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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Oct 15. 2024

질투의 끝 #3

은정과 동규

은정은 서점에 있으면 시간이 늘 천천히 간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책방은 제법 넓지만, 조명은 밝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썰렁했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을 오늘도 지켜보았다. 그들은 늘 바삐 세상 어딘가로 바쁘게 오고 갔다. 밖은 현실이고 안은 꿈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혹은 바깥은 현재고 책방은 과거처럼 느꼈다. 그리고 점점 꿈에, 과거에 머문 이가 줄어드는 것을 실감했다.      

서점 문을 삐죽 열고 들어오는 이례적인 행위의 낯선 인간. 그들이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책은 친숙한 참고서나 학습지였다. 혹은 잘 포장된 재테크, 우울한 현대인의 가벼운 이야기, 유명인의 얼굴이 새겨진 익숙한 책이었다. 적어도 낯선 이들 사이, 검게 탄 모습의 그가 투박한 손으로 내민 자그마한 시집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햇살이 서서히 도시의 빌딩 사이로 긴 그림자를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서점 내부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고요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도 주홍빛 태양이 녹아들고, 그 빛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고된 일상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하였다. 책장에 꽂혀있는 많은 책은 저녁노을과 함께 더욱 깊은 색감을 띠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속삭였다. 은정은 익숙한 시집을 손에 들고, 표지를 어루만지며 자신이 조금 전에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바람은 높은 나무 끝에서 살랑거렸습니다.     

아직 쌀쌀한 아침.      

안개비.          

저는 곁가지 오솔길로 굳은 발을 뗐습니다.     

구부정한 소나무 사이로     

흐린 그림자가 서글프게 뒷걸음칩니다.          

당신을 찾아 헤맨 혼란이 점점 또렷이      

눈앞에 파고를 만듭니다.          

살짝 주름진 입가의 미소로      

고개를 돌리지만     

결국 다갈색 뺨에 난 두 줄기 자국.          

당신은 내게     

차가우면서도 따스하고     

까끌까끌하면서도 부드러웠습니다.          

붉은 그리움이 자꾸 눈을 물들입니다.     

그녀는 이 순간을 즐기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문학소녀였던 은정은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지만, 부모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둘째 언니 미자에게 손을 벌려볼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그녀는 휴학하고, 돈을 벌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2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      

맞은편, 대형 쇼핑센터 공사장에도 거대 투광등이 사방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 야간작업하는 근로자들이 거대한 건물에 빈대처럼 붙어 마무리 인테리어 작업을 꼼지락거리며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저곳은 아담한 식당들과 카페가 옹기종기 모인 먹자골목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낮은 가게들은 모두 사라지고, 임시 사무실이 생기더니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크레인은 마치 거대한 거미처럼 철근과 자재를 날랐고 굴착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을 파헤쳤다. 그리고 콘크리트 믹서 트럭이 연신 들락거렸다.      

은정은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쇳소리와 함께 철근이 엮이고 벽돌이 쌓이며, 콘크리트가 굳어가는 건설 과정을. 그녀가 서점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마침내 철골 구조물이 마무리되고, 벽체가 세워지며, 창문틀이 설치되면서 거대한 건물의 윤곽이 드러났다.      

은정은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략 10분 후면 그 남자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문학 코너를 쳐다봤다. 그곳은 늘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소외된 책들이 책장에 가득했다. 한쪽 구석에 놓인 간이용 의자도 마찬가지로 쓸쓸했다.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앉기 시작했다. 그는 습관처럼 두툼한 고전류의 책을 꺼내 펼쳐놓고는 미동도 없이 책 속에 빠지곤 하였다. 그리고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비교적 저렴한 시집이나 문고판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마치 자릿세를 내는 모양새였다.     

*************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네요.” 은정은 환한 미소와 함께, 그가 내민 책의 결제가 끝나자마자 묻지도 않고 포장을 했다.      

“아, 네….” 그 남자도 배시시 웃었다. 그는 은정의 손을 줄곧 쳐다봤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능숙하게 포장지를 씌우고 각을 잡아 투명 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골든 색 리본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책에 꼬아서 묶더니 어느새 바람개비 리본을 완성하였다.      

책을 받아든 남자는 아쉬운 듯 천천히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은정의 시선이 그를 줄곧 따랐다. 그는 잠시, 인도에 머물다 어둡고 탁한 도시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까만 하늘은 그녀의 마음처럼 막막했다.      

