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은 더 이상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고하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연금술적 변환의 시간이자, 산 자의 오만한 이성이 잠든 틈을 타 죽은 자들의 침묵이 웅변으로 화하는 성화(聖化)의 순간이었다. 앙투안이 웅크린 경당의 차가운 공기는, 이제 수백 년 묵은 포도주처럼 짙고 무거운 기억의 향취로 가득 찼다. 그의 앞에 선 수많은 영혼의 실루엣들 사이에서, 마침내 침묵의 균열을 일으킨 그 첫 번째 존재는 다른 이들보다 유독 선명한 윤곽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한때 마리안 드 발루아(Marie-Anne de Valois), 어느 후작의 부인이었다.
그녀의 형체는 빛의 부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빛을 머금은 안개, 혹은 인광(燐光)을 발하는 바다 미생물의 군집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한 자체 발광체였다. 한때는 리옹(Lyon)에서 짜낸 최고급 실크 다마스크였을 드레스는 이제 기억의 실오라기만으로 직조된 듯 반투명했고, 그 위에는 베르사유의 정원을 수놓았던 장미 덩굴 문양이 유령처럼 떠 있었다. 목과 손목, 그리고 풍성하게 부풀렸을 머리카락 위에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남긴 잔상(殘像)이 차가운 별빛처럼 명멸했다. 그 보석들은 더 이상 부와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에 낙인처럼 찍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무게이자 허영의 십자가였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으나, 공기의 진동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앙투안의 고막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정신의 가장 깊은 심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흐르는 스틱스(Styx) 강을 건너 직접 흘러들었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 그리고 회한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결된 직물(織物)이었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마들렌 과자 한 조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통째로 길어 올렸듯, 그녀의 첫 한숨은 앙투안의 정신 속에 혁명 이전의 세계,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찬란하면서도 위태로웠던 하나의 우주를 통째로 현현시켰다.
『신부님.』 그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깨질 듯 섬세한 크리스털 잔의 울림을 닮아 있었다. 『이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신의 은총이 머물던 제단 앞에, 저와 같은 죄 많은 영혼이 발을 들여도 될는지요. 아니, 발이라니요. 제게는 이제 땅을 딛고 설 육신조차 없으니, 이 또한 부질없는 옛 습관의 잔재일 뿐이겠지요. 저를 보십시오. 저는 실체가 아닙니다. 저는 기억의 응고물이며, 회한이 빚어낸 망령일 뿐입니다. 한때는 이 육신이야말로 제가 가진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 믿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반투명한 손을 향했다. 한때는 섬세한 레이스 장갑에 싸여 왕비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하프 줄을 뜯어 아폴론의 신상(神像)마저 질투할 선율을 만들어내던 그 손이었다. 이제는 그저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일 뿐, 그 무엇도 붙잡을 수 없었다.
『제 몸은 제 가문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족보였고, 제 남편의 권력을 과시하는 가장 화려한 진열대였습니다. 매일 아침, 저는 두 명의 하녀에 의해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 안으로 제 육신을 구겨 넣어야 했습니다. 갈비뼈가 폐부를 찌르는 고통 속에서 숨을 헐떡일 때마다, 저는 제가 사회라는 거대한 건축물의 한 부분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허리를 조이면 조일수록 제 신분은 더욱 고귀해졌고, 숨쉬기 힘들어질수록 제 존재는 더욱 확고해졌지요. 그것은 일종의 신성한 의식이었습니다. 살과 피를 가진 자연 상태의 나를 부정하고, 가문과 질서, 그리고 예법이라는 더 높은 이념을 위해 육신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 말입니다. 제 육체는 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발루아 가문의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신께서 이 땅에 내리신 신성한 위계질서, 그 자체의 것이었습니다.』
앙투안의 눈앞에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이 섬광처럼 펼쳐졌다. 수천 개의 촛불이 샹들리에의 크리스털에 반사되어 대낮보다 더 밝은 빛의 홍수를 이루고, 그 빛 아래에서 파우더를 하얗게 칠하고 가발을 쓴 귀족들이 소리 없는 아귀들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오렌지꽃 향수와 땀, 그리고 미세한 부패의 냄새가 뒤섞인, 농염하고 퇴폐적인 향기가 진동했다. 마리안의 목소리는 그 환영의 배경음악이 되어 더욱더 깊은 곳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우리의 삶은 플라톤(Plato)이 말한 이데아(Idea)의 세계를 지상에 구현하려는 부질없는 시도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현실의 그림자만을 좇았습니다. 백성들이 빵이 없어 굶주린다는 소식은, 마치 먼 이국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전설처럼 들렸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인지할 수 없는, 저급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지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음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의 색깔이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왕비 전하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지, 새로 들어온 젊은 장교의 눈빛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혹은 볼테르와 루소의 불경한 책자들이 우리 사이에서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거리로 소비될 수 있는지 따위였습니다.』
