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내 앞의 세계는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물이 마치 제 존재감을 과시하듯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체 하나하나가 바늘 끝으로 조각된 듯 정확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들의 모서리와 곡선들은 극명하게 대비되어 있어, 눈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준다. 부드러운 곡선조차 차가운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인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그들은 광채를 잃었다. 빛은 그들을 휘감으면서도 표면에서 반사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이지만, 동시에 어둡다. 그 사이에서 그녀의 모습은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어간다. 생기를 잃은 그녀의 형체는 주변의 선명함 속에서 더욱 무색하게 느껴지며, 무너져 내릴 듯한 불안감이 그녀의 존재를 가득 채운다.
햇빛이 내 발 위로 내려앉는다. 강렬한 열기가 금세 피부를 달구며, 바닥으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모처럼 찾아온 무더위다. 공기는 묵직하고, 바람은 어느새 존재를 잃은 듯 완전히 멈춰 버렸다. 멀리서도 느껴질 듯한 정적이 주변을 휘감고, 뜨거운 대기가 짓눌린 듯 고요하다. 나는 연한 보랏빛 비로드 양복 윗도리를 걸치고 있지만, 우아한 색감 속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태양 아래에서는 그 우아함이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로 변해 버렸다. 공기가 닿을 때마다 양복 속에서 천천히 퍼지는 쉰내가 올라온다. 그리고 나의 피로와도 같은 그녀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어딘가 모르게 애처롭고 무기력하다.
운구하는 인부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군중을 가르며 지나간다. 장지까지 따라온 사람들의 무리 속을 헤치고, 그들은 숨 막히는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나기라도 하려는 듯 저마다 그늘을 찾아 흩어진다. 뜨거운 태양 아래, 이 마지막 의식을 마주하기엔 너무도 지친 표정들이다. 관이 조심스레 내 발아래에 놓인다. 그 광경은 묘하게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문구점에서 흔히 보던 필통을 연상케 한다. 관은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는, 오래된 거울이 낀, 누렇게 변색된 옷장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한때는 무언가를 소중히 보관했을 그 옷장은 이제 생명을 거두어 품는 마지막 상자로 변했다. 고요하게 주변을 반사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영원히 닫혀버린 시간, 그리고 더 이상 채워지지 않을 생의 마지막 흔적이다.
제니아는 누워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창백한 얼굴 옆에 어지럽게 얹혀 있다. 관자놀이에 선명한 멍 자국이, 남겨진 고통의 흔적처럼 박혀 있다. 입가에는 마른 거품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그녀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숨결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다. 그녀가 입은 야들야들한 블라우스는 얇고 연약해 보인다. 가슴에는 피가 흘러 검게 변색된 자국이 있지만, 그 위에 낡은 밀짚모자가 덮여 고통을 감추고 있다. 제니아의 잘린 허리는 어설프게 이어졌다. 장의사는 급하게 그녀를 봉합했다. 아래로 이어진 다리는 너덜너덜해져 있고, 낡은 숄이 이를 간신히 덮고 있다.
어린 소녀는 떨리는 손끝으로 작은 화관을 들고 있었다. 화관은 들꽃들로 엮여있었다. 소녀는 화관을 천천히 제니아의 머리 위에 씌우려 했지만, 발작적으로 뒤로 물러서더니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구더기가 몇 마리 기어나왔다.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이런 말을 해본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이 부패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 그리움은 깊은 곳에서 올라와, 나를 전율처럼 휘감는다. 그녀를 향한 절실한 갈망. 허망한 메아리. 그녀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삶은 고통이다. 모든 순간을 잠식한다. 그러나 죽음이 닥치면, 더 이상 아픔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 그나마 그것이 위안일지도 모른다. 나는 감정을 억누른다. 무심한 이방인처럼, 어떤 동요도 없이 주위를 둘러본다. 관을 빙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본다. 슬픔에 잠긴 표정들, 울컥이는 감정 속에 사라진 눈빛들. 그들 속에서 나를 아는 이는 없다. 그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준다. 그들의 슬픔과 나의 존재는 아무런 교차점이 없다. 나는 그들의 눈길 속에서 지워진다.