그녀는 마감 표지 걸이를 출입구에 내걸고, 문을 잠근 뒤, 형광등을 순차적으로 껐다. 시간이 느린 곳. 과거 혹은 꿈의 세상. 적어도 느긋함 혹은 게으름이 용서되는 공간. 그녀의 시선은 이제 조금 전 그 남자가 머물렀던 모든 곳에 닿았다. 그가 매일같이 서점을 방문한 날로부터, 그녀의 호기심은 궁금함으로, 그리고 관심으로 마침내 끌림으로 이어졌다. 어둡고 구석진 문학 코너를 서성거리는 낡은 작업복. 어느 순간부터, 그가 가벼운 책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올 때면, 그녀는 무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고 흥분이 다가왔다. 사랑의 기쁨이 그녀를 물들였다. 여자는 내내 기다리고 남자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     

남자의 이름은 강동규. 그는 쇼핑센터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근무했다. 가난한 일곱 형제의 맏이였던 그는, 학자금 마련을 위해 내국인들이 꺼리는 건설직에 뛰어들었고, 타고난 성실성과 포용력을 인정받아 비교적 빠르게 관리자가 되었다. 하지만 <노가다>로 깎아내리는 우리 사회의 통념은 그를 외로운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건설 현장이 있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낯선 곳에 낯선 사람으로 쓸쓸한 삶을 살았다. 어느덧 그는 이제 마흔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거였다. 한때, 그의 시가 찬사를 받던 시기가 있긴 있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지방 신문에 칼럼을 맡을 때였다. 그는 서둘러 책을 냈고 곧 전업 작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대중을 사로잡지도, 비평가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시집 한 권을 남긴 채, 다시 건설 현장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동규는 공사 현장을 바삐 돌아다니다가 문득 길 건너편 낡은 서점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간판은 바래져 있고 서점 앞에 놓인 작은 진열대는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그는 안타까움을 느끼면 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건설하는 쇼핑몰 2층에는 대형 서점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반짝이는 전면 유리와 최신식 인테리어로, 독서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 될 이곳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 화려함 뒤에 남겨질 그림자는 바로 길 맞은편 오래된 서점이었다.      

그는 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을 손끝으로 넘기며 시간을 보내던 기억, 책을 고르다 우연히 만난 첫사랑, 그리고 책방 주인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까지, 모든 것이 그의 내면을 채웠다. 그에게 오래된 서점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그의 추억과 역사가 깃든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추억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사라질 운명이었다. 대형 쇼핑몰이 완공되면, 사람들은 새롭고 편리한 공간으로 몰려들 것이고, 낡은 서점은 점점 잊혀질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자신이 짓고 있는 화려한 건물이 결국 그 서점을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어느 날, 동규는, 온종일 이어진 건설 현장의 소음과 먼지를 뒤로 하고,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익숙한 그리움에 이끌려 혹은 속죄라도 하는 양, 오래된 서점으로 향했다. 문의 손잡이는 시간이 남긴 흔적으로 매끄럽게 닳아 있었다. 그는 잠시 문 앞에서 멈춰 서서 깊은숨을 들이쉬고, 서서히 문을 밀었다. 낡은 종소리가 고요한 서점을 깨웠다. 그는 특유의 책 냄새와 약간의 먼지 냄새를 기분 좋게 들이켰다.      

카운터에서 책을 읽던 예쁜 점원이 그를 맞이했다. 수수한 차림의 은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여 서점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동규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는 듯한 부드러움에 이끌려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혹시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관심과 따스함이 묻어났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편히 둘러보세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라고 했다.     

동규는 서점의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며, 책들 사이에 깃든 추억과 향기를 오랜만에 만끽했다. 그리고 점원의 부드러운 미소는 그에게 이곳이 단순한 서점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늘 그리던 고향에 온 듯, 평온함에 물들고 있었다.      

동규는 문학 코너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발견하고는 기분 좋게 집어 들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질투의 끝>. 그는 간이용 의자에 앉았다. 주변의 고요함과 책의 향기가 그의 피로를 씻어냈다.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첫 장을 넘겨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     

그날 이후, 동규는 퇴근 후마다 서점을 찾았다. 바쁘고 분주한 하루의 끝자락, 서점의 조용한 분위기와 은은한 책 향기는 그의 외로움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그러나 그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단지 독서의 매력만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은정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그녀의 맑고 깨끗한, 화장기없는 얼굴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녀는 단순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화려함에는 무심한 듯,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품과 고유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듯 보였지만, 그 속에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더욱 깊어지는 그녀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책장을 정리하는 그녀를 훔쳐보곤 했다. 책 한 권 한 권을 다룰 때마다,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정성이 그를 속수무책으로 끌어당겼다. 그 손길은 마치 오래된 책들 속에 숨겨진 시간의 흔적을 어루만지며, 그가 품었던 꿈, 사랑, 희망, 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섬세하게 품는 듯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끌렸다. 그녀의 작은 미소, 고객에게 친절히 인사하는 모습, 그리고 포장을 할 때마다 보이는 섬세한 손길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한 가지 큰 장벽이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는 서른아홉, 인생의 절반이 지났지만, 그녀는 아무리 많아도 스물대여섯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차이는 마치 레테의 강처럼 건널 수 없는 깊은 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끌림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젊음과 생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며, 그녀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에게 서점은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행복이자 고통이었다. 그렇게 그는 매일 서점을 찾아 문이 닫히는 시간까지, 그녀를 훔쳐보며, 그녀를 한 번 더 눈에, 가슴에 담고 나서야 서점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쇼핑몰의 완공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그를 점점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     

