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나무(Arbor vitae), 즉 린네가 분류했던 장엄한 계통수의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인간이라는 종(種)은, 제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즉 ‘슬기로운 인간’이라 명명하는 오만을 저질렀다. 이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신성한 표지이며, 역사는 그 이성이 점차적으로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헤겔과 그의 아류들은 설파했다. 그러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이성은 ‘의지(Wille)’라는 거대하고 맹목적인 주인을 섬기는 교활한 하인에 불과했다. 인간의 모든 문화, 종교, 철학은 이 끔찍한 진실, 즉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의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정교하고도 처절한 자기기만의 직물(織物)일 뿐이었다.
1857년의 여름, 프랑크푸르트에는 박람회가 열렸다. 진보와 산업화의 시대가 낳은, 온갖 기계와 상품, 그리고 이국적인 볼거리들이 마인강 변에 펼쳐진 거대한 천막들 아래에서 탐욕스러운 대중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투어는 본래 이런 종류의 대중적 소란을 경멸했지만, 그의 귀에 흥미로운 소문 하나가 들려왔다. 유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희귀한 짐승, 보르네오의 원시림에서 포획된 거대한 유인원, 즉 오랑우탄(Orang-utan) 한 마리가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늙고 지친 육체는 외출을 꺼렸지만, 그의 지적 호기심은 저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 이성과 본능의 접점에 서 있는 저 ‘숲의 사람(Orang-utan)’을 직접 대면해야만 했다. 그것은 동물학적 탐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적 순례이자, 자기 자신과의 마지막 대면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박람회장은 인간이라는 종이 발산하는 온갖 종류의 ‘의지’가 뒤섞여 들끓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아이들의 탐욕스러운 울음소리, 연인들의 과시적인 웃음소리, 상인들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호객 행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배경으로 깔리는 군악대의 요란한 연주. 아르투어는 이 모든 소음과 악취를 뚫고, 마치 연옥을 통과하는 단테처럼, 오랑우탄의 우리가 있다는 가장 구석진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의 공기는 톱밥과 배설물, 그리고 낯선 짐승의 체취가 뒤섞여 무겁고 역겨웠다. 구경꾼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쇠창살에 매달려 괴성을 지르거나, 짐승에게 먹이를 던지며 자신들이 이 ‘미개한’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즐거워했다. 그들의 눈에는 원초적인 호기심과 함께, 자신들과 닮았으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저 존재에 대한 희미한 공포와 경멸이 서려 있었다.
아르투어는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존재와 마주했다.
그것은 거대했다. 늙은 수컷으로 보이는 오랑우탄은, 우리 구석의 지푸라기 더미 위에, 마치 인간 노인처럼 등을 구부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앉아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길고 헝클어진 털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고, 양 볼에는 나이 든 수컷의 상징인 거대한 지방층(cheek pad)이 늘어져 있었다. 그 육체는 인간의 그것과 기괴할 정도로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압도적으로 달랐다. 인간보다 훨씬 긴 팔, 땅딸막한 다리, 그리고 모든 것을 움켜쥘 수 있도록 발달한 손과 발. 그것은 나무 위에서의 삶에 완벽하게 적응한, 인간과는 다른 진화의 경로를 걸어온 우리의 슬픈 사촌이었다.
그러나 아르-투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 외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짐승의 눈이었다.
깊고, 어둡고, 헤아릴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눈. 그 눈은 단순한 동물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체념한 현자(賢者)의 눈이었고, 세상의 모든 고통을 제 자신의 것으로 짊어진 순교자의 눈이었다. 그 눈 속에는 고향인 원시림의 푸른 기억도, 포획당하던 순간의 공포도, 현재의 치욕스러운 감금 상태에 대한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우수(憂愁, melancholy)만이 깃들어 있었다.
아르투어는 숨을 삼켰다. 그의 심장이 기이한 공명(共鳴)으로 떨려왔다. 그는 저 눈동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과 똑같은 것을 보았다. 바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의 근원적인 고통, 즉 개체(individuum)로서 이 세상에 내던져져, 끝없는 욕망과 결핍, 그리고 필연적인 죽음이라는 굴레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비극이었다.
구경꾼들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천막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과 이 거대한 유인원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 텅 빈 공간 속에 마주 서 있는 듯했다. 그는 오랑우탄이 아니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였다. 아니, 그는 오랑우탄이면서 동시에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저 짐승의 눈 속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초상을 보고 있었다. 저 털북숭이의 존재는, 언어와 이성이라는 허울을 벗겨낸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알레고리였다.
