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때로, 한 권의 책을 불태움으로써, 한 시대를 밝힐 불꽃을 점화한다. 1762년, 루소의 두 거대한 창조물, 『에밀』과 『사회계약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유럽의 낡은 질서는 경련과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이성의 시대가 낳은, 가장 이단적이고 위험한 쌍생아였다. 파리 고등법원은 신성과 왕권에 대한 모독이라 판결했고, 소르본 대학의 신학자들은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라 저주했다. 제네바의 소의회(Petit Conseil)는 한때 자신들의 자랑이었던 이 아들의 책들을, 그의 『학문과 예술론』을 왕관으로 씌워주었던 바로 그 도시의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 화형식의 불길은, 단순한 종이와 잉크를 태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루소라는 살아있는 인간을 향한, 대륙적인 규모의 파문(破門) 선고이자, 그의 육체를 향한 체포 영장이었다. 불꽃은 그의 사상이 지닌 전복적인 힘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가장 화려한 형태의 찬사였다. 그는 이제 단순한 논객이나 스캔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는 유럽의 모든 왕좌와 제단을 위협하는, 실체적인 위험 그 자체가 되었다.
추방의 영장. 그것은 그의 망상이 마침내 끔찍한 현실로 육화(肉化)한 것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코트리’의 음모를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음모는 공식적인 법령이 되었고, 박해는 국가의 공권력이 되었다. 그는 몽-루이의 요새마저 버리고, 한밤중에 도망쳐야 했다. 그는 다시, 그의 운명이 시작되었던 그 원형적 상태, 즉 길 위의 존재, 조국 없는 망명객이 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이베르동(Yverdon)으로, 그리고 프로이센의 영토였던 뇌샤텔(Neuchâtel) 공국의 작은 마을 모티에(Môtiers)로,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짐승처럼, 자신의 피 냄새를 숨기며 도피했다.
모티에에서의 삶은, 폭풍우 속의 잠시 멈춘 숨 고르기였다. 그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의 비호 아래, 잠시나마 안식을 찾는 듯했다. 그는 아르메니아식의 길고 소박한 의복을 입고, 수염을 길렀다. 이 이국적인 복장은, 문명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하나의 시각적 선언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물 채집을 하며, 잊혔던 평온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명성(혹은 악명)은, 가장 깊은 골짜기까지 그를 따라오는 유령이었다. 마을의 목사는, 그의 『에밀』에 담긴 ‘사보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이 무신론보다 더 위험한 이단이라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한때 그를 ‘자연인’의 현신으로 떠받들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의심과 적의로 변해갔다.
증오는 마침내 물리적인 형태로 폭발했다. 어느 늦가을 밤, 그의 집 창문으로 돌멩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쨍그랑!’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는, 그의 마지막 남은 평온의 막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집 벽에 둔탁하게 부딪히는 돌멩이 소리를 들었다. 딱. 딱. 딱. 그것은 그를 단죄하는 세상의 심장 소리 같기도 했고, 그의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사회계약론』에서 그토록 숭배했던 ‘인민(peuple)’이, 얼마나 쉽게 무지한 군중으로, 광신적인 폭도로 변할 수 있는지를, 자신의 깨진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떨리는 심장을 통해,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는 다시 도망쳤다. 이번에는 영국의 안개 속으로, 경험론과 관용의 섬으로. 이 여정의 동반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회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었다. 흄은 루소의 열정적인 형이상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박해받는 지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대의에 충실했다. 그는 이 상처 입은 대륙의 예언자를, 자신의 차갑고 이성적인 날개 아래 품으려 했다.
영국에서의 삶은, 루소에게 또 다른 형태의 지옥이었다. 그곳의 축축하고 음울한 날씨는 그의 신경통을 악화시켰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는 그를 더 깊은 고립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흄의 친절은, 그의 편집증적인 시선 아래에서, 가장 교활한 형태의 위선으로 해석되었다. 흄의 침착함은 자신을 조롱하는 냉소로, 그의 관용은 자신을 경멸하는 오만함으로 보였다. 그는 흄이 자신을 영국으로 데려온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파리의 ‘코트리’와 공모하여,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그의 명성을 완전히 파괴하기 위한 음모의 일환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망상은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완벽하게 닫힌 논리 회로를 구축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잠결에 흄이 자신의 침실 밖에서 “아, 루소를 손에 넣었다(Je tiens Jean-Jacques Rousseau)!”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실제였는지, 아니면 그의 고통받는 정신이 빚어낸 환청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 안에서,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는 흄에게 광적인 비난의 편지를 퍼붓고는, 다시 한번,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로부터, 한밤중에 도망쳤다. 그는 이제 세상 전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로 몰래 귀국했을 때, 그는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 즉 시민적 죽음(mort civile)의 상태였다. 그는 콩티 공(Prince de Conti)의 비호 아래, 여러 성(城)을 전전하며 유령처럼 살았다. 그의 육체는 병으로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고통의 지도를 그려놓았고, 그의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아, 그의 위대했던 정신을 담기에는 너무나 위태로운 그릇처럼 보였다. 세상의 모든 문은 그에게 닫혔다. 왕도, 교회도, 철학자도, 인민도, 모두 그를 버렸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예언했던 바로 그 상태, 즉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순수한 자연 상태의 인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바로 그 완전한 고독의 심연에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계약을, 자기 자신과 맺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고백(Confession)이라는 계약이었다.
