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와 형석
미자는 동생 은정의 결혼 소식에 여러 가지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우선, 은정의 미모를 참작한다면 적어도 그녀의 신랑은 의사나 판, 검사 혹은 재벌 2세쯤은 될 줄 알았건만, 건설 근로자에다 빈털터리고 여섯 동생을 책임지는 맏이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게다가 서른아홉 노총각. 그녀의 동생은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꽃다운 이팔청춘이 아닌가!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숱한 후보자들이 은정에게 대시할 텐데, 그 모든 호사를 마다하고 최악의 신랑을 선택하다니!
미자는 도저히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남산만큼 부푼 그녀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키득키득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푹신한 고급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동생의 미래에 펼쳐질 고단한 삶이 그녀를 더욱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싱겁게 쉽게 깔끔하게 승부가 날 줄 알았다면, 그녀가 성장기에 동생에게 가졌던 그 고통스러운 질투가 무의미할 따름이었다.
‘바보 같은 년, 지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구먼….’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레몬 머랭 파이 한 조각을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녀는 파이를 꿀꺽 삼키며, 은정이 정성스럽게 수기로 만든 청첩장을 다시 펼쳤다. 결혼식장이 자신과 동생의 모교 초등학교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멍청한 년, 예식장 잡을 돈도 없어 초등학교 교실에서 하다니!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먼! 게다가 결혼식이 다음 달이라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만 이 년이 이거 사고 친 거 아냐? 겉으론 한없이 조신한 척하더니…. 엉큼한 년.’
요즈음 미자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재벌 남편의 첩으로서 기다림과 외로움 속에 살던 그녀에게 필섭의 애정은 그저 일시적인 달콤함이었다. 그가 매번 대문을 열고 작별을 고할 때면 차가운 바람만이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기 시작하자, 남편의 태도는 급격히 변했다. 매일같이 그녀의 문 앞에는 정성스럽게 준비된 보양식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따뜻한 국물 속에 진하게 우러난 닭고기와 한우,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미역국, 신선한 생선과 잡곡밥, 갖가지 채소와 과일들이 그녀의 식탁을 풍성하게 채웠다. 고소한 향이 나는 견과류와 씨앗들, 윤기가 흐르는 다양한 디저트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었다. 보양식 한 접시 한 접시에 담긴 남편의 관심과 사랑에 그녀는 몸을 후르르 떨며 행복에 겨운 블루스를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지나친 배려가 제공하는 거북살스러운 순간이 있었으니….
“사모님, 약 드실 시간이에요.”
가정부는 물 한 잔과 함께 한 움큼의 보충제를 내놓았다. 임산부 종합 영양제뿐만 아니라 엽산, 철분, 칼슘, 비타민 D, 오메가3, 요오드, 비타민 B6, 비타민 C, 프로바이오틱스까지.
미자는 좁은 목구멍에 한 알씩 삼키며 물 한 모금 넣어 고개를 젖히고 꾸역꾸역 삼켰다. 병아리가 물 먹는 모습과 흡사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더 힘든 게 남아 있다. 특별 보양식. 들기름에 푹 끓인 가물칫국, 늙은 호박을 달인 물, 흑염소 진액, 잉어탕, 생화 탕에 듣도 보도 못한 익모초 달인 물까지.
그녀는 매일같이 이러한 음식을 삼켜야 했고, 그 과정은 고역이었다. 보양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목구멍으로 타고 내려가는 순간마다, 미자는 자신의 인내심이 시험대에 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남편의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버티게 했지만, 그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다.
또 한 가지, 미자를 괴롭히는 문제는 바깥출입 제한이었다. 도보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공원이나 시장, 가게 정도는 괜찮지만, 차를 타고 쇼핑을 한다거나 시내 중심가를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몰래 나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는 운전 면허증이 없다. 애초에 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매번 운전사를 대동하여 외출하곤 하였는데,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필섭은 가장 먼저 미자의 운전사를 본사로 불러들였다. 즉, 그의 귀한 자식을 낳을 때까지 그녀의 발을 묶은 것이다. 물론 미자가 꼭 외출하고 싶다면 택시를 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시내로 외출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쇼핑이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탐나는 갖가지 명품을 충동적으로 사며 외로움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곤 하였다. 그러니 무거운 몸으로 뒤뚱뒤뚱하며 양팔에 무거운 쇼핑 백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구매 영수증은 고스란히 필섭에게 보여야만 했다.