장례식은 짧게 끝났다. 사람들은 각자 가져온 야생화를 조용히 관 위에 던지며 작별을 고했다. 거동이 어색한 노인들이 몸을 추스르며 하나둘씩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젊은이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죽음이 늘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 날마다 눈을 뜨고 숨을 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언제든지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긴장감이 감돈다. 이러한 사실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지극히 가벼운 삶으로 바꾸어 버렸다. 살고자 하는 욕망. 그것뿐이다.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고상한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오직 현재를 붙잡고 사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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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방은, 폐허로 변한 도시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요 도로에 면한 그곳은, 끝없는 전쟁의 흔적 속에서도 간신히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주변의 고요함은 늘 일그러져 있었다. 혼탁하고 헛된 소음이 공기 중에 끈질기게 떠다니며, 일상의 평온을 무너뜨렸다. 전투용 드론들이 하늘을 가르며 지나갈 때마다, 무거운 진동이 방 안까지 흘러들었다. 장갑차들의 거친 바퀴가 아스팔트를 짓밟고 지나갈 때, 울림은 뼛속 깊이까지 침투했다. 그 소리는 그녀의 거칠고 불안정한 심장 소리와 맞먹는 듯, 공명하며 몸을 흔들고 숨조차 가쁘게 만들었다.
대문과 벽에는 여러 색상의 래커칠이 마구잡이로 흩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덧칠되고 벗겨진 흔적들로 어지럽게 엉키고 뒤섞여, 버려진 공간의 혼란을 드러냈다. 작은 뜰 한쪽에는 비바람에 젖은 옷가지들이 허름하게 쌓여 있었다. 그 옷들은 한때는 누군가의 몸을 감쌌을 것이나, 이제는 의미를 잃고 더러운 잔해로만 남았다. 이 모든 풍경은 그녀의 삶을 둘러싼 사건들이 일어나고, 가라앉고, 변색해가는 것처럼,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듯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조차 모호하게 남은 흔적들이, 이제는 그저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작은 침대에 늘 몸을 기댔다. 그것은 오래된 새장처럼 칸살이 붙어 있어, 그 틀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감옥 같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창을 바라보곤 했다. 창틀을 넘어 들어오는 햇볕은, 빛바랜 색으로 벽과 바닥을 그을리고 흐릿하게 물들였다. 나는 매 순간을 필름에 담아내듯 순간들을 포착하는 방식을 깨닫곤 했다. 빛이 벽을 타고 흐르는 모습을, 작은 먼지 입자가 부유하는 모습을, 창밖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 순간들은 길게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각각 고립된 장면으로 다가왔다. 나는 어딘가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세상은 멈추고, 오로지 나의 시선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비둘기색 커튼은 늘 축 처져 있었다. 그것은 햇빛을 막는 기능도, 아름다움을 더하는 장식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힘을 잃은 채 존재할 뿐이었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색이 바랜 커튼은 바람이 불 때조차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의 고요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금작화 나무는 이미 앙상하게 죽어 있었다. 한때는 생명력을 뽐냈을 나무가, 이제는 마른 가지만 남아 바람에 삐걱거렸다. 그 가지 끝에는 찢어진 깃발이 펄럭였는데, 그것은 저항의 상징도, 자유의 외침도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의 손길에 닿지 못한 채 바스라지듯 잊혀진 시간의 조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멍한 눈동자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시선은 이미 현실을 떠난 지 오래였다. 차갑게 고정된 눈동자는 무엇 하나 담아내지 못한 채, 그저 공허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모든 감각과 감정이 한꺼번에 마비된 듯, 눈동자는 이제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빈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없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나는 늘 그랬듯이 시간의 경계를 잃고 말았다. 모든 시간이 하나로 겹쳐진 그 흐릿한 공간에서, 과거의 그림자와 현재의 불안,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이 동시에 나를 덮쳐왔다. 그 혼란 속에서 고질적인 환상에 사로잡혔다. 현실을 왜곡하고, 나를 끝없는 미로로 인도했다. 특히, 그녀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녀의 모습은 흐릿한 꿈처럼 머릿속을 떠다녔다. 과거의 그녀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고, 현재의 그녀는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미래의 그녀였다. 