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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Oct 13. 2024

질투의 끝 #2

미자와 필섭

송미자. 조현구의 어머니. 그녀는 평범한 집안의 셋째딸 줄 둘째로 태어났다. 미자의 아버지는 부산시 고급 공무원의 개인 운전사였는데, 1960년대에는 꽤 인기 있고 보수도 괜찮은 직종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무척 성실했고, 취미라고는 해봤자 방파제에 나가 고작 낚시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제법 넓은 마당에 연못도 있고 수동 펌프도 갖추어진 좋은 집에서 살았다.      

미자의 언니는 은자, 동생은 은정이었는데, 세 자매는 어릴 때부터 탁월한 미모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중에서도 셋째딸인 은정이가 가장 예뻤다. 때마침 조영남의 노래 <최진사댁 셋째 딸>이 인기를 끌면서 <송진사댁 셋째 딸>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세 자매의 성격은 판이하였는데, 첫째 은자는 장녀답게 책임감도 강하고 리더십도 있으며 늘 모범적인 행동을 하고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둘째인 미자는 언니와는 극과 극이었다. 마치 물과 기름 같았다. 반항적이고 까탈스러웠으며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그리고 늘 언니와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특히, 동생의 아름다움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자매가 함께 거리를 나서거나, 엄마와 함께 시장을 가거나, 심지어 학교 가는 길에서도 늘 어른들의 시선은 막내 은정이에게 머물렀고, 항상 따라오는 수식어도 은정이가 중심이었다.     

“아이고 우리 세 공주님, 우찌 이리 하나같이 이쁠까! 저 저 우리 막내 초롱초롱한 눈망울 한번 보소! 아이고 마! 양귀비가 울고 가겠네!”      

“우리 막내 공주님, 오늘은 어디 행차하시나?”     

“은정이는 아버지가 서양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다. 콧대가 마 조각 작품인기라!”     

“첫째는 미스 부산! 둘째는 미스 경남! 우리 셋째는 미스코리아 진!”     

이런 칭찬에도 불구하고, 셋째 은정은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라, 잘 따라나서지 않으려고 했으며 설령 같이 가더라도 늘 언니나 엄마 뒤에 숨어서 가곤 했다. 하지만 이웃들은 그런 행동조차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고 기어코 한두 마디는 툭 던지곤 했다. 그 한두 마디가 미자에게는 늘 창끝이 되어 그녀를 콕콕 찔렀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는 독버섯처럼,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지배하는 습한 어둠으로 자라고 있었다.      

*************     

송미자가 그러한 질투의 칼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 은정이가 3학년이었을 때 발생했다. 미자는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동생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그때 당시 엄마는 버스로 20여 분쯤 떨어진 의류 공장에서 미싱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녀 시절, 이 공장에서 줄곧 같은 일을 하다가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최근에 다시 공장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다시 산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남편이 두 달 전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미자의 아버지는 운전 중,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고등학생을 그만 치고 말았는데, 불행하게도 그 학생은 한쪽 다리가 절단되고 말았다.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아들을 보며, 분노한 학생의 부모는 그 어떤 합의도 거부했다.      

미자는, 멋모르고 그저 엄마를 만난다는 감언에 속아 즐겁게 따라나선 은정을 데리고 꽤 복잡한 시장을 지나 마을 입구 쪽, 공단이 시작하는 곳에 세워진 허름한 삼류 극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 동생에게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그만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시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어슬렁거리다가, 집으로 가 언니에게 눈물 콧물을 왕창 쏟으며 동생의 실종을 알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자의 의도와는 반대로, 싱겁게 끝을 맺었다. 극장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는 은정을 본 매표소 직원이 경찰서에 연락했고, 순경을 만난 은정은 자기 집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연못과 수동 펌프. 마당에 펌프가 있는 집은 그 동네에서 미자 집이 유일했다.      

이 일로 미자와 은자는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미자가 아무리 변명해도 은자는 알고 있었다. 미자가 고의로 은정을 버렸다는 사실을.     