미자는 한 번씩 운전 기사에게 아무 목적 없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지역들을 돌아다니게 하였는데, 이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성취한 부 – 비까번쩍한 세단에 운전기사까지 고용할 정도의 재력 -에 감탄하고 부러운 눈길을 보내기를 원하는, 일종의 허영심 발로였다. 그녀에게는 이런 보임, 껍데기의 화려함이 삶의 본질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고향에서 열리는 은정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늘 그녀가 꿈꾸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 이제 그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녀는 눈부신 성공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비록 그게 초등학교 교실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하객이 아닌, 한 시대를 풍미한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미자는 결혼식이 열릴 식장을 상상하며, 그곳에 자신이 나타났을 때의 광경을 그려보았다.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그녀의 존재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었다. 하객들은 속삭이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의 화려한 의상과 귀금속에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웃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성공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말을 하면서도 겸손한 척 연기할 것이다.
이런 상상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고, 고향으로의 귀환이 단순한 방문이 아닌, 그녀의 성취를 증명하는 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결혼식은 미자에게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자, 자신의 재력을 통해 이룩한 새로운 삶을 자랑할 수 있는 무대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요청에 필섭은 단호했다.
<절대 참석 불가>
마치 쇠사슬처럼 그녀의 마음을 단박에 꽁꽁 묶어버렸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갇히면 갇힐수록, 벽이 좁아질수록, 창살이 두꺼워질수록, 인간은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자유를 꿈꾼다. 빛을 향한 열망으로 더욱 밝게 타오르고, 창밖의 하늘, 푸른 들판,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 같은,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자유의 상징처럼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가고 싶다는 미자의 갈망은 더 깊어지고 더 강렬해져만 갔다.
마침내 은정의 결혼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온 그 날, 미자의 눈동자 속에는 어두운 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내면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악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필섭에게 순응하며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거듭 속삭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야만 해.’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속하게 계획을 구상하고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거짓말, 속임수, 심지어 배신까지도 그녀의 선택지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단호하고 목적 지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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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외곽에는 홀아비가 두 명 있었다. 한 사람은 콩나물 공장 사장인 박칠규, 다른 한 사람은 오뎅 공장 사장인 김형석이었다. 그들은 모두 서른 중반의 나이였고, 아기는 없으며, 준수한 외모와 당당한 체격을 지녔다. 그러나 성격만큼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콩나물 공장 사장은 늘 미소를 머금고,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의 말투는 봄날의 햇살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워,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선사했다. 그는 매일 아침, 공장 직원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며, 사소한 일에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는 막 자란 콩나물처럼 싱그럽고 생명력이 넘쳤다.
반면, 오뎅 공장 사장은 냉철하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눈빛은 항상 날카롭고, 말투는 단호했다. 그는 시간 약속에 철저하며, 직원들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오뎅처럼 뜨거운 국물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단단함을 지녔다.
이 두 사람에게는 극명한 차이만큼 강렬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의 아내는 모두 어느 날 밤, 말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내의 야간도주라는 같은 운명의 장난 앞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감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박칠규는 성실함으로 그 상처를 메워나갔다. 그는 바쁘게 일에 파묻혀,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쉼 없이 일했다. 그는 콩나물을 자식 돌보듯 하며 자신의 일상을 돌보았고, 그 성실함 속에서 아픔을 조금씩 씻어냈다. 그의 하루는 콩나물이 자라는 과정처럼 느리고도 꾸준하게 흘러갔다.
반면, 김형석은 술과 노름에 몸을 맡겼다. 그는 밤이면 어둠 속으로 사라져 술잔을 기울이고 노름판에서 승부를 겨루며 아픔을 잊으려 했다. 그의 내면은 배신의 증오로 불타고 있었고, 술과 노름은 그 불을 잠시나마 식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절대로 치유되지 않은 채로 점점 더 곪고만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는 성실함 속에서, 다른 하나는 방탄함 속에서, 그들은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길을 외롭게 걷고 있었다.
항간에는 두 사람의 아내가 왜 떠났는지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콩나물 공장 사장 아내는 바람이 나서 도주했다는 말이 돌았고, 오뎅 공장 사장의 아내는 학대를 견디지 못해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또 어떤 이는, 김형석의 아내가 도망간 뒤, 김형석과 박칠규의 아내가 정분을 나누는 장면이 박칠규에게 발각되어 그길로 아내가 도망갔다고 말하곤 다녔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소문들은 마치 안개 속의 무성한 나뭇가지처럼 얽혀 있었고, 진실은 그 안개 너머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다.
