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와 칠규
뜨겁고 질퍽한 시간을 보낸 미자와 형석은 자정 무렵 호텔을 나섰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동시에 은밀한 흥분으로 차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고속도로에 접어들며, 서울을 향해 달렸다.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형석은 조용히 차의 속도를 올렸다. 헤드라이트가 길게 뻗은 도로를 밝히며, 그들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미자와 형석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익숙한 듯 다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두 사람은 말없이도 깊은 교감을 나눴다.
형석의 손은 한결같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가끔 미자의 허벅지를 살짝 더듬곤 하였다. 미자는 창밖을 바라보며, 고속도로를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이 마치 그들의 비밀을 알아차릴까 두려운 듯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형석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잠시나마 짜릿한 쾌락을 음미하곤 하였다.
고속도로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고, 그 길 위에서 두 사람은 마치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현실에서는 절대 허락되지 않을, 그들만의 은밀한 세계가 펼쳐졌다.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향한 욕정을 담고 있었고, 그들은 마치 그들의 관계가 세상에 드러나도 괜찮을 것처럼 당당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서울의 불빛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야 할 무거운 현실이 엄습해왔다. 특히 미자는 그 강도가 강했다. 남편에게 들키는 순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미자의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집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녀의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절대로 시장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돼!’
형석의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미자는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 따뜻하고 신뢰 가득한 눈빛이 배신감으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얼어붙는 듯했다. 사랑과 안식이 가득했던 집이, 한순간에 차가운 적막과 분노로 가득 차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들키면 어떻게 하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비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면서도, 앞으로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에게 쾌락은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그녀는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여인처럼,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모든 것이 무너질 위험을 안고 사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자신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형석과의 불장난을 이 순간부터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본능은 여전히 형석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에 머무르는 순간을 허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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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마침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벗어났다. 새벽의 여명 속에서 도로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조용했다. 그러나 서울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더 많은 차들이 도로를 메우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아스팔트 위로 헤드라이트가 빛의 줄기를 그리며 어둠을 찢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터널에 진입한 순간, 희뿌연 연기가 앞을 가렸다. 마치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형석은 비상등을 급히 켜고 속도를 줄이며 주위를 살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심장은 긴장으로 고동쳤다.
“형석 씨, 뭐죠?”
“젠장! 하필이면 터널에서 충돌사고가 났네요.”
“형석 씨, 어떻게 좀 해봐요!”
미자는 불안과 초조함이 가슴을 짓눌리는 듯 크게 외쳤다.
“씨팔! 조용히 해요!”
형석은 본능적으로 모든 감각을 칼날처럼 세우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미자는 이 상황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터널 안의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독한 연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된 미자의 공포는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형석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로지 감각에 의존하여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두 손은 핸들을 단단히 움켜쥐었고, 온 신경은 도로의 미세한 진동과 차체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눈앞은 암흑이었고 낭떠러지 같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터널은 끝없이 이어질 듯 보였고, 시간은 마치 멈춘 듯한 긴장감 속에서 그들을 옥죄었다. 형석은 연신 욕지거리를 뱉으며 공포를 이겨내려고 애썼다.
마침내 연기가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형석의 목은 이미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형석은 숨을 꾹 참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차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터널의 벽에 차체가 부딪치며 금속이 벽을 긁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 터널 안을 메웠다. 차는 벽을 따라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었고, 불꽃이 튀었다.
그 소음은 공포와 절망의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형석은 이를 악물고 핸들을 틀었다. 그 순간, 형석의 차는 앞서가던 차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강렬한 충돌음이 터널 안을 울리며 두 사람의 몸은 앞으로 내던져졌다. 에어백이 터지며 충격을 흡수하려 했지만, 그 충격은 여전히 강렬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쇠붙이가 부딪히고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형석과 미자의 시야는 한순간에 검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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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며, 차츰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머릿속이 맑아지자마자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차가운 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고, 심장은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듯이 요동쳤다. 그녀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다.
‘필섭이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뭐라고 변명을 하여야 하나?’