이후, 은자는 미자를 철저하게 왕따시켜버렸다. 가뜩이나 모나고 변덕스러운 미자에게 은자의 감시와 무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온통 가시가 박힌 집. 미자는 중학생이 되자마자 일진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반항하였고 고등학생이 되자 반쯤 내놓은 자식이 되었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늦은 봄,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그녀는, 엄마의 비상금을 털어 무작정 서울행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그것이 은자와 미자의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떠난 은자는, 두 번 다시 미자를 만나지 않았다.     

*************     

이른 저녁에 서울역에 도착한 미자는 한껏 들떠있었다. 서울은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이었다. 대합실을 빠져나오자 넓은 광장이 그녀를 반겼다. 그녀를 스치는 수많은 행인과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과 버스 행렬. 그녀는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펼쳐진 낯선 풍경에 매료되어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당최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인파가 많은 곳으로 줄곧 발걸음을 내디뎠다.     

10분쯤 걷자 남대문 시장이 나왔다. 마침 촐촐하던 차에 그녀는 호떡과 붕어빵을 사 들고 시장을 훑은 다음 다시 사람들을 따라 명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꿈꾸고 살고 싶었던 바로 그 장소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다채로운 빛깔의 네온사인이 눈을 사로잡는 곳.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원했던 그녀에게 명동의 거리는 딱 어울리는 무대였다.      

길 위로 쏟아지는 행인의 발걸음은 정열적인 춤사위 같고, 거리를 가득 채운 음악은 그녀의 배경음악이 되었다. 각기 다른 모습과 향기를 풍기는 상점은 은밀한 유혹이었고 중간중간을 차지한 노점상들은 작은 공연장이었다. 그녀는 길을 따라 걸으며 행복감에 젖어 들고 꿈을 꾼 듯, 자신이 운명이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으로 연결되고 예정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자정이 다가오고 가게는 문을 닫고 노점상마저 떠나며 거리의 인파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그녀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많이 돌아다닌 탓에 발바닥 통증도 참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에게는 잠자리가 필요했다. 어느새 막막함이 그녀를 감쌌다. 아픈 발을 떼면 뗄수록 두려움도 쌓여갔다.      

그녀는 그렇게 을지로를 지나 충무로까지 걸어갔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상점의 셔터는 모두 굳게 닫혔고 쓰레기들만 바람에 날렸다. 적막한 가로등 아래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지금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불쑥 나타나 그녀를 겁탈하고 시궁창에 내다 버려도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모를 것만 같았다. 공포가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오늘 밤을 안전하게 넘길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제법 그럴싸한 빌딩 앞에 놓인 세로 입간판에 적힌 문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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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빌딩 현관문을 살며시 당겼다. 천만다행으로 잠겨 있지 않았다.      

*************     

다음날, 행복 미용 안내 직원은 8층 입구 구석에 쪼그린 채, 잠들어 있는 미자를 발견하고 그녀를 깨워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미자는 막무가내였다. 원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녀에게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절박함이었다.      

결국, 늦은 시각에 출근한 원장을 만난 미자는, 재워주고 먹여만 주면 무슨 일이든 시킨 데로 다 하겠다고 사정사정하며 매달렸다. 마침, 복층으로 된 학원 건물 구석 골방에는 간이침대도 있고 작은 전기밥솥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녀는 뜻하지 않게 미용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길이 바로 그녀가 꿈꾸고 소망했던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사실, 미자는 누구보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매일 아침, 마치 화가가 캔버스 앞에 앉아 정밀화를 그리듯, 거울 앞에 앉았다. 손끝 혹은 붓끝에 살짝 묻힌 화장품은 그녀의 얼굴을 하나의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정밀하고 빈틈없는 아이라인과 회개한 꽃잎처럼 붉디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그녀는 터져 나오는 희열을 느꼈다. 그녀의 화장대 위에 놓인 반짝이는 화장품들, 다양한 색의 립스틱과 섬세한 색조 화장품, 향수병들은 그녀의 창조적 혼을 반영하는 도구였다.      

그녀는 외출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고른 옷을 입고, 마치 한 송이의 장미꽃처럼 거리를 활보했다. 그녀는 자신의 꾸미기가 만족스러우면 만족스러울수록 더욱 경쾌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황홀한 눈빛으로 훔쳐보는 뭇 남성들에게 진한 화장품 내음을 풍기며 지나가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내면에는 자신감과 괘감이 쌓여갔다.     