상상은 종종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그렇듯, 그녀에 대한 기억과 상상, 그리고 끝없는 그리움 속에서 시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음미하듯, 천천히 저미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다가섬에는 진솔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에서 머물렀다. 가까워지는 듯하면서도 손에 닿지 않는 그 거리감은, 나를 더 강하게 이끌었다. 나는 그 틈새에서 흐릿하게 잘린 듯,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경계 너머로는 닿을 수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서성거렸다. 내밀하게 서로 결탁한 색조들이 은밀하게 얽혀,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끌림은 어떤 유혹보다 강렬하고도 집요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므로 시선은 늘 그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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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만나기 직전, 나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 도착했다. 도시에는 겨울의 끝자락이 남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는 무겁고, 하늘은 잿빛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거리 곳곳에 쌓인 눈은 이미 희끗해졌고, 얼어붙은 진창 위로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낯선 기운을 느끼며, 이 도시가 제공하는 신비스러움에 빠져 있었다.
나는 여러 직업을 거쳤다. 주로 몸을 움직이는 일들이었다. 건설 현장에서는 무거운 돌덩이와 철근, 그리고 날카로운 바람과 싸웠다.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무언가를 짓고 또 파괴하였다. 배달부로 일할 때는, 도시의 맥박을 쫓았다. 서둘러야 하는 시간의 촉박함, 누군가가 기다리는 문 앞까지 가는 여정,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잡일들은 그보다 더 소소하고 불분명한 것들이었다. 나는 때로 벽을 칠하고, 때로는 쓰러진 담을 다시 세웠다. 바닥을 쓸고 유리를 닦으며, 도시에 묻혀 떠돌았다. 마치 내 인생은, 그저 생존을 위한 막막한 일들로 이어진 긴 여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보조 조리사 — 이 단어는 내게 낯설고, 무게감은 아직 어깨 위에 정확히 얹히지 않았다. 어색한 정체성처럼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칼을 쥐는 손의 서투름을 느꼈고, 뜨거운 불 앞에서 내 움직임이 부조리하다는 걸 의식했다. 불꽃은 자유롭고 격렬했으며, 내 마음속 불안과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그 속에서 재료들이 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두려움과 경외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칼질이 서툴러서 재료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을 때면, 내 앞에 펼쳐진 재료들이 고스란히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나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물체의 질감, 칼의 날카로움, 그리고 불의 뜨거움—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 순간에 내 존재의 어리석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활기도 없고 확신도 없었다. 그저 이방인의 도시에 살기를 원했지만, 동시에 차가운 이질감을 수용했다. 나는 무의미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잘게 썬 고독이 내 발 아래에서 부서져 나가는 듯했다. 나는 늘 사교나 형식, 관습과 규율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다른 이들과의 대화는 나에게 불편함만을 안겨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빠져들었다. 불필요한 사회적 규칙은 나를 괴롭혔고,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저 자유로운 번뇌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서 방황하고 싶었다. 도시의 거리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곳은 단순히 나를 삼키고, 나를 더 깊은 고독으로 이끌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휴가를 끝내고 출근한 첫날, 나는 감정이 무거운 채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새벽 다섯시가 다가오는 시점, 입구에 몰려 있는 여직원들의 담배 연기 사이에서 낯선 그녀를 처음 봤다. 어두운 하늘과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아직 꿈속의 잔재를 간직하고 있는 듯한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유독 빛나는 존재였다. 머리카락은 금색으로 반짝였고, 미소는 첫 햇살처럼 따뜻하고 상쾌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네, 반갑습니다.” 나는 순간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삭막한 공간 속에서 싹트는 꽃과도 같았다. 