두 공장의 소유주는 한 사람이었다. 바로 필섭이었다. 그러므로 송미자는 매월 말이면 두 공장을 찾아 월세를 받아 갔다. 콩나물 공장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밝아졌다. 박칠규의 환한 미소와 따뜻한 인사는 미자의 하루를 환하게 비추었다. 박칠규는 매번, 깨끗한 봉투에 담긴 월세를 미자에게 건네며 그의 눈에는 감사의 빛을 담았다.
“매월 이렇게 성실하게 준비해 주셔서 감사해요.” 미자가 말할 때, 칠규는 부드럽게 웃으며 “덕분에 저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미자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설렘이 번졌다. 공장 안은 늘 활기가 가득했고, 그녀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봄날의 싱그러운 햇살이 그녀를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므로 칠규와의 만남은, 그녀가 서서히 필섭에 대해 기다림과 외로움에 지쳐가는 만큼, 더 기다려지고 있었다.
반면, 오뎅 공장을 방문할 때면,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생선 비린내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오뎅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그녀는 늘 비슷한 광경을 마주했다. 김형석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빈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미안한 눈빛을 띄웠다.
“이번 달에 정말 힘들어서 그런데요…. 다음 달에는 꼭 드리겠습니다.” 형석의 목소리는 늘 다급했고, 그의 얼굴에는 늘 비지땀이 흘렀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기계가 고장이 나서…. 이번에 원재룟값이 너무 올라서…. 대금이 밀려서 아직 받지 못했어….”
마치 지키지 못할 약속을 반복하는 것이 일상이 된 듯, 그의 핑계는 점점 더 다양해졌다. 이런 핑계들은 이제 그녀의 귀에 익숙했다. 그의 거짓말은 바람에 실려 오는 먼지처럼 흩어졌고, 매번 다른 이유로 자신을 변명하는 형석을 보며 그녀는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이번 한 번만 더 믿어주세요.” 그이 목소리는 간절했지만, 그녀는 다음 달에도 똑같은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시장 골목길로 나서며, 마침내 필섭에게 보고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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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자는 김형석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은정의 결혼식 전날, 흐린 밤에 미자는 형석을 찾아갔다. 그녀는 여느 때와는 다른 표정으로 공장에 들어섰다. 그녀의 눈에는 결단력이 매섭게 담겨 있었다.
“형석 씨,”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달 월세는 물론이고, 지난달까지의 밀린 월세도 탕감해 드릴 테니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셔야겠어요.”
형석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탁이라뇨?”
“내일이 제 동생 결혼식입니다. 형석 씨는 제 차를 운전해주시면 됩니다. 새벽에 은밀히 출발할 거예요.”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형석은 쌍수를 들고 반겼다. 단 한 가지, 비밀만 유지하고 필섭의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되었다.
마침내 은정의 결혼식 날, 새벽을 틈타 미자를 실은 세단이 시장을 빠져나갔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고요했고, 공기는 차가웠다. 형석은 미자가 건넨 주소를 확인하며, 묵묵히 핸들을 잡고 악셀을 힘차게 밟았다.
길은 한산했다. 뒷좌석에 탄 미자는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의 불빛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단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며, 가슴 속에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었다. 필섭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모든 것은 완벽할 것이다. 설령 발각되더라도, 일생에 한 번뿐인 동생의 결혼식이라고 투덜대고 그에게 안기면 어느 정도 용서가 될 일이었다. 단,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에는,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무사할 때만 성립하는 거였다. 미자는 부푼 데로 부푼 배를 어루만지며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내 아기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외면했고 그녀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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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를 태운 차는, 예상보다 이른 시각인, 오전 10시경 부산시 경계를 넘었다. 동생의 결혼식까지는 아직 5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녀는 결혼식장에 일찍 가고 싶지는 않았다. 도착 시간은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했다. 모든 하객이 다 모여있는 순간, 혹은 결혼식이 막 진행되어 이목이 한 곳에 몰린 순간, 그 찰나를 뚫고 동생보다 더 화려하고 우아하고 엘레강스한 모습으로 등장했을 때, 모두의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환영과 놀라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게다가 배도 고팠다.
“형석 씨, 우리 어디서 뭐 좀 먹고 갈까요?”
“아, 네. 그거 좋습니다. 근데 아침이라 오픈한 식당 찾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해운대 쪽으로 가면 될 거예요. 24시간 영업하는 식당들이 꽤 있거든요.”