그녀에게 꾸미는 것은 단순한 외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자신조차 컨트롤 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감정의 고저와 그로 인한 내, 외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매일 아침 그녀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나만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나는 은정이보다 더 이쁠 수 있다! 조금만 가꾸면 돼!’     

*************     

미자의 손재주는 훌륭했다. 그녀는 남들보다 빠르게 미용 기술을 배웠다. 천성적으로 게으른 그녀였지만, 이거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절박함이 그녀에게 강한 자극을 선사했다. 그녀의 손끝은 마법을 부리는 듯 섬세하고 정확하게 움직였고, 자신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마치 재야의 숨은 고수인 듯, 그녀의 미용 기술은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정교하고 완벽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원장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명동의 유명 헤어숍인 <김준 뷰티랩>에 취업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노력으로 일군 처음이자 마지막 성과였다. 어쩌면 그녀의 일생에서 그때가 가장 활달하고 보람찬 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미자는, 명동의 번화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7층 창가에서, 고객의 요청을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얼굴형과 피부 톤을 고려하여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을 제안하곤 했다. 그리고 시작하는 그녀의 현란한 손놀림. 그녀의 손끝에서 춤추는 가위는 세밀하고 유려한 움직임을 그렸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경쾌하게 잘려 나간다. 그리고 마무리. 미자는 자신이 완성한 헤어스타일을 잠시 살펴보고 고객을 바라본다. 고객의 얼굴에는 만족의 미소가 번지고 미자는 그 순간, 거울 속 자신의 당당한 모습에 감탄한다. 미자는 고객의 머리를 다시 한번 터치하고 예술가로서 해야 할 역할을 완수한다.      

미자를 찾는 단골이 빠르게 늘었다. 그중에는 대기업 임원 사모님부터 연예인, 모델, 방송인 등등 TV에서만 보던 유명인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한 사람을 고객으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임성희. 그 해 미스코리아였다.      

미자는 먼 훗날, 잘 나타나지 않는 남편에게 지쳐가며 시작한 저녁 반주에, 서서히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취한 목소리로 현구에게 자조하듯 그녀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내뱉곤 하였다.     

“현구야, 임성희가, 미스코리아 임성희가 문을 열고 딱 들어오는데…. 나는 마, 숨이 딱 멎는 줄 알았다니까…. 뭐랄까…. 마치 은은한 달덩이를 안고 들어오는 여신 같다고나 할까…. 마,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눈부신 미모였다니까 글쎄…. 그런데 그녀가 나를 딱 지목하며 내 앞에 앉아 내게 머리를 맡기는데…. 내 손이 떨려 가위를 못 잡았다는 거 아이가…. 아무튼 실크보다 더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를 만지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참말로 선녀가 따로 없는기라…. 참 겸손하고 따뜻한기... 미스코리아 티가 전혀 안 나는 거 있지…. 그러니 내가 지극 정성을 다해 머리를 만질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딱 끝내고 나니까 임성희가 내게 뭐라 한 줄 아나? 응? 정말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이러면서 내게 팁을 주는데 내가 마 그 자리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는 거 아이가…. 부끄럽게 시리….”     

그날 이후, 임성희와 송미자는 동갑내기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그들은 틈틈이 차를 마시며 서로의 경험담을 공유하거나 미용에 관한 지식을 나누곤 하였다. 특히, 임성희는 그녀가 미스코리아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는데, 그것들이 미자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나도 할 수 있어, 내게도 그럴만한 잠재력이 충분해, 나도 조금만 고치면 미스코리아 나갈 수 있을 거야. 나도 임성희처럼 될 수 있어. 나도 은정이보다 더 이쁠 수 있어.’     

