시험을 준비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과 기대가 교차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군사들 같았다.
첫날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은 피곤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교실에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여질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었다. 그날 밤, 현구는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속에서도 시험지를 펼쳐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둘째 날 아침, 학교에 도착한 학생들은 게시판 앞에 모여들었다. 자신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긴장된 눈빛으로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결과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기쁨과 실망이 교차하는 표정들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어떤 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었고, 또 다른 이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현구와 현수는 모두 만점으로 1등에 자리했다. 현수를 보며 친구들이 축하의 함성을 질렀다.
둘째 날의 시험도 마찬가지로 하루 두 과목씩 이어졌다. 학생들은 어제의 결과에 따라 더 열심히 혹은 더 조심스럽게 시험에 임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소용돌이쳤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얻는 것.
마지막 날 아침, 현구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교실 게시판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은 게시판에 붙여진 성적표를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현수는 1등, 이번에도 역시 만점. 하지만 그는 한 문제 틀려 2등이었다.
그 순간, 현구의 마음속에 억눌러왔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떨었다. 눈앞이 흐려지며, 세상은 다시금 잿빛으로 물들었다. 한 문제의 실수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다니,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구는 자신을 다스리려 노력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한순간의 실수가 그의 모든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띄는 것은 단 하나, '2등'이라는 차가운 현실뿐이었다.
절대로 2등으로 끝낼 수 없는 현구의 마음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혼란스러웠다. 오늘 마지막 시험에서 만점을 받더라도 현수가 다시 만점을 받으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불안과 초조가 그의 마음을 짓누르며, 절망의 늪 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기 위해 본능적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현수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에게 사정해야 한다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부탁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어머니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차가운 시선과 냉혹한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구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교실 한구석에서 현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처럼, 그는 현수에게 다가갔다.
"현수야."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만 나와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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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뒤편, 고요한 침묵 속에서 현구와 현수가 마주쳤다. 현구는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현수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현수야." 현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번 시험에서, 제발 두 문제만 틀려줄 수 없겠니? 진심으로 부탁할게."
현구의 얼굴에는 간절함과 절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입가에 맺힌 비굴한 미소는, 그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현수는 잠시 망설이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현수는 그 눈빛 속에서 현구의 무너진 자존심과 절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현수야, 제발…. 이번 한 번만 나를 도와줘. 어머니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게.“
그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떨렸고, 눈빛은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현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제발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줘. 어머니께 혼나지 않게 도와줘.“
현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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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의 채소 가게는 비록 작지만, 그 안에는 그녀의 정성과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깔끔하게 정돈된 진열대였다. 진열대에는 신선한 채소들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추, 시금치, 당근, 브로콜리, 그리고 콩나물까지, 다양한 채소들이 선명한 색깔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가게 한쪽 벽에는 작은 칠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날그날의 특가 상품과 추천 채소들이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손글씨는 은정의 성실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옆에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는데, 은정이 직접 키운 허브와 작은 꽃들이 가게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가게 중앙에는 손님들이 편하게 채소를 고를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제철 채소들이 주렁주렁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은정이 직접 만든 채소 레시피 카드가 놓여 있었다. 손님들은 채소를 고르며 자연스럽게 레시피를 가져가곤 했다.
계산대 뒤쪽에는 작은 선반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녀가 손수 만든 잼과 피클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유리병 속에 담긴 색색의 잼과 피클은 가게에 또 다른 매력을 더해주었다. 카운터 위에는 작은 종이컵과 물병이 놓여 있었는데,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언제든지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 둔 것이었다.
칠규는 어느 날, 은정이 차린 조그마한 채소 가게에 콩나물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일로 시작된 관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은정의 존재가 그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상냥하고 성실했으며, 다정다감한 마음씨로 가게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주었다. 칠규는 매일 아침 그녀의 가게에 콩나물을 납품하면서, 그녀의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의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그의 마음속에 작은 불꽃을 피어오르게 했다. 은정의 존재는 칠규에게 있어 마치 봄날의 꽃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칠규는 은정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가게에 간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향나무를 준비했다. 칠규는 나무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깎아내면서, 마치 자신의 감정을 조각하듯 그 간판에 마음을 담았다. 나무의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칼을 움직이며, 그는 '현수네 야채 가게'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 글씨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그의 진심과 애정이 깃든 작품이었다.
