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꽃샘추위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어느 봄날,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은 남자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창밖으로 던졌다. 테이블 위의 커피는 이미 식어버렸고, 그는 빈 잔을 굳게 쥔 손끝에 점점 힘을 주며 시간의 흐름에 대해 애처로운 불만을 삭이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혹시 노병태 씨?”
“네, 맞습니다. 안금자 씨?”
“네. 맞아요. 조금 늦어서 미안해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59분 44초가 막 지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다지 미안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은 어떤 거죠?”
“지금 금자 씨 표정요. 뻔뻔함이 묻었잖아요.”
“초면부터 상당히 공격적인 단어를 채용하시는군요. 노병태 씨.”
“초면부터 공격적으로 만드셨잖아요. 안금자 씨.”
“심리학 전공했어요? 아니면 금강산 선녀 동자보살 출신이세요? 어떻게 제가 뻔뻔한지를 그렇게 콕 집어 소상히 낱낱이 빼곡히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거죠?”
“문일지십(聞一知十) 모르세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첫 만남부터 남의 귀한 시간을 아랑곳하지 않는 가증스러운 태도에 묻어나는 다분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일반적 용어로 우리는 이기적 혹은 개인적이라고 지칭한다는 사실, 모르진 않으시겠죠?”
“속단은 금물, 자뻑은 개쪽이라고 하더니만, 댁이야말로 너무 조급하신 것 아니세요? 제비 한 마리 왔다고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속단하시는 우를 범하시는 댁이야말로 밴댕이 소갈딱지 심뽀 그 자체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뜻하지 않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도 꿋꿋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험난했던, 그 여정을 차분히 앉아 들어보고 느끼고 음미할 심적, 마음의 그릇은 전혀 갖추고 있지 않으시군요.”
“그래요? 그럼 한번 들어봅시다. 그 뜻하지 않은 어려움.”
“제가 왜 당신한테 이 자리에서 굴종과 굴욕을 세트 메뉴로 받아 가며 저의 뜻밖의 고난을 공유해야 하죠?”
“늦음에 대한 변명이 합당한가를, 그 시시비비를 따져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왜 당신의 판단에 의존해야만 하는 거죠? 당신이 뭐 미슐랭가이드 평가원이라도 되세요? 당신이 헌법재판소장이나 대법원장쯤 되세요? 나의 늦음에 대한 수준, 사연의 완벽성, 변명의 개연성과 창의성, 합당한 가치, 통일성에 따라 별을 하나를 줄지 다섯 개를 줄지 왜 당신이 그걸 판단해야 하는 거죠?“
”그거야 당신은 첫 만남부터 늦음에 대한 죄를 지었고 저는 그 죄에 대한 용서 여부를 따질 합당한 근거를 수긍해야만 우리의 다음 데이팅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속만 좁은 게 아니군요. 사회성 결여와 인지부조화, 공감 능력 부족까지 갖추고 계시는군요. 지금 분위기에, 이러한 환경에, 설령 저의 늦음에 대한 적절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손 치더라도,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전제로 한 다음 단계의 데이팅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순조롭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병태 씨.“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할 이유는 또 뭐가 있나요? 설령 당신이 감성에 상처받았다손 치더라도 어디까지나 우린, 고등 인문학을 수료한 지성적 존재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적 판단이 하찮은 자존감의 상처 따위는 충분히 쓰다듬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금자 씨.“
”하찮은 자존감의 상처라고요? 당신에게 자존감은 그저 시궁창에 버려진 불어 터진 라면 한줄기처럼 퍼석할지 몰라도 제게 있어 자존심은 하루를 살아가는 긍지이자 꿈이자 촉진제요 영양제인 것을 모르시는군요.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의 미학을 대표하는 저 유명한 쿠엔티 타란티노 감독이 만드신 그 유명한 영화 <펄프 픽션>이 말하는 내용이 뭔지 아세요? 모든 폭력은 자존심을 건드리며 시작한다. 아시겠어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제 좀 아시겠죠?“
”아무튼 좋습니다. 당신의 중차대한 자존감에 상처를 입힌 점 사과드립니다. 그러니 그 늦음에 대한 사연 한번 들어봅시다. 제가 판단, 비난, 용서 혹은 질책 같은 어떠한 이성적 감성 잣대를 드리우지 않고 순수하게 경청만 하겠습니다. 금자 씨.“