그녀는 숨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불안과 두려움은 점점 더 강하게 그녀를 휘감았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자, 미자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병실 벽과 기계음이 귓가에 들렸고,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배를 만지기 시작했다.
‘내 아기는? 내 아기는? 내 아기는 무사한가?’
"간호사…. 간호사님!" 미자는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마치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찾는 듯한 절박함으로 간호사를 불렀다. 하지만 간호사보다 먼저 필섭이 나타났다. 병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험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미자는 그의 눈에서 분노와 경멸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마치 용암이 터져 나오듯, 엄청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 년아! 감히 나를 속이고 이런 짓을 저질러? 내가 동생 결혼식에 절대 가지 말라고 했지! 너 같은 년은…. 죽어야 해! 내 새끼 어떻게 살릴 거야? 세상 빛도 한번 못 보고 니 더러운 뱃속에서 죽은 내 새끼 어떻게 살릴 거야! 이 년아!" 필섭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미자의 가슴에 꽂혔다. 그의 얼굴은 핏발이 서고, 눈은 불꽃을 뿜는 듯했다. 방 안은 그의 고함으로 가득 찼다.
미자는 침대 위에서 몸을 움츠리며, 그의 폭언에 질려 눈을 감았다. 필섭의 분노는 끝이 없었고, 그의 말은 미자의 심장을 쥐어짰다. 마치 온 세상이 그녀를 향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미자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미자는 자신이 필섭에게 어떤 존재인지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분노와 폭언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에게 그녀는 단순한 씨받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의 삶은 그저 그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그의 계획 속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존엄을 깎아내렸고, 그의 눈빛은 그녀의 존재를 부정했다. 미자의 가슴 속에는 끝없는 절망이 밀려들었지만, 그 절망 속에서 또 다른 감정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분노였다.
이후 분노는 점차 증오로 변해갔다. 증오의 불씨는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타올라, 그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자의 증오는 질투와 혼합되며 더욱 기이한 형태로 변모해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섭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돈과 자식을 모두 빼앗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주변의 세계를 파괴할, 차갑고도 강인한 복수자가 되기 위한 긴 여정을,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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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퇴원 후, 어느 날 장을 본다는 핑계로 시장을 둘러보다 오뎅 공장을 찾았다. 지난번 교통사고 때 가벼운 찰과상만 입은 형석은 병원에 오자마자 몇 가지 검사만 받고 퇴원한 상태라 한동안 그를 볼 수 없었다. 반쯤 열린 공장 문 사이로 따뜻하고 구수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미자가 가만히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형석은 동료와 함께 능숙한 솜씨로 반죽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형석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애써 못 본 척하였고 미자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이미 시장 바닥에 그날의 사고 소식은 파다하게 퍼졌으므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장 상인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육체적 고통에서는 서서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계속해서 비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러운 년이…. 그렇게 좋으면 동거하다가 천천히 시간 봐서 여유 봐서 결혼 날짜를 잡든지 할 것이지…. 내 금쪽같은 새끼 잡아먹은 년.’
그녀는 출산일이 가까운 날에 결혼식을 잡은 동생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가득 찼다. '왜 하필 그 날이어야 했을까?'라는 원망이 그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미자는 동생의 결혼 날짜가 자신의 출산일과 겹치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웠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더욱이, 남편 필섭에 대한 원망은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물들였다. '그가 결혼식 참석을 허락했더라면, 그날 오전 여유롭게 출발하여 느긋하게 결혼식에 참석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이런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필섭의 독단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미자는 서둘러 새로운 생명을 품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더 깊은, 음울한 의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편 필섭의 가장 큰 약점은, 그가 가진 지독한 아들 사랑이라는 것은 이제 명백하였다. 그녀는 그 약점을 이용해 남편에게 복수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들은 그녀의 복수의 도구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미자는 굳이 남편의 씨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자기 몸에서 태어난 아이면 충분했다. 오히려 남편의 혈통이 아닌, 다른 남자의 씨앗을 품은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에 그녀는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그것은 남편을 향한 최고의 반항이자 복수였다. 남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바로 그 아들을 통해 그녀는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싶었다. 그녀의 몸에서 자라날 아이는 그녀의 복수심을 완성할 중요한 열쇠였다.