칠규는 귀엽고 멋있는 간판을 은정에게 건넸다. 뜻밖의 선물에 은정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마음은 메말라 버린 들판처럼 황량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칠규가 건넨 그 작은 간판은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에 따스한 봄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칠규의 선물은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라,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안겨주는 소중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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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시험에서 현수는 고맙게도 네 문제나 틀렸다. 그 덕분에 현구는 다시 전교 1등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순간, 현구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고, 그는 마치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현구는 현수를 분식집으로 데려가 떡볶이를 사주었다. 현구는 떡볶이를 한 입 베어 물며, 마음속 깊이 현수에게 감사했다.
”현수야, 내 부탁 들어주어서 고맙다.“
현구는 간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표정은, 앞으로도 줄곧 이렇게 일부러 오답을 적어 내기를 바란다는 뜻이 잔뜩 묻어 있었다. 현수는 현구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걱정하지 마, 현구야. 우린 사촌이잖아. 게다가 친구잖아.“
사실 현수에게 시험 성적은 그저 사소한 숫자에 불과했다. 그는 이미 인생의 가치를 깨달은 듯,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시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는 이미 내면의 즐거움을 찾은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현수의 어른스러움은 그가 세상의 기준을 넘어선 곳에서 더 큰 의미를 찾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현구는 현수의 도움으로 줄곧 전교 1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9월에 열리는 학생회장 선거였다.
그의 앞길에는 강력한 경쟁자가 버티고 있었다. 그 이름은 오세진. 오세진의 아버지는 시의원 출신으로, 그 동네에서 가장 큰 병원의 원장을 지내며 주유소와 버스회사까지 소유한, 그야말로 지역의 유지였다. 필섭이 시장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미약했다. 반면 오세진의 아버지는 지역 사회의 뿌리 깊은 인물로, 그의 존재 자체가 마치 나무의 굵은 뿌리처럼 단단했다.
오세진은 그의 아버지를 쏙 빼닮아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학우들 사이에서 오세진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는 단순히 인기가 많은 것을 넘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항상 자신감으로 빛났고, 말 한마디 한마디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학업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전교 10등 안에 드는 성적을 유지하며, 대단한 열정과 지식을 뽐냈다. 오세진의 한 마디는 곧 규칙이 되었고, 그의 행동은 모범이 되었다. 그는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그 학교의 작은 사회 속에서 하나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학생뿐만 아니라 교직원들도 이번 학생회장 선거는 볼 것도 없이 오세진의 압승을 예상하였다.
현구는 어머니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오세진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하는 상황에서, 현구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절감하고 있었다.
현구는 늘 책상에 앉아 공부에만 몰두하는 학생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고, 그 정적 속에서 그는 홀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학교에서의 인기는 바닥이었다.
학생회장 선거에 나선다는 것은 현구에게 있어 마치 거대한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패배할 운명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들의 지지나 응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앞길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는 것처럼 막막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했지만, 그런데도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현구는 고심 끝에 남자 부회장 후보로 현수를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세진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인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수 같은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현구는 현수에게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현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했다. 현수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현구의 결의와 진심을 보고 마음을 열었다.
”현구야! 그래 한번 해 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현수는 현구의 어깨를 토닥이며 즐겁게 웃었다.
”그런데 친구야! 여자 부회장 후보는 누구로 할거지?“
현구는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기로 결심한 후, 부회장 후보로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김유리를 추천했다. 김유리는 5학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현구와 김유리는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고, 서로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현구는 그녀를 부회장 후보로 꼭 세우고 싶었다.
결국 그날 현구는 용기를 내어 그녀를 찾아갔다.
그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고, 그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김유리는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오세진의 당선이 확실한 상황에서 굳이 들러리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아."
김유리의 말은 마치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현구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피어났던 희망의 꽃은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다. 현구는 그녀의 반응에 크게 상처받았지만, 그 앞에서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풀이 죽은 채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음 날, 현수가 나섰다. 그는 김유리를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현수의 전략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김유리가 로맨스 소설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그는 책을 아름답게 포장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만약 우리 현구가 학생회장이 되면, 그의 아버지 필섭 회장님이 학교 도서관에 매달 신간 로맨스 소설을 수십 권씩 기부하기로 했어."