”뭐, 병태 씨가 그렇게 사과를 하신다니 좋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한 삶의 실천을 구가하는 저로서는 마땅히 제가 겪은 기묘한 하루에 대하여 기꺼이, 가감없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전에 차를 주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 네. 무슨 차로 하실 건가요?“
”슈렉 프라푸치노로 하겠습니다.“
”네? 슈렉이라고요? 그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그 슈렉인가요?“
”그건 모르겠고요. 녹차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에 샷을 추가한 후 자바 칩 절반은 갈아 넣고, 절반은 휘핑크림을 올리고요, 엑스트라 휩에 초코 드리즐을 올린 음료에요. 900 칼로리가 넘는 어마어마한 열량으로 '악마의 음료'라고 불리기도 한답니다. 제가 오늘 심히 위험한 감정의 높낮이를 많이 겪다 보니 당이 땅기네요.“
”어쩌다가?“
”이 모든 일은 그놈의 지하철에서 시작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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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서른 중반에 접어든 금자는, 오늘 소개팅을 위해 무척 공을 들였다. 남자의 조건이 좋았다. 유명한 교육자 집안 출신에다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근무했다. 금자는, 이번에는 꼭 이 남자를 물어야겠다는 각오로, 단정하면서도 자신의 미모와 몸매를 과시할 수 있는 유혹적인 옷을 걸쳤다.
고상한 의상은 검은색으로, 오묘한 광택이 비치는 실크 원단으로 제작되었다. 그녀의 피부는 원단의 빛깔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상체는 깊이 파인 네크라인으로 디자인되어 그녀의 우아한 쇄골과 매혹적인 목선이 드러났다. 허리 부분은 세밀하게 조여져 그녀의 곡선을 강조했고, 짧은 스커트의 양옆에는 슬릿이 깊게 파여 있어, 그녀가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드러나는 다리맵시가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그녀의 발목까지 드러나는 하이힐은 은은한 금속성의 광택을 지니며, 발의 라인을 더욱 길고 날렵하게 만들어 주었다. 금자의 얼굴은 짙은 화장으로 돋보였고, 긴 머리는, 걸을 때마다, 물결이 바람에 나부끼듯 가벼웠다. 그녀는 자신을 강렬히 각인시키기 위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신도림역에 내려 환승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지나치는 남자들이 힐끗힐끗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금자는 조금 전부터 자꾸만 신경이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건, 멀쑥하게 차려입은 한 중년의 남자가 자신을 졸졸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줄곧 쳐다보며 걸었다. 마치 그녀를 도촬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자는 뒤통수가 따가운 불안감에 점점 짜증이 섞여갔다. 마침내 금자는 걸음을 멈추고, 그 남자를 째려보며 단호히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아저씨!”
중년 남자는 그제야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자기 행동이 발각된 것을 인식한 순간의 혼란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무언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저를 찍으려는 건가요? 당신은 불법 촬영 및 사생활 침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성범죄로 간주하여 증거품을 압수하겠습니다.”
금자는 남자의 휴대폰을 붙잡으려는 강한 의지로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남자는 민첩하게 몸을 비틀어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화가 난 금자는 다시 손을 뻗어 남자의 팔을 강하게 쳤다. 그 순간, 휴대폰은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들은 그 장면을 정지된 영화처럼 지켜보았고, 순간의 고요함 속에서 휴대폰은 무게를 가득 실은 채로 바닥을 향해 패대기쳤다. 휴대폰 액정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파손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휴대폰은 제 죽음을 예감한 듯, 아름다웠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찰나의 빛을 번쩍이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구경꾼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자는 순간, 미안했지만 도도하게, 망가진 휴대폰을 집어 들고 남자에게 외쳤다.