그녀는 다른 여직원들과 다르게, 아침의 번잡함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알아보는 듯한 감정이 스쳤고, 그 짧은 교감은 나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이른 아침의 일상에 처음 등장한 그녀는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날의 시작은 단순한 하루가 아닌,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녀와의 첫 대화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나를 향한 따뜻한 초대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나의 존재를 알아주었고, 나를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어딘가에서 격리된 듯한 느낌이 사라지고, 그녀와의 만남은, 고독을 느끼던 나에게 소중한 연결고리처럼 다가왔다. 나는 내 안의 고립감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낯선 도시에 갇혀 있었던 내 마음의 문이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어를 배워야겠다고 느꼈다. 그 언어의 리듬과 억양 속에 감춰진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전해지는 미소와 목소리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열망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또한, 나는 처음으로 뭔가를 주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작은 선물, 그런 것들이 나에게도 가능하다는 희망이 싹텄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작은 것, 예를 들면 사랑스럽고 소중한 의미를 담은 꽃 한 송이나 손수 만든 간단한 간식이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선물이 그녀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처음으로 내 외모를 돌아보고,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고상함에 빠져들었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내 모습이 그녀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했다. 나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변화가 내가 원하는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우리는 번역 앱을 통해 대화를 이어갔다. 가끔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번역이 되었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표현들이 오히려 서로의 웃음을 자아내는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예를 들면, 그녀가 내게 “나는 오늘 기분이 좋다”는 말을 번역했을 때, 앱은 “나는 오늘 기분이 달걀이다.”라고 해석했다. 그 순간 우리는 둘 다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는 의도치 않게 생겨난 말장난으로 대화를 이어갔고, 서로의 문화와 감정을 나누는 특별한 순간들을 만들어갔다. 나는 처음으로 스마트폰이 내게 선사하는 신기술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 작은 기계가 내 손 안에 담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은 정말 놀라웠다. 스마트폰의 화면 속에 펼쳐지는 정보들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 안에는 우크라이나어의 단어와 문법, 문화와 관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기고,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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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아의 순수한 향이 가득했다. 마음속에 닿아 녹아내린다. 도시는 어두워지고 신비롭고, 거리는 차들이 늘었다. 중심가로 향하는 게 분명하다. 다양한 불빛이 창에 스며든다. 그녀의 볼은 연한 분홍빛이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는 밖을 응시한다. 행복하다. 서늘한 공기가 스며든다. 그녀의 갈색 머릿결이 가볍게 흔들린다. 안개 같은 비가 소리 없이 시원하게 흩날린다. 퍼져가는 찬란한 도시의 조명. 나는 그녀에게 줄곧 품어온 풍요로운 연정을 들킬까 봐 조심스레 무표정으로 바꾸려 노력한다. 그녀를 잡은 손에 끈적한 땀이 사랑스럽게 밴다. 투박하고 다소 딱딱한 느낌이지만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가락 느낌이, 좋기만 하다. 차가 신호등에 멈추고 택시 운전사가 뒤를 돌아본다. 풍성한 구레나룻과 자잘한 눈가 주름이 그를 선량한 시민으로 자유롭게 표현한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질문한다. 우아한 그림자를 품은 신비로움과 같다. 제니아의 답변이 곧바로 이어진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머금고 동시에 빠르게 대화를 이어간다. 마법처럼. 차가 다시 움직일 때 나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았다.
“뭐래?”
“당신이 남편인지 물었어요.”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뱄다. 따스한 마젠타색 입술이 합죽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답한 거야?”
나는 잡은 손을 꽉 쥐며 물었다. 기쁨이 물결친다.
“그냥, 뭐, 사실대로 말했어요. 직장동료인데 오늘 첫 데이트를 한다고요.”