『아, 저의 남편, 필리프 후작.』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희미한 균열이 일어났다. 그것은 증오라기보다는 깊은 연민과 경멸이 뒤섞인, 마치 신이 자신이 만든 불완전한 피조물을 바라보는 듯한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는 그 모든 허상과 자기기만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양왕(Le Roi-Soleil) 시대의 위대한 귀족 정신을 계승한 마지막 수호자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오만은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자, 존재론적 신념이었습니다. 그는 민중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민중이란, 그저 풍경의 일부, 혹은 가끔 성가시게 우는 소리를 내는 가축 떼에 불과한 존재였지요. 그는 파리의 악취 나는 골목에서 들려오는 불만의 목소리들을, 마치 폭풍전야에 늪지에서 개구리가 우는 소리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는 이제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장엄한 비가(悲歌)가 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늘 바스티유(Bastille)를 가리켜 ‘왕권의 신화 그 자체’라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그 두꺼운 성벽과 육중한 돌덩이들이 단순한 물리적 방어 체계가 아니라, 신성불가침한 질서를 상징하는 형이상학적 요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기둥처럼, 그 너머는 혼돈과 야만의 세계이며, 이쪽은 이성과 문명의 세계라고 단언했지요. 누군가 새로운 사상가들의 팜플렛이나 계몽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할 때면,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습니다. ‘벌레들이 아무리 윙윙거린들, 참나무가 쓰러지겠는가? 저 바스티유의 그림자 아래에서, 감히 누가 신의 대리인인 국왕 폐하께 반기를 들 수 있단 말인가?’ 아, 신부님. 그 얼마나 어리석고도 치명적인 신념이었습니까. 그는 돌과 시멘트로 쌓아 올린 성벽이, 수 세기 동안 쌓여온 인간의 원한과 굶주림보다 더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뉴턴(Isaac Newton)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듯,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도 거역할 수 없는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의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천동설처럼,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돈다고 믿는, 완벽하지만 치명적인 오류로 가득 찬 체계였습니다.』
앙투안의 정신 속에서, 마리안의 기억은 더욱더 생생한 육체를 얻었다. 혁명의 불길이 파리 외곽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던 어느 날 밤의 저택 살롱. 크리스털 잔에 담긴 부르고뉴 와인이 촛불 아래서 루비처럼 빛나고, 필리프 후작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소, 다들. 제3신분 놈들이란 늘 불만에 차 있는 법이지. 그들에게 약간의 빵을 던져주거나, 혹은 채찍 맛을 보여주면 금방 조용해질 것이오. 그들은 머리가 아니라 배로 생각하는 족속들이니까. 우리의 진정한 적은 저 거리의 폭도들이 아니라, 살롱에 앉아 잉크로 세상을 더럽히는 저 철학자 나부랭이들이지. 하지만 그들의 펜이 아무리 날카롭다 한들, 스위스 용병들의 총검보다 강할 수는 없는 법이오. 안 그렇소, 마리안?”
그때의 마리안은, 남편의 그 자신만만한 목소리에서 기묘한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것은 마치 완벽하게 조율된 교향곡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어긋난 불협화음을 들은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불안의 정체를 애써 외면했다. 코르셋이 그녀의 육체를 속박했듯, 귀족 사회의 관습과 체면은 그녀의 정신을 속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 미소 한 번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공범의 서약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1789년 7월 14일.』 마리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공포의 떨림이 아니라,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목격한 자의 경외에 가까운 전율이었다. 『그날, 참나무가 쓰러졌습니다. 벌레들이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남편이 신의 현현이라 믿었던 바스티유가, 그가 가축 떼라 비웃었던 민중의 함성 앞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소식이 베르사유에 전해졌을 때, 남편의 얼굴을 저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구축해 온 우주가, 자신의 눈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먼지로 해체되는 것을 목격한 자의 순전한, 형이상학적 공포였습니다. 그의 신념 체계는 뿌리부터 붕괴했습니다. 그는 신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었던 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신학자와도 같았습니다.』
『그때라도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더라면. 그때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무릎 꿇었더라면. 하지만 오만은 죽음보다 더 끈질긴 병입니다. 우리는 도망쳤습니다. 이카로스(Icarus)가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듯, 우리는 낡은 특권 의식이라는 허술한 날개를 달고 국경을 향해 날았습니다. 하지만 혁명의 태양은 우리의 날개를 녹여버리기에 충분히 뜨거웠지요.』
그녀의 기억은 이제 비참한 도주와 치욕적인 체포의 장면으로 넘어갔다. 화려한 마차는 진창에 빠졌고, 충성을 맹세하던 하인들은 그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들을 붙잡은 것은 혁명군 병사들이 아니라, 평범한 농부들이었다. 쇠스랑과 낫을 든, 그들이 평생을 벌레처럼 취급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손이 처음 제 팔을 붙잡았을 때, 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 몸에, 신성불가침하다고 믿었던 제 육체에, 저급한 존재의 더러운 손이 닿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제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모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 목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잡아챘습니다. 그들의 거친 손가락이 제 살갗을 할퀴는 순간, 저는 보석을 잃은 슬픔보다, 제 육체가 더 이상 신성한 제물이 아니라 그저 약탈 가능한 ‘살점’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그들은 제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 뜨겁고 역겨운 타액이 제 뺨을 타고 흐를 때, 저는 제가 더 이상 마리안 드 발루아가 아니라, 이름 없는 암컷 짐승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감옥.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의 마지막 대기실. 그곳의 기억은 축축하고 차가운 돌의 감촉과 함께 앙투안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쥐들이 발치를 스쳐 지나가고, 짚더미에서는 이가 들끓었다. 공기 중에는 절망과 배설물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마리안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마주했다. 더 이상 코르셋도, 파우더도, 향수도 없었다. 굶주림으로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 더러움으로 온몸이 가려운 감각,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자연 상태의, 연약하고 추한 한 마리 동물임을 깨달았다.