“그거 좋네요. 바다도 구경하고…. 하하하”
형석은 신바람이 났다. 자신의 빚도 탕감해주고 이렇게 몰래 은밀한 여행도 같이 떠나니, 그의 마음은 바람을 탄 듯 가벼웠다. 그는 창문을 살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미자를 힐끗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비치는 아침 햇살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그의 마음은 더욱 벅차올랐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그에게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차 안에서 느껴지는 묘한 설렘을 음미했다. 사실, 형석은 부산으로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미자와 앞으로,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불륜 같은 상황을 상상했다. 그녀의 웃음소리, 진한 화장품 냄새, 솜털처럼 부드러운 손, 그리고 지금, 이렇게 둘만의 약속된 시간 속에서 그의 머릿속은 끈적끈적한 환상으로 가득했다.
‘그래, 이건 마치 신혼여행 같은 느낌인데…. 어쩌면 내가 분위기를 적당히 띄우면 넘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외롭기는 피차일반일 텐데.’
형석은, 미자가 지시하는 대로, 해운대 미포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해운대 입구부터 줄줄이 나타나는 호텔과 콘도, 푸른 바다를 훑으며 그의 설렘은 흥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뒤이어 관광 유람선 선착장을 지나자 횟집들이 즐비하게 모인 골목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24시간 영업 횟집을 발견했다. 아침인데도 식당의 내부 조명은 환하게 밝았다.
그들은 1층, 입식 테이블로 이루어진 홀을 지나 2층 좌식 테이블로 된 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고급 활어 모듬 중짜를 주문했다. 형석과 마주 앉은 미자는, 전날 잠을 설친데다 이른 시각에 깨어났으므로 무척 피곤한 듯, 식탁에 앉자마자 다리를 쭉 뻗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시린 눈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저 멀리 조선 비치 호텔과 고급 아파트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해운대 앞 바다.
미자는 해운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여름 방학만 되면, 소위 노는 애들과 어울려 바다를 찾곤 했다. 하지만 친구들 모두 빈털터리였으므로, 그들은 외지에서 온 순진한 청년들을 꼬드겨 단물 쪽쪽 빨아먹고 튀곤 하였다. 그 중심에는 송미자가 있었다. 또래 중에 가장 키도 크고 날씬하고 이뻤던 그녀가 당연하게도 마담 역할을 했다.
미자는 성인으로 보이기 위해 입체감 있고 성숙한 느낌의 화장을 했다. 눈매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아이라이너로 속눈썹 라인을 따라 선명한 라인을 그렸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연출하기 위해 여러 번 마스카라를 덧발랐고, 필요할 경우 인조 속눈썹을 붙여 눈이 더 커 보이도록 했다. 그녀는 입술에 성숙한 느낌의 진한 레드나 버건디 색 립스틱을 발랐다. 립 라이너로 입술 윤곽을 먼저 그린 후, 립스틱을 발라 선명하고 또렷한 입술을 연출했다. 립글로스를 약간 덧발라 볼륨감을 더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자는 정교한 화장을 통해 단순히 성인처럼 보이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매력과 성숙함을 극대화했다. 그녀의 화장은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자신이 원하는 원숙미를 완벽하게 연출해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눈이 확 돌아갈 만큼 야한 비키니를 착용했다.
미자와 그 일당은 해변에서 어슬렁거리다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청년들이 나타나면 고급 바나 클럽으로 유인해 값비싼 술과 음식을 주문하게 했다. 그리고 미자는 청년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마치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했다. 청년들이 분위기에 휩싸여 지출을 늘리게 되면, 미자와 친구들은 청구서를 모두 청년들에게 떠넘기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혹은 제법 돈깨나 있는 녀석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들과 며칠 같이 놀아주고 값비싼 선물을 뜯어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은 지독하게 더운 여름이었고, 해가 떨어질 때쯤 민박집에서 나온 미자와 친구들은 먹잇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해변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미끼를 무는 녀석이 없었다. 어느덧 해변 끝자락까지 온 그들, 미자는 웅장한 외관을 자랑하는 조선 비치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호텔 방의 노란 불빛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아! 저런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데 그때, 그들 앞에 코발트 색 외제 차 한 대가 멈추었다. 차 문이 열리고 중년이 한 명 내리더니 미자에게 다가왔다. 그의 차림새는 고급스러움과 세련미를 자랑했다. 얇은 실크 소재의 하얀 셔츠는 그의 피부에 잘 어울리며, 탄탄한 체구가 시원한 바람에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색 슬랙스는 그의 다리를 길고 날씬하게 보이게 하였고, 유럽 디자인의 페니 로퍼는 그의 발을 더욱 우아하게 만들었다. 그의 얼굴은 단정하고 선명한 느낌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검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끼며 그의 얼굴과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예쁘게 손질된 수염은 그의 남성적인 매력을 강조하며, 간결하면서도 잘 정돈된 스타일은 그를 부유하고 세련된 인상으로 만들어주었다. 마치 셀러브리티 같은 외모와 태도는 미자와 친구들의 이목을 삽시간에 끌어당겼다.