청순함, 포근함, 감동적임, 달콤함이 섞여 올라온다.
“그러니까 뭐래?”
나는 그녀를 당긴다. 제니아는 살포시 반항을 이어가다 안기며 눈을 흘긴다.
“혹시…. 호텔 갈 일이 생기면 자기를 다시 불러 달래요.”
“그래서?”
심쿵. 설렘. 두근거림. 이거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도대체 뭐라 표현해야 하나?’
“뭐가 그래서예요?”
“그래서 어떻게 대답했냐고? 제니아.”
나는 그녀의 귓불에 입김을 불어 넣듯이 속삭였다.
“무슨 답을 바라는 거죠? 토마스. 오늘이 우리 첫 데이트란 말이에요.”
애정과 질책을 담은 그녀의 목소리. 나는 열정과 애틋함 속에서 떨고 있다.
자동차는 구도시의 입구로 접어든다. 타닥타닥. 바퀴가 도로와 마주치는 소리가 난다. 제니아는 스치듯 나를 보고, 나의 눈길은 박자와 어우러져 흔들린다. 그녀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속을 후벼판다. 구시가지의 풍경은 마치 작은, 과거의 중세 그림자들이 일렬로 서서 서성거리는 듯하다. 건물들은 군데군데 환향하는 불빛에 의해 강조되고, 길가에는 작은 상점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떠 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이야기의 한 페이지에서, 그녀에 대해 끌림과 어우러져, 흐르는 듯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택시 안에서, 나는 제니아와 함께 도시의 밤을 담담하게 품는다. 도시의 소리와 푸근한 공기가 우리 주변을 감싸는 그 순간을 묘사하고 우리의 여정이 이제 막 시작함을 느낀다.
“하지만 제니아, 우리는 내일 같이 휴가를 냈잖아.”
나는 그녀를 당긴다. 도심을 돌담으로 둘러싼 오래된 건물이 석조 장식물을 품고 천천히 지나간다. 성벽과 성문, 돌다리와 골목, 성당과 광장, 돌단과 아치, 다층 건물, 다양한 돌기둥이 소나무와 함께 우리를 굽어본다. 거리는 마치 화가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물론, 저도 같이 있고 싶어요. 하지만 기숙사에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들이 수군거릴 게 뻔해요. 알잖아요. 말 많고 질투 가득한 계집년들.”
“상관없잖아.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뭘. 이제 숨어서 키스하는 것 정도는 안 해도 되는 시점이잖아? 쉐프도 우리 사이는 이미 알고 있고….”
“그거야 물론 그렇죠. 우리 주변 사람들이야 알아도 상관없죠. 맞아요. 토마스. 하지만 사장이 문제잖아요. 변덕스럽고 고약하기 그지없는 할머니 사장 말이에요. 그녀가 알면 저는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쫓겨날 거예요.”
“사장이 어떻게 알겠어? 일주일에 한두 번 고개만 한번 살짝 내밀고는 금방 사라지는 인물인데…. 심술궂지만 무관심하잖아.”
“오, 토마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여자는 그렇지 않아요. 모두 당신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우리 사이가 탄로 나면 틀림없이 질투에 사로잡힌 누군가가 사장에게 밀고하고 말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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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옷과 머리에 반짝이는 작은 장식들이 도시의 빛에 반사된다. 또닥또닥. 걷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마치 우리 둘만이 이 아름다운 도시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갈림길에는 고요한 분위기를 품은, 빛바랜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이 막아선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함께 우리의 걸음은 느려지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 우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같은 곳은 본다. 향기로운 카페의 냄새와 감각적인 레스토랑의 조명에 이끌린다. 그곳은 마치 이야기를 품은 공간처럼 보인다.
복도로 들어서자 양옆으로 작은 갤러리가 펼쳐진다. 호안 미로의 모조품이 장난스럽게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제니아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군요.”