그녀는 자기 몸을 타인의 씨앗으로 채울 생각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이 계획 속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 칼을 들이대고, 그 칼이 그의 가장 깊은 곳을 찌를 날을 기다리며, 남편의 무지한 사랑을 조롱했다.
미자는 자신의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인물을 고심했다. 첫 번째로 떠오른 이는 당연히 형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벽한 복수를 원했다. 남편 필섭과 외모가 비슷한 남자가 필요했다. 잘생긴 외모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누구라도 필섭의 아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그런 남자.
그러자 곧바로 박칠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콩나물 공장 사장인 그는 필섭과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강인한 체격과 날카로운 얼굴선, 남자다운 분위기는 미자의 계획에 적합했다. 그녀는 박칠규의 씨앗을 받아들이면, 누가 봐도 필섭과 닮은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 확신했다. 미자의 눈앞에, 복수의 그림이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그녀의 계획을 좀 더 세밀하게 다듬고 때를 기다렸다. 그때의 시작은 필섭이 다시 송미자를 찾는 날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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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섭은 육 개월 만에 다시 그녀를 찾았다. 그동안 자신의 냉혹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미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미자를 방문하기 한 달 전부터 다양한 선물을 운전사를 통해 보냈다. 일종의 화해 제스처였다.
매일같이 도착하는 값비싼 보석과 고급스러운 향수,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까지. 미자는 이러한 선물들을 받으며 곧 필섭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나타나면, 어떤 표정으로 그를 맞이할지, 어떤 말을 건넬지, 그녀는 매일 밤 생각하고 연습했다.
늦은 밤, 필섭은 미자의 문 앞에 서서 조심스레 벨을 눌렀다. 그녀는 서둘러 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눈동자는 반짝였다. 미자는 필섭에게 와락 안기며 행복에 겨운 듯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였다.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꾸며진 가면이었고, 그의 따뜻한 손길조차도 그녀의 결심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녀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 뒤에는 복잡하고 음울한 생각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차가운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필섭의 품에 안긴 미자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계획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미자는 필섭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이 돌아와서 너무너무 기뻐요,"
그녀는 필섭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날 밤, 그는 미자의 품에서 잠들었다. 하지만 미자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복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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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섭이 다녀간 다음 날 밤, 미자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한 화장을 했다. 매끄럽게 발린 붉은 입술, 짙게 그려진 눈매, 그리고 부드럽게 빛나는 이마. 그녀의 얼굴은 마치 아름다운 가면처럼 완벽하게 꾸며졌다.
그녀는 야사시한 속옷을 입고,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의상을 걸쳤다. 검은 레이스가 아슬아슬하게 몸을 감싸고, 깊게 파인 네크라인은 그녀의 매력을 한껏 드러냈다. 미자는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리며, 그윽한 향기가 그녀의 의도를 더욱 짙게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미자는 콩나물 공장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더욱 눈부시게 빛났고, 그녀의 발걸음에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공장 앞에 도착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벨을 눌렀다. 차가운 금속 벨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깼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박칠규는 문을 열고 미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방문에 놀란 눈빛을 숨기지 못했지만, 미자의 매혹적인 모습에 이끌려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 어 어쩐 일로 이렇게 바 바 밤늦게 저희 집을???”
“죄송해요. 밤늦게…. 하지만 워낙 중차대한 일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칠규 씨, 잠시 들어가서 얘기 나누어도 될까요?”
“아 아 그럼요.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안으로 들어선 미자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칠규가 혼자 사는 공간이었지만, 집안은 예상 밖으로 깨끗하고 단정했다. 모든 가구와 소품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먼지 하나 없는 바닥은 그의 섬세한 성격을 반영하는 듯했다. 그녀는 이런 그의 생활 모습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미자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고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자신의 몸짓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움직였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깊게 파인 네크라인 너머로 살짝 보이는 가슴골을 드러내며, 그녀는 칠규의 시선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매혹적인 빛을 발하며 그를 향해 머물렀다.