“안녕하세요.” 그가 미자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과 열정이 가득했다.
“함께 술 한잔하실래요?” 그는 미자의 친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미자는 그의 예의 바른 말투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설레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사치, 부유함, 고급스러움 같은 것에 유난히 심하게 끌리는 자신을 인정했다.
“좋아요,” 미자가 대답했다. “어디서 마실까요?”
미자는 친구를 남겨둔 채, 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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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의 내부는 넓고 쾌적하며, 벽면에는 어두운 원목 패널과 금빛 장식이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각종 명품 술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워 진열되어 있고 크리스털 유리잔들이 반짝이며 걸려 있었다. 바닥은, 깊은 색상의 카펫으로 덮여 있으며, 곳곳에 놓인 가죽 소파와 고급 체스터필드 의자는 편안함과 함께 품격을 더해줬다.
한쪽 벽면에는 대형 창문이 있어 도시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창문 너머로는 반짝이는 불빛들이 흩뿌려진 도심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미자가 꿈꾸던 바로 그런 사치스러움이 흘러넘쳤다. 낮은 조도의 불빛이 둘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었고, 가벼운 재즈 선율이 배경에 깔렸다.
중년의 남자는 정중했다. 그리고 유식했다. 칵테일 잔이 서로의 손에서 몇 번이고 오갔지만, 남자는 한 번도 미자의 사생활에 관해 묻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존중하는 듯, 그의 대화는 격조 있고 우아했다. 그는 문학, 예술,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며, 그 속에 담긴 지식을 전파했다. 미자는 분위기와 남자의 섬세한 말투와 깊이 있는 통찰에 매료되어갔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깊은 밤이 되었으나, 그들의 대화는 끝날 줄 몰랐다. 도심의 야경은 창문 너머로 더욱 반짝였다. 미자는 남자의 신사적인 태도에 편안함을 느꼈고 동시에 강렬한 설렘을 만끽했다.
남자의 집은 바에서 멀지 않은, 고요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자는 그의 안내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은 넓고 아늑하며, 벽난로가 중심에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거울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고전적인 디자인의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소파는 깊고 푹신해 보였고, 커피 테이블 위에는 몇 권의 고서와 위스키가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명화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에는 책장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책장에는 고전 문학부터 현대 예술 서적까지 다양한 책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창가에 놓인 피아노는 이 집 주인의 예술적 취향을 보여주는 듯했다. 창문 너머로는 달빛이 고요히 들어와 방안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남자는 미자를 소파에 앉혔다. 그의 집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그들의 대화와 어울려 더욱 아름답고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미자는, 이 고급스럽고도 아늑한 공간에서 남자와 함께 평생을 보내고 싶다고 느꼈다. 남자는 거실의 한쪽에 놓인 고급스러운 크리스털 디캔터에서 위스키를 따랐다. 그의 손놀림은 우아하고 섬세했으며, 그가 사용하는 잔은 투명한 크리스털로, 마치 작은 예술품처럼 빛났다. 은은한 불빛 아래, 위스키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잔을 가득 채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잔을 들고 미자에게 다가갔다.
"한잔하시겠어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미자는 미소를 지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잔을 손에 들었을 때, 미자는 차가운 크리스털의 촉감을 느꼈다. 위스키는 향긋한 아로마를 내뿜으며 미자의 코끝을 간질였다.
미자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위스키의 부드러운 맛과 깊은 풍미가 그녀의 입안 가득 퍼졌다. 남자는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며 잔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눈빛이 잠시 마주쳤고, 그 속에는 무언의 이해와 공감이 흐르고 있었다.
미자의 술잔이 절반쯤 비워졌을 때, 자연스레 둘은 껴안고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그리고 곧 서로의 옷을 한풀씩 벗겨 나갔다. 미자는 숨이 턱에 '컥' 하고 걸릴 정도로 황홀함 속에 젖어 들었다. 이때, 남자는 능숙하게 미자의 귓불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속삭이듯 고백했다.
“내 직업은 사실 의사거든…. 그래서 그런데….”
“네?”