“마치 우리처럼?”
“맞아요. 우리처럼. 특히 당신처럼.”
“왜 나지?”
“세월을 거꾸로 가고 있잖아요. 여전히 진지하거나 엄숙함과는 거리가 먼 토마스 씨. 마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부산하잖아요.”
“칭찬처럼 들리는데?”
“맞아요. 당신의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아요.”
우리는 멈춘 채 키스한다. 행복이 내려오듯, 모든 세상에 대한 나의 기나긴 기대는, 이제 나를 응용하는 수식으로 담긴 커다란 종용과도 같다. 그녀는 새큰거리는 향을 보내고, 나는 그녀의 거친 코웃음을 남김없이 빨아들일 듯한 자세로 심한 기울어짐의 끌림을 받아들인다.
“여기 담배 재떨이가 있어요. 아마 실내 금연인 것 같아요.”
그녀는 담배를 문다. 나도 문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 하늘거리는 담배 연기. 청색을 띤 연기가 공중을 가득 채우면서 우리 주위는 운명적인 분위기, 내밀한 끌어당김으로 가득 찬다. 그녀의 입에서 흰색 연기가 품어 오른다. 눈앞에서 그려지는 몽환은 마치 색정과 감각적인 갈증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의 세계처럼 보인다. 아무런 응답을 듣지 않아도, 나는 내가 뿜은 만큼의 연기로 인하여, 그 기나긴 더운 여름의 한 조각, 개울에서 보낸 우리의 첫 스킨쉽에 대한 열정과 아픔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엄연한 기분 속으로 빠져든다. 지나친 감정의 기복을 기록한 여정을 쏜살같이 해치울 수 있는 그런 가벼움 말이다. 그래, 그 기억이 즐겁다. 하얀 꽃들이 지나치게 낮아 보이는 그 숲을 지나치자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연스레 제니아의 가슴을 홡았다. 충동과 감각의 욕망을 넘기는 본능은, 그녀가 잠시 주춤거리며 반항의 손짓을 허공에 심으며, 내 뒷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을 때, 비로소 나는 안심으로 파닥거렸다. 물론, 필요치 않은 헛된 행위로, 그 귀한 시간에, 나의 열정을 소모하고자 하는 뜻은 필경 아닐 것이다. 무엇이든 넘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에 상응한 거친 육체적 향연은, 반드시 우리 곁으로 흐르는 삶에 대한 자긍심과 겪어보지 못한 소용돌이 같은 것임은 틀림없다. 특히 새벽으로 이어지는 그 찰나의 황홀함을 수식하는 장식과 우리를 엮어내는 내밀한 동의에 대한 가치는 어쩌면 깨달음의 다른 면으로 삶을 바라보는 식견이 될 것이다.
식탁에 자리를 잡는다. 섬세한 인조 꽃과 캔들이 공간을 차지한다. 온화한 스모그 장식. 고요한 분위기. 테이블보의 모서리에는 고급스럽고 화려한 진주 장식이 수를 놓는다. 와인과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잠시 후, 수프를 홀짝인다. 테이블 위에는 화려하게 놓인 포도주잔과 샴페인 글라스가 향기로운 캔들 불빛에 반짝인다. 검붉은 와인이 우아한 잔에 부드럽게 따라지고, 유리 위에는 와인의 광택이 반영된다. 테이블의 중앙에는 신선한 과일이 가득한 과일 바스켓이 자리하고 있다. 이국적인 맛과 향을 선사하는 열대 과일은 마치 미술작품처럼 탐스럽다. 향긋한 치즈와 여러 종류의 견과류가 작은 접시에 담겨 있다. 작은 디저트 플레이트에는 아몬드가 박힌 초콜릿이 누워 있다. 그들의 조화로운 조합은 미감을 성욕만큼 끌어당긴다. 빵을 찢어 버터를 꾹 찔러 바르고 오물거리며 눈을 마주친다. 밤이 천천히 익어가는 희미한 불빛 아래, 우리는 담배와 와인의 매혹적인 조화에 빠져든다. 와인은 차갑고, 그것을 둘러싼 장식품들은 너절한 속단과 거친 숙면에 대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이 한기의 밤을 속된 아름다움으로 느끼는 속으로 하염없이 거칠게 가고 마는, 너그러운 변칙으로 펼쳐진다.
