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낳은 위대한 사상

by 남킹

고통은 육체의 가장 정직한 언어이며, 신(神)이 인간에게 내리는 가장 혹독한 형태의 현존 증명이다. 몽-루이의 요새에 칩거한 루소에게, 이제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적 지옥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살아있는 형벌의 무대였다. 그의 오랜 지병이었던 요도 협착증은, 볼테르의 팜플렛이 그의 영혼에 가한 치명상에 대한 생리적 응답으로, 완벽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毒)의 배출을 거부했다. 소변이라는, 생명 유지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액체의 흐름이, 마치 세상이 그에게 가한 부당한 박해에 의해 그의 정신적 소통 회로가 막혀버렸듯, 물리적으로 차단되고 만 것이다.

매일 밤, 그는 침상에 누워 자신의 방광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끔찍한 압력을 견뎌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몸 내부에서, 댐이 무너지기 직전의 수압처럼,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맹목적인 힘이 축적되는 실존적 공포였다. 그의 아랫배는 돌처럼 단단해졌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으며, 그의 입에서는 고통을 억누르는 신음 대신, 도살장의 짐승과도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카테터(catheter) 삽입이었다. 그것은 매번 반복되는, 지독하게 굴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의식이었다. 그는 테레즈의 부축을 받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자신의 남성성의 가장 깊고 은밀한 통로로, 차갑고 딱딱한 금속 혹은 고무 탐침(探針)이 침입하는 것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 이물질이 요도를 비집고 들어갈 때의 날카로운 통증과, 그것이 방광에 도달하여 마침내 뜨거운 액체를 배출시킬 때의 안도감 섞인 격통. 이 극단적인 감각의 반복 속에서, 그의 정신은 마조히즘적 쾌락의 가능성마저 상실한, 순수한 고문 아래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의사와 기구에 의해 침탈당하고 해부되는 한갓 대상, 한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전락했음을 절감했다.

그는 이 육체적 고통의 프리즘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운명을 해석했다. 그의 막혀버린 요도는, 진리의 자유로운 흐름을 방해하는 당대 사회의 부패와 독단을 상징했다. 카테터의 폭력적인 침입은, ‘코트리’가 그의 영혼에 가하는 부당한 박해의 물리적 재현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든 몸뚱어리 위에서, 인간 조건의 비극 전체가 압축적으로 상연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욥(Job)처럼, 이유 없는 고난을 통해 신의 섭리를 시험하고 있었고, 필록테테스(Philoctetes)처럼, 썩어가는 상처 속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성한 활(그의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육체적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는 마침내 결단했다.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고통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 고통을 잉크 삼아, 이 썩어가는 육체를 펜대 삼아, 세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복수를 감행할 것이다. 세상이 그를 위선적인 아비, 사회 부적응적인 미치광이로 매장하려 드는가? 좋다. 그렇다면 그는, 바로 그들이 그를 공격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여, 그들의 위선적인 세계를 폐허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파멸을,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설계도로 변환시키는, 연금술적(鍊金術的)인 창조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두 개의 원고 뭉치를 나란히 펼쳐 놓았다. 그것들은 그의 두 개의 전선(戰線)이자, 그가 창조할 두 개의 세계였다. 하나는 개인의 영혼이라는 미시우주(microcosm)를,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라는 거시우주(macrocosm)를 다루고 있었다. 『에밀』과 『사회계약론』. 이 두 작품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쌍둥이 나무였으며, 그의 고통이라는 동일한 피를 수액으로 삼고 있었다. 완벽한 인간을 길러내지 않고서는 완벽한 사회를 만들 수 없으며, 완벽한 사회의 틀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완벽한 인간은 완성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의 변증법적(辨證法的)인 결론이었다.

먼저 그는 『에밀, 혹은 교육에 관하여(Émile, ou De l'éducation)』에 집중했다. 이것은 그의 가장 깊은 상처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그는 자신이 버린 다섯 아이의 유령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는 그 죄책감을 부인하거나 합리화하는 대신, 그것을 창조의 에너지로 전유(專有)하는, 가장 대담한 방식을 택했다. 그는 글로써, 자신이 현실에서 되지 못했던 완벽한 아버지가, 완벽한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에밀은 그의 여섯 번째 아이, 그의 잉크와 눈물로 빚어낸, 그의 유일하게 버려지지 않은 아들이었다.

그는 이 새로운 아담(Adam)을, 문명의 타락한 손길이 닿지 않는 완벽한 자연의 자궁 속에서 길러내기로 했다. 에밀의 교육은 ‘소극적 교육(éducation négative)’의 원리를 따랐다. 스승(gouverneur)은 지식을 주입하는 자가 아니라, 아이의 영혼이 스스로를 펼쳐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보이지 않는 정원사다. 스승의 역할은 플라톤의 산파술(maïeutique)과 유사하지만, 이데아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에 잠재된 자연의 선함(bonté naturelle)이 외부의 악(惡)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루소는 스승에게 자신을 투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루소가 아니라, 그가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루소, 즉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자기 통제력을 지녔으며, 아이의 영혼을 투명하게 꿰뚫어 보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이 가상의 스승은, 에밀을 위해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을 창조한다. 에밀은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지 않는다. 그는 넘어지고, 다치고, 배고픔을 느끼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사물의 필연적인 법칙을 배운다. 그가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를 읽는 것은, 문학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고립된 자연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급자족하며 살아남는지를 배우기 위함이다.