미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몰라 살짝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좀 더 재밌는 걸 준비했어…. 잠시만 기다려봐….”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옆방으로 가더니 곧 약상자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왔다. 뚜껑을 열자 그곳에는 일회용주사기와 각종 분말, 투명 용기에 든 약물 등이 들어 있었다. 미자는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이건 누가 봐도 마약이었다. 술이 확 깨고 조금 전까지 누렸던 황홀감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 그는 미자가 당연히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능숙하게 주삿바늘을 통해 투명한 액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자 자 잠시만, 화장실 좀….”
하지만 그녀는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속을 찌릿찌릿하게 파고드는 엄청난 쾌감. 행복감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미자는 그 순간, 알았다. 자기 위스키에도 이미 마약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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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사흘간, 그놈의 농락 뒤에 마침내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저물 무렵의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며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은 고통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녀는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몸부림쳤다. 머리는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무겁고 어지러웠고, 그녀의 근육과 관절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동안의 무차별적 쾌락이 남긴 흔적은 잔인했다. 피부는 창백하고 차가웠으며, 그녀의 손끝은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녀의 입 안은 말라붙어 있었고, 혀는 낯설게 느껴졌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쓴맛은 아직도 마약의 잔재가 그녀의 몸을 지배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시야는 흐릿했다. 그녀는 인제야 자신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공허함과 죄책감이 소용돌이쳤다. 사흘 동안의 쾌락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절망과 후회였다.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한때 그녀를 기쁘게 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집에 돌아왔지만, 가족들은 무심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늘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몇 날 며칠씩 집을 비우고 했으니 그녀가 사흘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그녀가 실토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그때 이후, 꽤 오랫동안 해운대를 찾지 않았다. 시간은 그녀의 상처를 회복시켰고 그때의 어두운 기억은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 느낌만은 변하지 않았다. 한 번씩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 사흘간의 쾌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그 쾌락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일종의 도취감이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던 전율,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고 세상이 더 화려해지는 듯한 착각. 그것은 현실의 고통과 무미건조함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마법과도 같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런 쾌락에 이끌리는 타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내면 어딘가에는 항상 무언가를 갈망하는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일상 속의 작은 기쁨들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종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어쩌면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극한의 쾌락이 아닐까?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강렬한 감정과 감각의 폭풍우.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 나의 본능일지도 모른다고…. 그녀의 그러한 욕망은, 언제든지 그러한 상황이 닥치면, 그녀를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세계로 이끌고 갈 게 분명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은밀히 속삭이는 유혹의 목소리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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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상 위에 차려지기 시작했다. 우아한 도자기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다양한 생선들이 마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광어는 투명한 살결을 자랑하며, 섬세한 칼집이 나 있어 한눈에 그 신선함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에는 붉은 참치가 있었다. 그 붉은 색은 식욕을 자극하며, 입에 넣었을 때의 부드러움을 예상케 했다.
접시 가장자리를 따라 놓인 새우는 갓 잡아 올린 듯 신선했고, 오도독한 식감이 느껴질 듯한 조개류와 해삼도 곁들여졌다. 투명한 해파리는 촉촉하게 빛나며 그 독특한 식감을 예고하고 있었다. 각각의 생선 조각들은 얼음 위에 섬세하게 놓여, 마치 바다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중앙에는 작고 섬세한 잎사귀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붉은색과 녹색의 생강 절임이 컬러풀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간장과 와사비, 레몬 조각들이 작은 그릇에 담겨 있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이 해산물의 맛을 한층 더 끌어올리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바닷바람의 향취를 간직한 이 활어 모듬은, 눈과 코와 입을 동시에 즐겁게 하는 풍미의 향연이었다. 무척 허기진 미자는 젓가락을 잽싸게 들어, 마치 보석을 집어 올리듯 조심스럽게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입 속에 서둘러 집어넣자 생선의 살결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녀는 그 맛의 깊이에 잠시 눈을 감고 감탄을 외쳤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은 채, 오로지 이 풍성한 맛의 세계에 온전히 빠져들고 싶었다.
형석도 마찬가지로 젓가락을 들고 생선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신선한 바다의 맛은 그동안의 피로를 단번에 날려 보내는 듯했다. 그는 미자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미각을 통해 교감하며, 이 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술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들은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생선 조각들 사이에서 술잔을 들이켜며 서로의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한 사람은 운전사, 또 한 사람은 임신부.
형석은 특히 괴로웠다. 그는 이미 알코올 중독 초기 상태였으므로 술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컸다. 특히, 그의 눈앞에 놓인 화려한 해산물들을 보며, 이 모든 맛을 한층 더 끌어올려 줄 술 한 잔이 간절했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찾으려 했으나, 그곳에는 젓가락뿐이었다.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술 한 잔의 여유를 원했다. 눈앞의 음식들이 더없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술이 없는 상태에서 그 맛을 완전히 느끼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술잔을 들고 웃음을 나누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만찬의 완성이었다.