결국, 동규의 바램과는 달리, 쇼핑몰 건설의 마무리 단계인 내부 인테리어 마감과 외부 작업이 모두 끝났다. 안전 점검 및 인증도 마치고 청소 및 정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마감 작업자와 조경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근로자가 이미 건설 현장을 떠났다. 그는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 건설 현장에 나설 때마다 무거운 발걸음을 떼야 했다. 그리고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그의 하루는 이제 시간이 아닌 그녀의 모습으로 측정되었다. 현장에서 바라보는 어릿어릿한 그녀의 실루엣, 저녁을 급히 대충 때우고 서점 문을 당길 때 그녀의 미소, 훔쳐보는 그녀의 뒷모습, 계산대에 놓인 책을 포장하는 그녀의 손놀림. 그는 마치 끝이 정해진 이야기를 읽는 독자처럼, 피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에게도 마지막 출근 날짜가 확정되었다. 앞으로 일주일. 은정을 볼 수 있는 날이 고작 이레밖에 남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다음 행선지는 아랍 에미리트였다. 그는 그녀에게 뭔가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라지지 않을 작은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을 꺼내 첫 장을 펼쳤다. 한때 그의 꿈이자 희망이었던 책. 그는 그녀에게 남기고 싶은 글을 무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펜을 꾹 잡고 또박또박 글을 써 내려갔다.     

‘당신의 미소는 내 하루의 빛이었습니다. 이 책이 당신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와 기쁨을 주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라며, 이 짧은 인사를 남깁니다. 강동규.’     

*************     

은정은 점점 더 자주 건너편 건설 현장을 바라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근로자와 장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목격하며 마음 깊숙이 두려움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공사가 끝나면 그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밤마다 잠 못 이루게 하였다. 그의 존재가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그의 부재는 상상하기 힘든 공허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텅 빈 서점. 그녀는 해가 저무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 끊임없이 뭔가를 바라보는 자신이 무척 초라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때, 서점의 문이 살짝 열리고 그가 나타났다. 그가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한순간 멈춘 듯했다. 그가 나타날 것이라고 매일 바라왔지만, 정작 그가 눈앞에 서 있는 지금, 그녀의 가슴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드리운 쓸쓸한 미소를 보며, 그녀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얼어붙게 하였다.      

“어 어 어 어서 오세요.”     

그녀는 겨우 입을 떼고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좀 달랐다. 문학 코너로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 것이다.      

“호 호 혹시 찾으시는 책이라도?”     

“아뇨, 저…. 그게…. 그냥 드리고 싶은 책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선물로.”     

동규는 쑥스러움을 숨기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으며 정성스럽게 포장한 책을 은정에게 내밀었다.     

“제게 선물을?”     

“네. 송은정 님에게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시집입니다.”     

그는 그녀의 명찰을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천천히 풀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포장지의 촉감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고,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당신의 볼을 타고’     

‘강동규 시집’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 같아서….”     

동규는 고통스럽게 작별을 고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라봤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발걸음을 돌려야만 하였다.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늘 깊은숨을 쉬며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산을 펼쳐 듭니다.     

머리 위에서 톡톡 하는 소리가 정겹습니다.     

마치 무언가가 고요함에서 튕겨 나오는 듯합니다.


투명한 바람이 이어졌다 사라집니다.     

성긴 천으로 된 옷이 펄럭이면     

당신은 안경 너머      

긴 눈썹을 끔뻑이며 나를 지긋이 쳐다보곤 하였습니다.


당신의 따스함을 애써 되새김질하려고     

추억의 단편들을 흐린 도시에 그려봅니다.     

저의 밋밋한 하루에 감초 같았던 당신.                    

눈에 뵈진 사랑은      

푸르게 상처 난 좁은 거리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고 적막하기 그지없지만        


미련하게 꾹 끌어안고     

당신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을 훔치려고만 애를 씁니다.     

동규는 돌아섰다. 은정은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시를 읊조렸다. 그녀가 숱하게 읽었던 그의 시를.     

“당신이 강동규 시인이군요.”     

동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보고 싶었습니다.”     

은정은 자기 가방에서, 까맣게 때가 묻은 그의 시집을 꺼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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