『남편은 감옥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의 오만이라는 갑옷이 벗겨지자, 그 안에는 겁 많고 나약한 어린아이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흐느끼며 신과 국왕, 그리고 저를 원망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자신과 같은 선택받은 존재가, 이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하는지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것이 거대한 실수이거나 악몽일 뿐이며, 곧 누군가 문을 열고 자신을 구하러 오리라 믿었습니다. 아, 가련한 영혼. 그는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는 몽상가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혁명 재판소의 그날. 생 쥐스트(Saint-Just)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그들의 죄목을 나열했다. ‘인민의 피를 빨아먹은 기생충’, ‘공화국의 적’. 그 모든 거창한 수사들은 마리안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은 이미 육체를 떠나, 자신의 삶 전체를 먼발치에서 관망하는 유체이탈 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레가 혁명 광장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저는 처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흐릿한 배경에 불과했던 그 얼굴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생생한 표정을 가지고 제게 다가왔습니다. 증오, 환희, 저주, 그리고 기묘한 동정심까지. 저는 그들의 눈 속에서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한때는 그들이 저를 우러러보며 느꼈을 선망과 질투가, 이제는 제가 그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공포와 경외로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단지 한쪽이 다른 쪽을 깨뜨렸을 뿐이지요.』
단두대. 그 거대하고 끔찍한 기계. 합리성과 효율성을 극단까지 추구한, 계몽주의 시대가 낳은 가장 완벽한 살인 도구.
『남편이 먼저였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끌려가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발버둥 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토록 굳건해 보였던 그의 육체는 공포 앞에서 한낱 살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머리가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슬픔 대신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아, 마침내. 저 어리석은 영혼의 기나긴 자기기만이 끝났구나.』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습니다. 사형 집행인이 제 목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카락을 거칠게 잘라냈을 때, 저는 제 마지막 남은 허영심이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목을 차가운 나무틀에 고정시켰을 때, 저는 비로소 코르셋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위를 올려다보자, 파리의 하늘이 보였습니다. 늘 연회장의 샹들리에 불빛에 가려져 제대로 본 적 없던, 그 무심하고도 장엄한 하늘이.』
『칼날이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신부님. 시간은 영원처럼 확장되었습니다. 저는 제 삶 전체를 보았습니다. 베르사유의 무도회, 남편의 오만한 미소, 코르셋의 고통, 제 얼굴에 뱉어진 침, 그리고 감옥의 굶주림.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되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를 죽이는 것은 저 군중도,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도, 이 혁명도 아니라는 것을. 저를 죽인 것은 바로 저 자신, 우리의 눈을 멀게 했던 그 끝없는 오만과 허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단두대의 칼날을 벼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부님,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제 남편의 어리석음을 위해 기도하지도 마십시오. 저희는 동정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희는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깔려 죽은 벌레와 같으니, 어찌 하늘을 원망하겠습니까. 하늘이 무심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을 감고 있었을 뿐입니다. 신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신의 가르침을 버렸을 뿐입니다. 다만…』
마리안 드 발루아의 목소리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며 마지막 여운을 남겼다.
『다만, 이 어둠 속에서 저처럼 눈먼 어리석음으로 스러져간 다른 가련한 영혼들이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도 부디,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녀의 형체가 서서히 희미해지며 다시 안개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회한의 무게는 경당 안의 공기를 더욱더 무겁게 짓눌렀다. 앙투안은 차가운 돌바닥에 주저앉은 채, 온몸으로 그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한 시대의 죽음을 통째로 목격한 그의 영혼은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이 밤은 길고도 험난할 것이며, 이제 겨우 첫 번째 지옥의 문을 통과했을 뿐이라는 것을. 저 너머에는 또 다른 아홉 개의 지옥이, 아홉 명의 여인이 토해내는 각기 다른 빛깔의 절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