미자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운전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 속에서도 같은 갈망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다 거의 동시에 툭 하고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술 한잔 정도는???”
“그렇죠? 한 잔 정도는 괜찮겠죠?”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는 건지, 아니면 다짐을 하는 건지 혹은 용서를 구하는 건지는 알 순 없지만, 아무튼 그들은 서둘러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은은한 초록빛 병이 테이블에 놓이자, 그들의 갈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듯했다. 미자와 형석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나누었다. 그건 이제 누가 뭐래도 한배를 탄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행위였다. 소주병의 뚜껑을 따는 소리가 작게 울리면서, 그 안에 담긴 희미한 갈증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잔이 채워지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미자는 잔을 입에 대고 천천히 술을 삼켰다. 소주의 알싸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그녀의 가슴 속까지 퍼져나갔다. 형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랜 갈증을 해소하듯 소주를 쭉 들이켰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욕망이 잠시나마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그 잔은 한 잔으로 끝날 운명이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는 점점 더 많은 술병이 쌓여갔다. 술병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그들의 마음속에는 더 깊은 괴로움이 자리 잡았다. 그는 운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순 없었지만, 술의 유혹은 너무도 강렬했다. 술잔을 들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끝없는 갈등이 이어졌다.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소주의 맛이 제공하는 쾌락 뒤에는 죄책감이 따라왔다. 그녀는 배 속의 생명을 생각하며 잔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술을 마실 때마다 잠시나마 현실의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너무도 달콤했다. 그녀는 자기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그 순간의 쾌락에 빠져들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괴로움을 숨긴 채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술병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내면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갈등은 깊어졌다. 그들은 술잔을 내려놓고 서로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의 괴로움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자 미자는 이 순간의 곤란함을 무마할 묘안을 떠올렸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동생의 결혼식에 간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녀의 참석은 일종의 서프라이즈였기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형석은 이미 운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술에 취해 흐릿한 눈빛으로 테이블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상태를 본 미자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자신도 여기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는 형석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석 씨, 우리 그냥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게 좋겠어요.“
형석은 그녀의 말을 듣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술에 취해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미자는 그의 반응을 보며,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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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대리 기사를 불렀다. 목적지는 조선 비치 호텔. 언젠가 꼭 한번은 머물고 싶었던 곳.
특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부드러운 조명이 방 안을 따스하게 감싸 안으며, 고요한 환영의 손길을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실크 커튼이 바다를 향해 드리워져 있고, 창문 너머로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심하게 피곤하였으므로 쓰러질 듯이 침대에 무거운 몸을 눕혔다. 무척 넓은 침대는, 구름처럼 푹신한 베개와 순백의 린넨으로 덮여 있어, 그곳에 몸을 누이는 것만으로도 지친 심신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벽난로 옆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가구들이 우아하게 배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세련된 예술품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놓여 있었다.
형석도 그녀 옆에 풀썩 쓰러졌다. 누가 보면 오래된 부부처럼 느꼈을 것이다. 미자는 검은 바다를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이 순간에는 필섭이 나타난다 해도 깨고 싶지 않았다. 형석도 곧 눈을 감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형석은 술에 취해 피곤했지만, 미자에 대한 미련이 그를 이끌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미자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손길은 그녀의 목선을 따라 어깨로 내려가고, 다시 허리를 지나 발끝까지 이어졌다. 미자는 처음에는 놀라움과 혼란 속에 있었지만, 이내 형석의 손길이 가져다주는 미묘한 쾌감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남편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형석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기운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 안았고, 미자는 마치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본능을 되찾은 듯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미자의 숨결은 점점 더 거칠어졌고, 그녀의 몸은 형석의 손길에 따라 격렬하게 반응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서둘러 옷을 벗었다. 형석의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오래전, 그녀를 탐하던 그 중년 의사를 그리워하듯, 끝없는 쾌락의 심연으로 끌려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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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을 잤을까? 미자는 갑작스러운 갈증에 눈을 떴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은은한 빛이 희미하게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미자는 입안의 마른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서둘러 물을 찾았다. 손을 더듬어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찾아내고, 컵에 물을 따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찬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형석은 여전히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숨소리는 밤의 정적을 깨고,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고동치는 북소리처럼, 그의 코골이는 규칙적이면서도 거칠게 방 안을 메웠다. 숨을 쉴 때마다 침대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소리는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미자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4시 44분.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숫자가 마치 불길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가슴 속에서 두근거리는 불안감이 왈칵 밀려왔다. 그녀는 갈증보다 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침대 옆에 누운 형석의 코골이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그녀의 불안을 더욱 자극하며, 어쩌면 이미 누군가가 그녀의 부재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옥죄어 왔다.