임성희는 그녀의 롤모델이자 멘토가 되었고 그녀와의 우정은 미자의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 미자는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성형 수술 비용이 필요했다. 쌍꺼풀 수술부터 코 수술, 전신 수술까지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스코리아가 되어 그녀를 왕따시켰던 언니와 동생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     

건설사와 나이트클럽으로, 70년대까지 엄청난 떼돈을 번 필섭은, 80년대로 들어서자 세간의 이목과 빈정거림이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설사와 나이트클럽은 대표적인 조폭 관련 업종으로 알려져 있고 또 실제로 고향의 많은 건달을 채용한 상태였으므로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좀 더 소프트하고 대중에게 친밀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업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여성 편력이 대단했다. 타고난 골격과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으로 인해, 그의 주변에는 날파리들이 끊임없이 꼬였다. 그는 손쉽게 다양한 종류의 여성들과 잠자리하였고, 이는 <선데이 부산> 같은 주간 대중 잡지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그러니 필섭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그는 좀 더 자연스럽게 멋진 여성과 접촉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섭은 한 골프 모임에서 그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마케팅 용어를 배운다. 영어로 <Premium Pricing> 혹은 <High Pricing Strategy>. 한자로 풀이하자면 <고가 정책 (高價 政策)>. 높은 가격은 소비자에게 좋은 품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브랜드가 고급스럽다는 이미지를 형성하며, 가격 민감도가 낮은 부유층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판매량이 적더라도 높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신생 브랜드가 시장 진입 시 차별화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매력적인 용어가 있을까? 비싸면 비쌀수록 더 잘 팔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사업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곧바로 대표적인 고가 정책 제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명품 패션 브랜드, 고급 시계, 자동차, 애플 같은 전자제품, 화장품, 필기구 등등. 그는 그중에 그의 여성 편력과 부합하면서 동시에 시장 진입이 비교적 낮은 제품 하나를 선택했다. 바로 화장품이었다.     

그는 곧바로 화장품 회사 설립을 기획하고 관련 업종 종사자들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한국 여성들이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에 환장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곧바로 프랑스로 날아갔다. 그는 로레알, 샤넬, 디올, 랑콤, 클라란스, 겔랑, 비오템, 아벤는, 라로슈포제, 까르띠에 등 대표적인 프랑스 화장품 회사를 직접 방문하고 기술 혹은 브랜드 제휴 등을 타진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고급 화장품 브랜드가, 아름다운 여성을 뜻하는 <Belle 벨레> 였다. 그는 우선, 상류층 여성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고급 디자인이 절실했으므로, 업계 최고의 패키지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프로덕트 디자이너, 향수 디자이너를 비싼 값을 치르고 스카우트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제품의 품질도 중요하므로, 그는 우수한 화학 엔지니어, 폼라레이션 엔지니어, 피지컬 테스팅 엔지니어, 향료 엔지니어, 재료 엔지니어 등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자사의 제품을 널리 알릴 마케팅, 특히 브랜드 이미지 마케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이벤트 마케팅의 일환으로 미스코리아, 미스 월드 코리아, 미스 유니버스 대회 및 다양한 지역 미인대회까지 후원하기 시작했다.      

*************     

마침내 송미자는,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성형을 끝내고, 미스코리아 경상남도 지역 예선 선발대회에 참가했다. 그녀는 임성희로부터 패션 경연, 탤런트 경연, 인터뷰 등에 관하여 여러 가지 조언을 듣고 철저하게 준비하였지만, 막상 4주간의 합숙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이 경쟁자들에 비해 이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으며 끼도 없으며 똑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점점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합숙 훈련 기간 동안 치러야 하는, 스피치 훈련, 런웨이 훈련, 피트니스 트레이닝, 개인 멘토링등에서 지속해서 참가자들보다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녀는 점점 불안해졌고 무서워졌으며 고통스러움을 느끼며, 이대로 무너지는 자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저주스럽기까지 하였다.      

그 순간, 그녀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녀의 낮은 자존감을 세워주고 미래의 밝음으로 그녀를 끌어당길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날, 후원 업체 관계자와의 만남에서 그녀는 첫눈에 필섭에 꽂히고 말았다. 그녀는 다른 참가자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필섭에 그녀의 끌림을 표현했다. 필섭 또한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돈은 벌 만큼 번 상태임에도 굳이 화장품 회사를 설립하고 굳이 각종 미인대회에 후원까지 하는 이면에 숨겨진, 그의 욕망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순간이 바로 지금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십 대의 젊고 어여쁜 여인이 육십을 바라보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런 모습 말이다.      