Kwoon의 음악, <Ayron Norya>가 천장 모서리 네 군데, 까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가슴으로 흘러내린다. 포도주잔을 들고 마시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서로에게 퀭한 미소를 짓고 있다. 와인이 입속으로 스며들면서 순조로운 취기가 우리를 감싸 안는다. 우리의 광채는 서로를 향해 더욱 몰입하게 되고, 절규를 감싸는 처연한 음악은 분위기를 한층 더 강조한다.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의 대화는 짧아지고, 육체적 끌림은 더욱 강해졌다. 감정의 파도가 나의 정수리를 돌고 돈다. 마치 주변의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멈춘 듯하다. 세상은 사라지고 그녀의 하얀 얼굴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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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와 한동안 침묵이 흐르던 그녀와 나는, 담배 연기 속에서 서로를 확인한다. 안개비가 쉼 없이 내린다. 숨소리를 들으며, 담배 피우는 손을 주고받으며 점점 밀착한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그녀의 따뜻한 내음과 담배의 향기는 순간을 장식한다.
“걷고 싶어요.”
우리를 감싼 연기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프게도 뭉그적거리려 허공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불빛은 간간이 도시의 빈 곳을 비춘다. 낭만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나는 그녀를 세우고 강하게 끌어안고 입술에 혀를 세차게 집어넣는다. 감정의 고조와 함께하는 입맞춤. 탄식하며 속삭이는 입술에 비밀스러움이 춤을 춘다. 그녀의 입술은 나와 닿을 때마다, 담배의 미묘한 향과 함께 그녀만의 독특한 맛을 전해준다. 그 순간, 나는 우리의 사랑이 연기 속으로 춤추듯 퍼져나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습한 바람은 우리를 가볍게 감싼다. 나는 그녀에게 더욱 깊게 빠져든다. 담배 연기는 이 감정의 여정을 담아내듯 흩어져 나갔다. 골목길을 따라 걷는 인간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움직임과 그림자는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는 거리의 코너에서 흘러나오는 간간한 음악 소리와 함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차의 경적이 마치 도시의 심장 박동 같았다. 불빛의 이따금 번쩍이는 창문과 가로등은 어둠을 조금씩 밝혀내고는 있지만, 그 어둠은 여전히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건물들은 그림자로 가득 차 있어, 마치 도시 자체가 어둠의 예술작품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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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방이 달그락거리며 자동으로 잠긴다. 끌림은 그녀의 감각적인 육체에 뿌리를 내린다. 그녀의 몸이 이 세계의 경계를 넘어 더 높은 차원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것처럼, 나의 마음은 끊임없는 갈망에 휩싸여 있다. 제니아의 몸은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세계에서 찾은 고요와 조용함의 상징이다. 그녀의 육체는 예술의 걸작이다. 부드러운 곡선이 그녀의 체형을 감싼다. 각 부분은 시적인 우아함과 절제된 조화로 물들어 있다. 피부는 실크처럼 매끈하고, 한 조각 불빛 속에서도 그녀의 매혹적인 형태는 뚜렷하게 감지된다. 머리는 햇살을 담근 금빛 보석처럼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을 둘러싼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섹스를 하였다. 한없이 맴돌아 나가는 사소한 갈등과 절대로 떨쳐버리지 못하는 간결한 끌림과 반항을 애써 무시해버리는 현대인이면 의당 겪는 부조리는, 내가 그녀의 혀를 핥는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 신기하였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2022년 6월 4일. 그녀는 날아든 포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사랑한 지 일 년 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