“경찰서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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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선 상황을 정리하죠.” 경찰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금자 씨가 신고한 내용은 불법 도촬입니다. 증거가 되는 휴대폰은 압수했고요….”
그러자 남자가 조급하게 끼어들었다. “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합니다. 결혼식이 있거든요. 휴대폰을 그냥 지금 열어서 확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경찰관은 침착하게 그의 말에 답했다. “아니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포렌식 절차를 통해 정밀 분석을 해야 합니다. 증거를 삭제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며칠 동안 압수하여 보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뭐? 며칠이나 걸린다고요? 급한 일이 있는데… 저 진짜 빨리 가야 합니다!”
경찰관은 남자의 조급한 태도에 개의치 않고,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증거를 제대로 보존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시겠어요? 당신 휴대폰은 감식반으로 보내서 포렌식 절차를 밟을 겁니다. 이게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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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나온 금자는 급히 약속 시간을 체크했다. 이미 20분이나 지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택시를 불렀다. 금자는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 조급함을 풀지 못한 채 택시 운전사에게 외쳤다.
“아저씨!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복부에 가스가 차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도촬 사건의 후유증인 것 같았다. 그녀는 괄약근을 꽉 조이며 꾸욱 참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차내에서 결코 쉬운 미션이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도시의 찬란한 빌딩을 바라보며, 금자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괄약근을 살살 조절하며 고귀한 가스를 조금씩 방출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그녀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해방감은 순간적으로 기분을 살짝 나아지게 했다. 그렇게 숨겨진 불편함이 점차 가벼워지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조용히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곧 재앙이 닫쳤다.
“저, 저기요. 손님! 아니, 밀폐된 택시에서 끼면 어떡합니까?”
“뭘요?”
“아니, 금방 끼셨잖아요.”
“제가 뭘 꼈다는 거예요? 나 참, 별꼴을 다 보겠네.”
“아니, 냄새가 나잖아요? 안 나세요?”
“무슨 냄새 말이에요? 나 참 오래 살다 보니 별 떨거지 같은 경우를 다 보겠네.”
“아니, 척 보니 그다지 오래 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독가스를 발사하시면…. 그런 건 결례라는 겁니다.”
“결례인지 걸레인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제가 꼈다는 증거가 있어요? 네?”
“아하, 참. 아니 여기 지금 우리 단둘뿐이데 그럼 뭐 귀신이 꼈다는 겁니까?”
“아니, 그러는 아저씨는 안 꼈다는 확증이라도 있으세요?”
“아하, 참. 아니 제가 꼈으면 모른척하지 제가 떠벌리겠어요?”
“여보세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어마무시하게 교훈적인 속담도 못 들어보셨나? 바로 아저씨 같은 분을 일컫는 말이네요.”
“어휴, 말을 말아야지…. 제가 웬만하면 그냥 참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하! 완전 시궁창 구석에서 한 십 년쯤 썩은 냄새가 제 오장육부를 이렇게 지금 뒤틀어놓고 있잖아요. 지금 안 보이세요.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도대체 뭘 드셨길래 이런 오묘한 조합의 악취 아로마가 생성되는 겁니까?”
“아니, 근데 이 아저씨가…. 남이야 취두부에 낫또 바르고 블로뉴 치즈 얹어 홍어를 안주 삼아 수르스트뢰밍 샌드위치로 입가심을 하고 디저트로 두리안을 먹었든 말든 그게 댁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에요? 참, 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참지 못한 택시 운전사가 차를 세웠다. 강제로 하차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높은 빌딩 숲을 걸어서 약속 장소까지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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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제가 왜 늦게 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 제대로 감이 오시죠?”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 성추행범으로 몰린 중년의 남성분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왜요? 가서 혼내 주시려고요?”
“아뇨, 아버지를 찾는 전화가 왔거든요. 결혼식이 이미 시작했는데 주례 선생님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요. 전화도 받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