송미자는 예상한 대로 예선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큰 대어를 낚았다. 그녀가 평생 돈 걱정 없이 호의호식하게 하여줄 남자. 필섭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그녀에게 연락했다. 물론 그가 직접 연락한 것은 아니고 마케팅 부서였다. 그녀에게 화장품 광고 모델 제의를 한 거였다. 이건 그녀에게 엄청난 특혜였다. 모델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인에 가까운 송미자를 화장품 광고 모델로 쓴다는 것은 업계의 통념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마케팅 부서뿐만 아니라 광고 제작 업체까지 나서서 반대를 외쳤다. 하지만 광고주, 필섭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리하여 오직 송미자를 위한 화장품 광고 제작이 들어갔다.      

그런데 광고 촬영 장소 및 기간에 대해서도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초에 국내 유명 관광지에서, 길어도 삼사일 정도로 촬영을 끝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폴리네시아나 쿡 제도 같은, 다소 생소한 남태평양의 섬에서 2주간의 촬영을 고집했다. 그는 촬영 팀장을 직접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돈은 얼마 들던지 상관없으니 최선을 다해서 모델이 이쁘게 나오도록 만 하라고…. 알겠제?”     

그리고 필섭은 마케팅팀장을 불러 촬영팀이 묵을 최고급 호텔 예약과 함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송미자는 그때 그 순간을, 틈만 나면 현구에게 읊조렸다.      

“현구야, 너거 아부지가 그때 내 한테 쫄딱 반했던기라…. 물론 나도 싫지는 않았지만…. 내가 화장품 모델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노? 게다가 생전 듣도 보지 못한 폴리네시아를 내가 구경하게 될 줄은 꿈이라고 꿨겠나? 그게 다 너거 아부지가 속셈이 있었던 거지…. 나를 꼬시려고 단단히 작정하고 그래 한기라….”     

광고 촬영한 지 닷새쯤, 필섭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송미자뿐만 아니라 스태프 모두에게 뜬금없이 격려금을 뿌리고 호화로운 식당에서 음식까지 제공했다. 일종의 눈 막음, 입막음 돈이었다. 앞으로 송미자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일체 언론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동의 요청이었다. 눈치 빠른 스태프들이 필섭의 의중을 모를 리 없었다.      

촬영은 일주일 만에 모두 끝나고 스태프들은 돌아갔다. 송미자는 당연히 남았다. 필섭은 큼직한 다이아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했다. 미자가 마다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더 빠진 상태였다.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꿈만 같은 신혼여행을 그곳에서 보냈다. 송미자에게 그 일주일은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후의 삶은, 그야말로 기다림 뿐이었다.      

*************     

필섭이 미자에게 제공한 보금자리는 그녀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큰 시장의 끄트머리, 나날이 확장되어가는 시장 규모를 예측하여 디귿으로 만든, 주상 복합 아파트 5층 별실이었다. 약간 외곽으로만 나가도 크고 멋진 아파트가 수두룩한데 굳이 이렇게 시끄럽고 냄새나는 시장 아파트에 살림을 차린 이유는 하나였다. 필섭이 소유한 시장 상점들 관리를 그녀에게 맡긴 거였다. 이는 그의 사업 철학 중 하나였다. 그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주인은 늘 가까이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사실, 미자에게 상점 관리라는 건 말이 관리지 그냥 다달이 월세 받는 날 찾아가서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세금 납부나 위생 및 안전 규정 준수, 하자 보수 등과 같은 세부 사항들은 필섭의 건설사 직원들의 몫이었다. 다만 한두 번씩, 월세를 몇 달씩 미루는 세입자가 생기면, 필섭을 형님으로 모시는 클럽 직원들이 동원되어 해결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미자에게는, 주변 환경이 좀 못마땅한 것 빼고는 꽤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아파트 외형은 투박하고 단순했지만, 집 내부는 넓고 우아했다. 게다가 마호가니 목재로 만든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운 가구는 유럽의 왕실에서나 볼 법한 섬세하고 우아한 세공이 돋보였다. 방 한쪽에는 푹신한 비단 쿠션이 얹힌 벨벳 소파가 자리하고 있어, 그 위에 앉으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파 앞에는 유리와 황동으로 만든 커피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고급 도자기로 만든 찻잔 세트와 향기로운 커피가 담긴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보랏빛 벨벳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햇빛이 은은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창가 옆에는 소가죽으로 덮인 안락의자가 있었고, 그 옆에는 우아하게 수를 놓은 레이스 식탁보가 덮인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반짝이며 은은한 빛을 뿌려, 방안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집 내부는 사치의 끝판왕이었다.      