미자는 자는 형석을 흔들어 깨웠다. 형석이 잠에서 깨어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의 눈은 술기운과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석 씨, 빨리 서울로 가야 해." 미자는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그녀의 말에 담긴 절박함이 방 안의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형석은 이 좋은 기회를 그냥 이렇게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미자 씨, 잠깐만…. 지금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아침이 되어야 도착할 겁니다. 새벽부터 문 여는 시장 사람들이 우리를 못 볼 리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러면 어떻게?“
”이왕 이렇게 된 거 푹 쉬고 오늘 밤에 출발합시다. 그게 더 안전합니다.“
”그러다 제가 없다는 게 발각이라도 되면 어떡하라고요?“
”뭐, 핑곗거리야 많지 않습니까. 동생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좀 놀았다고 하거나 친정 부모님이 사정사정해서 하룻밤 잤다고 하거나….“
형석을 얘기를 듣고 보니 제법 그럴싸했다. 벌건 대낮에 시장 사람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가뜩이나 말 많은 그들인데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 것이고 그러면 필섭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당당하게 친정집에서 하룻밤 잤다고 핑계 대는 게 훨씬 안전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두 사람은 좀 더 진지하고 여유롭게 서로의 몸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욕망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미자는 볼을 붉히며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석은 그녀를 살포시 안으며 속삭였다.
”미자 씨, 우리 같이 목욕할까요? 거품 욕조에서.“
*************
한편, 그 시각 은정과 동규는 홍콩 경유 아랍 에미리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동규의 새 근무지는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대형 쇼핑몰 건설에 참여하고 있었다. 동규는 결혼식을 위해 2주간의 특별 휴가를 받아 일주일 전에 한국에 왔다가 지금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신혼여행을 위해 남태평양의 멋진 휴양지를 염두에 두었지만, 은정은 하루라도 빨리 외국 생활에 적응하기를 원했다.
”저에게는 그곳이 신혼여행지나 마찬가지예요. 동규 씨.“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의 바다는 마치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듯, 부드럽고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은정은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행복으로 가득 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은정은 창문 너머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앞으로 함께할 날들을 그려보았다.
은정과 동규의 결혼식은 마을 축제를 연상케 했다. 대도시의 외곽, 바닷가에 자리한 이곳에는 버스 노선이 단 두 개뿐인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흥겨운 소식을 맞아 들뜬 분위기였다. 결혼식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아담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바다 내음이 짙게 깔린 바람이 운동장을 스쳐 지나가고, 투명한 햇살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밝게 내리쬐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하고, 나무들은 축복의 의미로 푸른 잎을 흔들었다. 운동장 한편에 마련된 하얀 천막 아래,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손수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추억들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뛰어놀며 웃음꽃을 피웠고, 어른들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앞으로 함께할 날들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서약을 할 때, 바다 너머에서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마치 자연이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은정과 동규의 결혼식은 그저 두 사람의 결합을 넘어, 마을 전체가 하나 되어 기쁨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은정의 마음 한구석에는 어쩔 수 없는 섭섭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웃고 울던 언니들이 그 중요한 날에 모두 빠진 것이다. 큰언니는 먼 미국 땅에서 힘든 유학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 둘째 언니는 출산일이 가까워서였다.
은정의 마음속에는 바닷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허전함이 일었다. 결혼식의 들뜬 분위기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에서도, 은정은 자꾸만 언니들의 빈자리를 찾게 되었다. 언니를 그리는 마음에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은정은 어릴 적 함께 뛰놀던 바닷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동규는 은정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그리움을 읽은 그는 살포시 은정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은정의 어깨 위에 내려앉자, 마치 안온한 바람이 불어온 듯 은정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은정 씨, 언젠가 우리가 한국에 돌아가면 모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그리워하는 이들을.”
그의 목소리는 마치 달빛처럼 은은하게 은정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동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다의 잔물결처럼 은정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은정은 눈을 감고 동규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으며,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너무 행복해서 그런 거예요. 동규 씨.”
은정은 문득 찾아온 이 놀라운 행복을 변함없이 오랫동안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은정은 순간의 행복에 젖어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 앞에 놓인 운명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그녀가 10여 년의 해외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귀국하면서 서서히 독버섯처럼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