그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몇 해 전이었지만, 이미 진화론적 통찰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오랑우탄에게 없는 것은 이성이나 영혼 따위가 아니라, 이성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라는 새로운 종류의 고통을 창조해내는 저주받은 능력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짐승은 인간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순수하게 ‘존재의 고통’ 그 자체를 체현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랑우탄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쇠창살 쪽으로 다가왔다. 구경꾼들은 재미있는 쇼가 시작되었다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르투어는 그 움직임 속에서 어떤 인위적인 연기(演技)가 아니라, 깊은 권태와 무한한 피로감을 읽었다. 오랑우탄은 쇠창살을 붙잡고, 인간들을, 이 자신을 가두고 구경거리로 만든 이상한 생물들을, 그 슬픈 눈으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르투어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 시선이 마주친 찰나, 아르투어는 마치 자신의 영혼이 벌거벗겨지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저 짐승이 자신을 알아본 것은 아닌가? 자신과 같은 종족, 즉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깨달아버린 저주받은 영혼임을 알아본 것은 아닌가?
오랑우탄은 긴 팔을 뻗어, 쇠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먹이를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신의 손가락을 향해 뻗어가는 아담의 손처럼, 이해와 소통을 갈망하는, 종(種)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절박한 제스처처럼 보였다.
아르투어는 저 손을 잡고 싶다는, 미친 듯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 거칠고 투박한 손을 맞잡고, 말없이, 오직 눈빛만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도 안다. 나도 너처럼 고통스럽다. 이 존재라는 감옥이 얼마나 끔찍한지, 나도 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육체는 늙고 굳어 있었고, 그의 정신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냉소와 인간혐오라는 갑옷에 갇혀 있었다. 그는 그저 서서, 저 뻗어온 손이 허공 속에서 힘없이 떨구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구경꾼들은 흩어졌고, 천막 안에는 오직 그와, 우리 속의 현자와, 그리고 지는 해의 마지막 빛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한탄했다. 왜 이 만남이 이제야 찾아왔는가. 왜 그의 정신이 가장 왕성했던 젊은 시절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그라들어가는 이 인생의 황혼녘에야, 자신의 철학에 대한 가장 완벽한 증거이자 살아있는 은유를 만나게 되었는가.
그는 친구 그비너에게 달려가 흥분해서 말했다. "자네, 박람회에 꼭 가보게. 거기 있는 오랑우탄을 보게나. 저 안에 우리 모두의 모습이, 인간이라는 종의 오만함이 벗겨진 진짜 모습이 있다네. 저 짐승의 눈을 들여다보게. 거기서 자네 자신의 비극을 발견하게 될 걸세."
이 오랑우탄과의 대면은 그의 마지막 사색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은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죽음이란, 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가 빚어낸 이 고통스러운 분리의 꿈에서 깨어나, 근원적인 ‘의지’의 바다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귀환이었다. 우리가 잠드는 순간 우리의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듯, 영원한 잠인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진정한 비극은 태어난 것, 즉 이 개체성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비너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정하고, 자신의 장례 절차에 대해 상세한 지시를 남겼다. 그는 화려한 묘비명을 거부했다. 그의 무덤 위에는 오직 자신의 이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외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말라고 했다. 그의 정신은 그의 책 속에 있고, 그의 육체는 그저 썩어 없어질 물질, 자연의 순환 과정 속으로 되돌아갈 한 줌의 유기물에 불과했다.
어느 날 오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평소보다 더 큰 피로감을 느꼈다. 그의 호흡은 가빴고,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 신호임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늙은 아트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창밖으로, 1860년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마인강 변의 나뭇잎들은 마지막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다, 하나둘씩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성공한 삶이었는가, 실패한 삶이었는가? 그는 세상을 바꿨는가, 아니면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 고독하게 스러져간 것인가?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 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진리를 추구했다. 설령 그 진리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 차갑고 잔인한 진실일지라도, 그는 그것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 속으로, 박람회장에서 보았던 오랑우탄의 깊고 슬픈 눈이 떠올랐다. 그는 마침내, 저 뻗어온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오직 순수한 존재의 고통과 그로부터의 해탈만이 존재하는 고요의 세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고슴도치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가시를 내려놓고, 존재의 근원적인 어둠 속으로, 평화롭게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