송미자는 세입자에게서 월세를 받으면 수첩에 꼼꼼하게 적고, 그 돈으로 생활비와 자신의 사치품 구매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필섭에게 돌려주었다. 다만, 그는 돈을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이 구입한 모든 것에 대한 영수증을 꼭 첨부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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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섭의 숨겨진 애인으로 사는 삶에 적응하며, 임신까지 한 미자는, 자신이 이룩한 이 놀라운 부를 가족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특히 그녀의 성장기 고통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그녀의 동생 은정에게 꼭 뽐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기사가 딸린 럭셔리한 세단에 몸을 실었다. 트렁크에는 가족에게 내밀 온갖 종류의 고급 선물이 가득했다. 자동차는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신나게 달렸다. 그녀는 뒷좌석에 편안하게 앉아, 이제 볼록하게 올라온 자신을 배를 어루만지며, 눈 밖에 난 자식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귀환하는 뿌듯함에 절로 웃음을 흘렸다. 다만 한가지 그녀의 언니, 은자는 여전히 미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보여 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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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만기 출소 후, 직장에서 잘리고 어쩔 수 없이 택시를 몰고 있었다. 그러니 그동안, 수입이 변변치 않아 결국 집도 팔고 부산시 외곽의 산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미자를 실은 차는 구불구불한 산복도로를 돌고 돌고를 반복했다.     

저물녘, 좁고 낡은 가난한 동네로 고급 세단이 천천히, 그러나 당당하게 골목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골목길은 오래된 돌담과 낡은 벽돌집이 양옆을 둘러싸고 있었고,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의 움푹 팬 곳마다 물이 고여 있고 지친 가로등은 흐릿한 빛을 억지로 내놓고 있었다. 차의 광택은 저물어가는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노점에서 채소를 팔던 할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이들은 놀다가 순간적으로 놀란 듯한 눈빛으로, 집 앞에서 빨래를 널던 아줌마는 생소한 눈으로 차의 궤적을 따라갔다.      

차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자 마침내 멈추었다. 문이 열리며 운전사가 뛰어나와 뒷좌석 문을 천천히 열었다. 차에서 내리는 미자는 우아하고 당당했다. 날렵한 하이힐이 닳아빠진 돌바닥을 부드럽게 딛는 순간, 그녀의 존재감은 이 골목을 압도했다. 그녀의 얼굴은 완벽한 메이크업으로 빛났고 붉은 입술은 막 핀 장미처럼 선명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     

동네 주민들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던 가로등마저 그녀를 비추는 듯, 그 빛 아래 그녀는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러나 그들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당당하게 골목을 걸어 파란색 대문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엄마! 저 왔어요! 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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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며, 은정은 집으로 향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오르는 길은 언제나처럼 고단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침내 집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평소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집 앞에 놓인 커다란 고급 세단이 밤의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검은색 차체는 낡고 허름한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을 자랑했다.      

그녀는 잠시 놀라움에 사로잡혀 그 차를 바라보았다. 피곤함에 짓눌렸던 눈이 조금씩 커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다. 이 고급스러운 차는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어떤 연유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의문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조심스레 차 옆을 지나며, 혹시나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손끝으로 차체를 살짝 스쳐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지자,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파란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도 그 사람의 존재는 분명하고 또렷했다.      

은정은 낯선 얼굴을 마주하며 어색하게 미소를 건넸다. 그 사람은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짧은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얽히고설켰다. 고단한 하루의 끝자락에, 낡고 익숙한 집에서 마주한 이 낯선 차와 그 주인은 그녀의 일상을 순식간에 비틀어 놓았다.      

“미자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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