김유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책을 받아들고, 현수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현수는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었다. 김유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현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현구와 현수, 유리는 한마음이 되어 본격적으로 선거 활동에 돌입했다. 유리는 자신을 흠모하는 남학생들을 주로 설득했다. 그녀의 매력과 카리스마는 단숨에 많은 남학생의 지지를 끌어냈다. 반면, 현수는 자신을 따르는 여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의 친절함과 배려심은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 공약과 선거 당일 연설문이었다. 현수는 그의 빼어난 글솜씨로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는 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했고, 그 결과를 공약에 반영했다. 도서관에 책 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 학생들의 편의를 높이는 다양한 제안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연설문 작성에도 현수의 재능이 빛을 발했다. 그는 현구의 장점과 비전을 진정성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써 내려갔다. 연설문은 학생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선거 당일이 되었다. 먼저 연단에 선 오세진은 매우 능숙한 솜씨로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을 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설득력 있는 말투는 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어마어마한 박수를 받았다.
이 장면을 본 순간, 현구는 완전히 주눅이 들었다. 오세진에 비해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꼈다. 그의 자신감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현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는 현수 또한 마찬가지로 느꼈다. 지금 상황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때, 현수는 현구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현구야, 우리는 여기까지 함께 왔잖아. 네가 할 수 있다는 걸 믿어. 네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네가 얼마나 진심으로 이 자리를 원했는지 모두가 알게 될 거야."
유리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 현구야. 우리가 너와 함께 있다는 걸 잊지 마.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함께 이겨낼 수 있어."
하지만 현구는 깊은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런 현구를 현수가 다시 다독이기 시작했다.
"현구야, 내가 한마디 할게." 현수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
"대중을 사로잡는 건 카리스마야. 그래, 그건 맞아. 하지만 그 카리스마를 이길 수 있는 게 있어."
현구는 의아한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봤다.
"그게 뭐야?"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감동이야. 사람은 감동하면 절대 잊지 못하거든. 감동의 눈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현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감동이라니, 그건 자신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현수의 눈빛은 진지했다.
"연설 도중에 막힌다 싶으면 나를 쳐다봐! 그럼 내가 알려줄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법 말이야!" 현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구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현수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것이었다. 감동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도 승산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연단에 오른 현구. 그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연설문을 한 줄 한 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미약했고, 너무나 밋밋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하나둘씩 퍼져나갔다.
현구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의 시선은 종이에만 고정되어 있었고, 자신감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어느덧 연설의 중반을 달리고 있었다. 현구는 확연히 지쳐갔고, 자신이 완전한 패배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 절대적인 구원자가 필요했다. 그는 잠깐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현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현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는 연설문을 덮고 그 자리에서 컥컥하며 울기 시작했다.
빈정거리던 청중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나 잠시 후, 청중 가운데서 한 명이 조용히 외쳤다.
"힘내, 현구야!"
그 외침은 도미노처럼 퍼져나갔다.
"힘내! 힘내! 힘내! 힘내! 힘내! 힘내! 힘내! 힘내!"
여러 학생이 하나둘씩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현구는 눈물을 닦으며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저는 지금 두렵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응원을 들으니 용기가 생깁니다. 저는 완벽하지 않지만, 여러분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중은 더 큰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현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연설을 이어갔다.
"우리는 모두 함께 이 학교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나아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강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청중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 순간 현구는 진정한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설이 끝나자, 학생들은 우렁찬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현구는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현수에게 다가갔다. 둘을 부둥켜안고 다시 한번 펑펑 울었다.
현구의 압승이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반전의 주인공이 된 현구는, 이번에도 현수의 빛나는 기지로 이룬 승리에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친구가 되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만 해도 동갑내기 사촌이자 친구인 현수를 현구가 죽을 때까지 그토록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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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칠규 오뎅 공장에는 순백의 진돗개가 살고 있었다. 그 개는 공장에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들을 막기 위해 키워진 충직한 경비견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고요한 공장에 희소식이 찾아왔다. 진돗개가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은 것이다. 현수는 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오뎅 공장으로 달려가 새끼들과 어미 개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칠규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그는 새끼들을 모두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둘씩 지인들에게 강아지를 선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별의 순간마다 현수의 마음은 아팠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려 애썼다. 시간이 흘러 반년이 지나고, 이제 공장에는 단 한 마리의 강아지만이 남아 있었다. 그 개는 마치 현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현수가 공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다.