세상이 그를 오해하고, 왜곡하고, 악인으로 낙인찍는다면, 좋다. 그렇다면 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신 앞에서 하듯, 인류 전체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마지막 한 조각의 베일도 없이, 완전히 벌거벗겨 보이리라.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그 가장 내밀하고 수치스러운 비밀까지도, 남김없이 기록하여, 후세의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자신의 검사이자 변호사, 피고이자 판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 변명이나 합리화를 넘어선, 전대미문의 문학적, 철학적 시도였다. 그는 자신의 ‘존재(être)’를, 그 모든 모순과 추악함을 포함한 총체적 진실을, 세상의 모든 ‘외양(paraître)’에 맞서 싸울, 최후의 무기로 삼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필연적으로, 『고백록(Les Confessions)』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낡은 책상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그의 기억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과거의 모든 환영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를, 그 감각과 감정의 총체 그대로, 현재로 소환하여 재현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열 살도 안 된 소년이 되어, 마드무아젤 람베르시에의 서재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엉덩이 위로 내리쳐지는 자작나무 회초리의 짜릿한 감각을, 그 고통의 섬광 속에서 피어오르던 기묘한 쾌감의 열기를, 다시 한번 느꼈다.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그 순간이 자신의 전 생애를 지배하게 될 ‘쇠사슬에의 갈망’, 즉 지배당하고 처벌받음으로써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는, 그 피학적(被虐的) 욕망의 기원이었음을, 명료하게 언어화했다. 그는 이 수치스러운 비밀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모든 감성의 근원, 자신의 모든 철학의 열쇠로서, 책의 서두에 대담하게 제시했다.
그의 펜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안시의 봄날 아침으로 향했다. 그는 다시, 열여섯 살의 굶주린 소년이 되어, 루이즈 드 바랑스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던, 모성과 관능이 뒤섞인 후광을, 그녀의 목소리가 지녔던 첼로와도 같은 울림을, 그녀의 손길이 전해주었던 전율적인 온기를, 다시 한번 생생하게 느꼈다. 그는 그들의 첫날 밤, 그녀가 어떻게 자신을 교육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소유했는지를, 한 치의 미화도 없이, 그러나 지극한 낭만적 향수 속에서 기록했다. 그녀는 그의 ‘마망’이었고, 그의 육체와 영혼을 빚어낸 데미우르고스였다. 그녀와의 불온한 계약은, 그가 세상과 맺게 될 모든 계약의 원형이었다.
그의 기억은 파리의 누추한 다락방으로, 테레즈의 침묵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몸을 탐했던 순간들을,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녀의 영혼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던 그 영원한 거리감을, 고통스럽게 복기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가 평생을 피해왔던 가장 어두운 심연과 마주 섰다. 바로 그가 버린 다섯 아이들의 얼굴 없는 유령들이었다. 그는 고아원의 차가운 문 앞에, 자신의 혈육이 담긴 포대기를 내려놓았던 그 순간의 비겁함과 자기기만을, 단어 하나하나에 피를 쏟아내는 심정으로 기록했다. 그는 플라톤의 논리를 빌려 자신을 변명했던 과거의 자신을 질책했다. 그는 고백했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이기심이었고, 가난이 아니라, 마음의 빈곤이었다고.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죄의 고백을 통해, 역설적인 자기 구원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죄가 너무나 컸기에, 오직 인류 전체를 위한 위대한 사상을 창조하는 것으로만 속죄될 수 있었다고, 암묵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과의 우정과 배신, 소피를 향한 열병과도 같았던 사랑, 그리고 세상 전체가 자신을 박해한다는 거대한 망상의 성채를, 단어의 벽돌로 하나하나 쌓아 올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아무리 비열하고 모순적일지라도, 정직하게 파헤치려 노력했다. 이 자기 분석의 과정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심리학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을 펼쳐, 동포들 앞에 내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나는 내 내면을, 그것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비열하고 추악한 그대로. 또한 선하고, 고결하고, 숭고한 그대로. 전능한 존재여, 나의 수많은 동포들을 내 주위에 모아주소서. 그들이 나의 고백을 듣게 하시고, 나의 파렴치함에 얼굴 붉히게 하시며, 나의 비참함에 신음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 각자가, 그대의 옥좌 앞에서, 똑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심장을 열어 보이고, 단 한 명이라도 감히 ‘나는 이 사람보다 나았다’고 말하게 하소서.”