이 교육론의 가장 혁명적인 부분은, 도덕과 종교 교육에 있었다. 에밀은 15세가 될 때까지, 선과 악, 신의 존재에 대해 어떠한 교리도 배우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도덕률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는 자연법뿐이다. 그의 종교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을 읽으며 그 속에서 질서와 아름다움, 그리고 숭고한 창조의 힘을 느끼는, ‘자연 종교(religion naturelle)’다. 이는 볼테르의 이신론(理神論)보다 더 급진적이고, 돌바크의 무신론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서 있는, 범신론적 신앙 고백이었다.

그는 이 원고를 써 내려가며, 자신이 버린 아이들에게 속죄하고 있었다. 그는 에밀이라는 완벽한 아들을 창조함으로써, 그들의 비참했을지도 모르는 실제 삶을 보상받으려 했다. 그는 인류에게 완벽한 교육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인 죄를 사회적인 공헌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창조의 행위 이면에는, 끔찍한 자기기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에밀의 교육은 너무나 완벽하고, 스승의 통제는 너무나 전능해서, 오히려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에밀은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스승이 설계한 거대한 시뮬레이션 속에서, 보이지 않는 끈에 조종되는 마리오네트와도 같았다. 루소는 자신의 아이들을 국가라는 추상적인 시스템에 내맡겼듯, 에밀을 ‘자연’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시스템의 법칙 아래 완벽하게 예속시키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신의 역할을 자처하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폭정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에밀』의 원고 옆에는, 『사회계약론, 혹은 정치적 권리의 원리(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의 원고가 함께 쌓여가고 있었다. 두 작품의 집필은 분리된 과정이 아니었다. 그는 에밀이라는 자연인을 길러내는 동시에, 그 자연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유일하게 정당한(légitime) 정치 공동체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출발점은 도발적이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L'homme est né libre, et partout il est dans les fers).” 이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버릴 것인가? 루소의 대답은 폭력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쇠사슬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계약의 체결이었다.

그는 홉스(Hobbes)와 로크(Locke)의 사회계약론을 모두 거부했다. 홉스에게 계약이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피하기 위해, 개인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절대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공포의 계약이었다. 로크에게 계약이란, 개인의 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 제한된 권력을 위임하는, 신탁의 계약이었다. 루소에게 이 두 계약은 모두 인간을 예속시키는, 불법적인 계약이었다.

루소가 제시한 새로운 계약은,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권력을, 공동체 전체에 ‘아무런 조건 없이(sans réserve)’ 양도하는 것이다. 이 급진적인 양도를 통해, 개별적인 의지들의 총합(volonté de tous)과는 구별되는,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라는 새로운 주권자가 탄생한다. 일반의지는 항상 공공의 이익을 향하며, 오류를 범할 수 없고, 절대적이며, 양도 불가능하고, 분할 불가능하다.

이 일반의지에 복종하는 것은, 더 이상 외부의 권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더 높은 의지, 즉 시민으로서의 나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의지에 대한 복종은, 곧 진정한 자유의 실현이다. 여기서 루소는 그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위험한 역설에 도달한다. 만약 어떤 개인이 자신의 특수 의지에 사로잡혀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면, “공동체 전체가 그에게 자유로워지도록 강제할 것이다(on le forcera d'être libre).”

이것은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전체주의의 가장 세련된 정당화인가? 혹은,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선 공동체적 선(善)의 실현을 위한 불가피한 논리적 귀결인가? 루소 자신도 이 위험한 개념의 함의를 완전히 꿰뚫어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박해했던 파리의 ‘코트리’와 같은, 이기적인 특수 의지들의 집합체(붕당, faction)가 공공선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이론적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완벽한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플라톤의 철인왕(哲人王)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Il Principe)와는 또 다른, 신비로운 존재를 요청한다. 바로 ‘입법자(Législateur)’다. 입법자는 통치자가 아니다. 그는 법을 제정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진 뒤, 홀연히 사라져야 하는, 거의 신적인 존재다. 그는 리쿠르고스(Lycurgus)나 칼뱅(Calvin)처럼, 한 민족의 성격(moeurs)을 바꾸고, 이기적인 자연인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시민으로 변모시키는, 초인적인 지혜와 덕성을 지녀야 한다. 루소는 이 입법자의 초상 속에서, 자신을 박해한 타락한 세계를 구원할 구세주로서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은밀하게 그려 넣고 있었다.

그는 몽-루이의 작은 방 안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전복적인 두 권의 책을 완성했다. 그의 육체는 병으로 망가져,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눈은 불면과 과로로 퀭했고, 그의 손은 잉크와 경련으로 뒤틀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여, 이 두 권의 책이라는 골렘(Golem)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그는 이제 텅 빈 껍데기였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그는 자신의 지옥 속에서, 두 개의 유토피아를 빚어냈다.

원고 뭉치는 파리의 출판업자에게 보내졌다. 그것들은 더 이상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상의 판도라의 상자였고, 구체제(Ancien Régime)의 심장부에 설치된, 시한폭탄이었다. 루소는 이 책들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전의 박해는, 앞으로 닥쳐올 폭풍우에 비하면, 여름날의 소나기에 불과할 터였다. 그는 이제 제네바와 파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군주와 철학자, 즉 세상의 모든 권력과 질서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었다.

그는 창밖의 숲을 바라보았다. 숲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인류에게 불(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자연의 권리와, 일반의지라는 새로운 정치적 불)을 훔쳐다 주었다. 이제 코카서스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일 차례였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살아남아, 군주의 왕관을 불태우고, 교회의 제단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명의 불길이 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 죽음과 맞바꾸어, 불멸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는 혼자였다. 그는 악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낡은 세계를 끝장내고 새로운 세계를 잉태시킨, 가장 위대한 창조자였다. 그의 불온한 계약은, 이제 인류 전체와의 계약으로 확장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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