현수는 그 작은 생명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소중해졌다. 그들은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듯, 말없이도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현수는 그 마지막 남은 강아지가 자신에게 전해주는 따뜻한 온기와 사랑을 느끼며, 그 순간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들은 서로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칠규는 오래전부터 이 마지막 남은 새끼를 현수에게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수 가게와 뒷 골방은 개를 키우기에는 너무 좁았다. 하는 수 없이 칠규는 어미 개의 집 옆에 작은 새끼 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현수의 집’이라고 새겨 넣었다. 현수가 공장에 도착했을 때, 칠규는 그 강아지를 현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제 이 녀석은 네 거야."
현수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해졌다. 그 순간, 현수는 자신이 받은 것 중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현수와 그 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어, 공장 구석구석을 함께 누비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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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구가 학생회장이 된 이후, 첫 학부모회 모임이 열렸다. 현구의 어머니 미자는 동생 은정과 함께 처음으로 학부모회에 참석했다. 사실 은정은 가게 때문에 갈 형편이 못되었지만, 언니가 부득불 우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따라나섰다.
미자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제 아들이 학생회장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마치 높은 산봉우리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자부심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미자의 얼굴에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빛나는 자랑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무대에 오르는 주인공처럼 정성스럽게 꽃단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걸쳤다. 학교까지 굳이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녀는 특별히 운전사를 대동하여 학교에 나타났다. 마치 왕궁으로 향하는 여왕처럼, 그녀의 등장에는 당당함과 자부심이 넘쳤다. 그날의 햇살마저 그녀를 환영하듯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학부모회에 참석하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그녀가 아닌 은정에게 쏠린 것이었다.
"아드님이 어쩜 그렇게 똑똑해요?", "아들 하나 정말 잘 낳은 것 같아요.", "아들이 어쩜 그렇게 잘생겼어요? 엄마 보니 아들이 왜 잘생겼는지 알겠네."
찬사의 말들은 모두 은정을 향해 있었다. 미자의 얼굴에는 점차 당혹감과 실망, 불만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자부심은 서서히 시들어갔고, 마음속에는 질투와 서운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실 현수는 단지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엄마를 닮아 무척이나 잘생겼고, 그로 인해 동네에서 현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학생회장 선거가 끝난 후에도 친구들은 모두 현수에게 몰려와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헹가래를 쳤다. 현구는 옆에서 그저 부러운 듯 쳐다봐야만 했다.
그러한 현실을 확연히 깨닫게 된 미자는 점차 현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투의 씨앗이 자라났다. 게다가 현수가 자주 콩나물 공장에 놀러 가는 것을 목격한 이후, 그녀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지난번 칠규에게 거절당한 이후로 그녀의 마음에는 깊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 앙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졌고, 그들을 향한 불편한 감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미자의 마음은 마치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처럼 어둡고 무거워졌다. 그녀의 눈에는 현수가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로 비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미자는 시장 상가회를 찾아갔다. 그녀는 간부들을 불러 모아 문책을 시작했다. 시장의 큰손인 그녀의 말은 곧 법과도 같았다. "시장이 너무 더럽고 지저분해요. 벌레도 많고 쥐들도 많아서 손님들이 겁을 내고 찾지를 않잖아요!" 그녀의 항의는 단호하고 강력했다. 그 즉시 시장 구석구석에는 쥐약이 살포되었다.
다음 날, 시장 상인들 사이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죽어 나자빠진 개와 고양이들이 수두룩했다. 정작 죽은 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상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슬픔이 가득했고, 시장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미자가 시킨 일이었으므로 아무도 나서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괜히 그랬다간 필섭의 졸개들이 들이닥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날, 현수의 강아지도 쥐약을 먹고 쓰러져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한 미자의 얼굴에는 차갑고도 어두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묘한 기쁨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목적한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는 혼자만의 춤을 추듯 발걸음을 가볍게 움직였다.
반면 현수에게 그날은 생애 가장 슬픈 날이었다. 그는 죽은 강아지를 끌어안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슬픔은 하늘을 찌를 듯 깊고도 컸다. 결국 칠규가 현수를 뜯어말리며 그의 곁에서 위로해 주었다. 칠규는 조심스럽게 죽은 강아지를 손수레에 싣고, 인적 드문 야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칠규는 강아지를 묻어 주었다. 현수의 슬픔을 담아, 그는 간단한 푯말을 새겨 무덤 위에 세웠다. 푯말에는 강아지의 이름과 함께 짧은 기도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현수는 눈물을 닦으며 강아지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한편, 이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은정은 칠규의 따스한 마음에 깊은 감동했다. 그에게 향하는 그녀의 마음은 한층 더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