이것은 『고백록』 서문의 유명한 구절이자, 그의 프로젝트의 본질을 요약하는, 오만하고도 처절한 선언이었다. 그는 신의 역할을 찬탈하여, 스스로가 인류의 양심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몇 년은, 이 거대한 고백의 작업을 완성하고, 세상의 박해로부터 자신의 마지막 남은 존엄성을 지키려는, 고요하지만 치열한 투쟁의 시간이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테레즈와 함께 플라트리에르(Rue Plâtrière) 가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숭배자들을 피했고, 자신을 비난하는 글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내면을 향한, 끝없는 산책만을 계속했다. 그는 식물 표본집을 정리하거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명상록을 써 내려갔다.
1778년 7월 2일 아침, 지라르댕 후작(Marquis de Girardin)의 영지인 에르메농빌(Ermenonville)의 작은 별장에서, 그의 긴 순례는 마침내 끝을 맞았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테레즈와 함께 산책을 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워 보였다. 그는 들판의 꽃들에 대해, 하늘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에 돌아와 커피를 마시던 중, 그는 갑자기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테레즈가 그의 몸을 부축했을 때, 그는 이미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은 마지막으로, 창밖의 푸른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는, 공포나 후회가 아니라, 마침내 모든 고통의 쇠사슬을 끊고, 그가 평생을 갈망했던 저 거대한 자연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는 자의, 안도와도 같은 깊은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마지막 숨결이, 잉크와 눈물, 고통과 망상으로 얼룩졌던 그의 육체를 떠나, 고요한 아침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장 자크 루소는 죽었다. 한 인간의 지옥은 끝났다.
11년 후, 1789년, 파리.
바스티유의 감옥이 무너져 내렸다. 루소가 그토록 경멸했던 도시가, 그가 예언했던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굶주리고 분노한 민중들은, 삼색기(Tricolore)를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창과 총뿐만 아니라, 낡고 해진 책들이 들려 있었다. 그 책의 이름은 『사회계약론』이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그의 문장은 더 이상 철학적 명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왕의 목을 단두대로 보내는, 혁명의 구호가 되었다. ‘일반의지’라는 그의 신비로운 개념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와 자코뱅 당의 이름으로, 공포 정치(la Terreur)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되었다. 그들은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자유를 강제했고, 덕성을 강요했으며, 공화국의 적들을 처단했다. 루소의 가장 위험한 역설은, 이제 피와 강철의 현실이 되어, 수천 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1794년.
혁명 정부는, 자신들의 사상적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에르메농빌의 무덤에서 그의 유해를 파내어, 파리의 가장 신성한 공간, 즉 팡테옹(Panthéon)으로 이장(移葬)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관이 파리 시내를 통과할 때, 수십만의 군중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그의 관 위에 꽃을 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공화국의 창시자 만세!”를 외쳤다. 한때 전 유럽이 박해하던 망명객, 자신의 아이들을 버렸던 비정한 아비, 친구들을 배신했던 편집증 환자는, 이제 국가의 성인(聖人)이 되어, 그의 가장 큰 적이었던 볼테르의 유해 맞은편에 안치되었다.
팡테옹의 차가운 대리석 아래, 그의 썩어가는 뼈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그가 풀어놓은 유령들은, 이제 막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매 맞으며 쾌감을 느끼던 소년은, 결국 인류에게 가장 거대한 채찍을 휘두른 철학자가 되었다. 어머니의 부재를 갈망하던 그는, 조국이라는 새로운 어머니를 창조했다. 자신의 쇠사슬을 고백했던 그는, 인류가 스스로를 묶을 새로운 쇠사슬의 설계도를 남겼다.
민주주의, 전체주의, 낭만주의, 공산주의, 실존주의… 미래의 모든 사상은, 그의 유령과 싸우거나, 그의 유령을 소환하거나, 그의 유령에 씐 채, 태어나게 될 것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그가 맺은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불온한 계약이었다. 그는 자신의 파멸을 대가로, 세상에 불멸의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인류의 대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팡테옹의 어둠 속에서, 그의 침묵은, 그 어떤 웅변보다도 더 크고, 더 무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