"집이 정말 깔끔하네요," 미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칠규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마치 달콤한 꿀처럼 칠규의 마음을 녹였다. 그녀는 천천히 방안을 거닐며, 손끝으로 가구를 스치고,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척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끊임없이 칠규를 의식하며, 그가 자신에게 더욱 빠져들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칠규는 미자의 고혹적인 모습에 매료된 듯, 그녀의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미자는 그런 그의 반응을 즐기며, 더욱 과감하고 유연한 자세로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방 안에 은은한 조명이 그녀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다리를 교차하고, 한쪽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칠규를 향해 관능적인 눈빛을 보냈다.
“대접할 게 별로 없는데…. 혹시 차나 커피 한잔하시겠습니까?”
칠규는 어색하지만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잘 밤에 카페인은 좀 그런데…. 혹시 술 한 잔 주시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은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듯 부드러웠다.
“술이…. 소주밖에 없는데…. 괜찮을까요?”
“네. 주세요.”
칠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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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는 소박하지만 정갈한 건어물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술잔에는 투명한 소주가 채워졌다. 칠규와 미자는 마주 앉아 잔을 들었다.
미자는 소주를 한 모금 마신 뒤, 탁자 위에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빛은 한층 더 밝아졌다. 그녀는 칠규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칠규 씨, 어제 제 남편이 다녀갔어요. 그리고 이런 얘기를 늘어놓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칠규가 다시 채워놓은 술잔을 들어 반쯤 마신 뒤 내려놓았다. 칠규는 미자의 변화를 감지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방 안의 공기는 한순간에 팽팽해졌다. 미자는 다시 고개를 들고 칠규를 바라보았다.
“시장 외곽에 현대식 새 시장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이건 절대 비밀입니다. 오직 칠규 씨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알겠죠?”
“시장 외곽이라면 어디를?”
“바로 여기죠. 칠규 씨가 운영하는 콩나물 공장과 맞은 편 오뎅 공장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급히 칠규 씨를 찾은 거고요. 칠규 씨만큼 우리 시장에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착하고 성실하고 항상 타의 모범이 되고…. 한마디로 우리 시장의 성실과 선함의 상징이잖아요…. 그러니 제가 안타까운 거예요. 아시겠죠? 제 마음…. 저는 칠규 씨같이 좋은 사람은 항상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칠규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가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일구어 온 공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미자는 그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계획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정말 안타까워요.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당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 위에 얹어졌다.
칠규는 그녀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언제쯤 새 시장이 건설될까요?”
“그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워낙 우리 양반이 사업 얘기는 안 하는 편이라…. 하지만 우리 그이 성격 잘 아시잖아요? 한번 결심한 거는 불도저식으로 몰아붙인다는 거…. 그래서 그이가 새 시장 건설 계획을 입 밖에 냈다는 뜻은 곧 한다고 봐야 할 거예요.”
미자는 그의 혼란을 즐기듯, 더욱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렇게, 미자의 교묘한 계략은 칠규의 마음에 깊은 불안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그 불안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발 더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칠규 씨, 제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게요. 제가 도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정말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미자는 칠규의 손을 굳게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 밥줄이 걸린 문제잖아요. 신시장 건설하면 전통 시장 다 죽을 건데…. 그럼 저는 어디서 월세 받아요? 그러니 이건 제 문제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니 제가 우리 남편을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구워삶을 테니 크게 심여 하시지 않아도 될 거예요.”
미자는 마치 자신과 칠규가 같은 운명의 배를 타고 있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그 속에는 미묘한 권위와 은근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미자는 은근히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칠규가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칠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에게 바싹 더 다가갔다.
"저는 항상 사람들을 도와왔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저를 신뢰하고 있고요. 당신도 저와 함께라면 분명히 잘 될 거예요." 그녀의 말은 달콤한 독처럼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미자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칠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에 속으로 미소 지었다. 분명 칠규는 이제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 화룡점정, 그와의 잠자리만 남겨놓았다고 판단하고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러니 칠규 씨,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 오늘 진하게 한번 마셔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