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소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소음의 종결(終結)이다. 1860년 9월 21일 금요일의 아침, 프랑크푸르트의 하늘은 묽은 우유 빛으로 흐려 있었고, 공기는 가을의 서늘한 체념을 머금고 있었다. ‘쇠네 아우시히트’의 아파트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마지막 날은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던 바로 그 강박적인 규칙성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육체는 지난 며칠간 폐렴의 습격으로 인해 삐걱거리는 난파선과도 같았다. 호흡할 때마다 폐부에서는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고, 기침은 흉곽을 찢을 듯한 통증을 동반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이 낡아빠진 육체의 반란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기상하여, 하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씻고, 서재의 안락의자에 앉아 아침 식사를 맞았다.
그것은 최후의 만찬이었으나, 그 어떤 신성함이나 비장함도 없었다. 부드럽게 익힌 계란과 따뜻한 우유 한 잔. 그의 위장은 더 이상 딱딱한 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행위, 즉 ‘의지(Wille)’가 개체 보존을 위해 내리는 가장 원초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것조차 이제는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인강은 어제와 똑같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찮은 목적지를 향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한 위대한 정신이 이제 곧 이 현상계(Erscheinungswelt)에서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이 세계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알아챌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소멸은 거대한 우주의 드라마 속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보다 더 미미한 사건에 불과했다.
가정부 마가레테는 그의 창백한 안색과 가쁜 호흡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는 평소보다 오히려 더 쾌활해 보였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주치의인 프라우 로스 박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심지어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 웃음은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 길고 고통스러운 연극의 마지막 막이 내리고 있음을 아는 자의, 형이상학적인 평온함의 발현이었다. 스토아학파의 현자들이 말했던 아파테이아(apatheia), 즉 정념(情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정부는 아침 일과에 따라 집안을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어젖혔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와, 오래된 책과 노인의 체취가 뒤섞인 무거운 공기를 씻어냈다. 그녀는 잠시 시장에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르투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혼자가 되었다. 평생에 걸쳐 그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수호해왔던 바로 그 상태, 고독. 이제 그것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가장 완벽하고 유일하게 적합한 무대가 되어주었다.
그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것은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번 밝게 타오르다 스러지는 것과 같은, 점진적이고 부드러운 과정이었다. 그의 주변 사물들은 윤곽을 잃고, 마치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빛과 색의 막연한 얼룩으로 변해갔다. 책장에 꽂힌 플라톤과 칸트의 저서들, 벽에 걸린 괴테의 초상화, 그리고 그의 발치에서 잠들어 있는 늙은 푸들 아트만. 이 모든 ‘표상(Vorstellung)’들이 서서히 해체되어, 그것들을 인식하던 주관(Subjekt)의 소멸과 함께 무(無)의 바다로 녹아들고 있었다.
그의 귀에서는 더 이상 폐부의 고통스러운 소리도, 외부 세계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모차르트도, 로시니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설명하려 애썼던, 그러나 결코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의지’ 그 자체의 교향곡이었다. 모든 생성과 소멸, 투쟁과 화해, 고통과 환희가 하나의 거대한 화음 속에서 녹아들어 있는 우주적 음악.
그의 마지막 사유는 단어의 형태를 띠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지의 파편들이었다.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 어머니의 경멸적인 미소. 베를린의 텅 빈 강의실. 이탈리아의 눈부신 햇살. 그리고 마침내, 박람회장 우리 속에 앉아 있던 오랑우탄의 깊고 슬픈 눈. 그는 이제 그 눈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개체성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나,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 근원적 실체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고요한 동의(同意)였다. Tat tvam asi (그것이 바로 너다). 그렇다, 저 늙은 유인원이 바로 나였고, 내가 바로 저 강물이었으며, 저 하늘의 구름이었다. 모든 것은 하나였다.
몇 분, 혹은 몇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주치의가 정기적인 왕진을 위해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는 거실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댄 채, 마치 깊은 사색에 잠든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고통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그를 괴롭혔던 미간의 깊은 주름이 옅어져, 거의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손은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든 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고 난 뒤, 더 이상 볼 것이 남아있지 않은 자의, 완벽한 종결의 눈이었다.
그는 죽어 있었다.
한 세기를 앞서간 위대한 정신은, 그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도, 임종을 지키는 제자들의 애도도, 마지막 유언도 없이, 마치 문장이 마침표를 찍듯, 그렇게 조용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삶 전체를貫통했던 철학의 마지막 논증이었다. 즉, 개체의 소멸은 비극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오류가 수정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는.
9월 26일, 그의 장례식은 프랑크푸르트 시립 중앙 묘지(Hauptfriedhof)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극도로 간소했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궂은 날씨 탓인지, 혹은 그의 철학이 지닌 본질적인 고독 탓인지, 참석자의 수는 스무 명을 넘지 않았다. 혈육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혼자 살았고, 혼자 죽었으며, 혼자 묻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소수의 사람들은, 그저 의무감 때문에 참석한 조문객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별이 지는 것을 목격하기 위해 모인, 충실한 천문학자들이었다. 프라우엔슈타트, 그비너, 그리고 그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삶이 구원받았다고 믿었던 몇몇 낯선 얼굴들.
어느 개신교 목사가 형식적인 추도문을 낭독한 후, 그의 평생의 친구이자 유언 집행인이었던 빌헬름 그비너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비에 젖은 종이를 펼쳐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준비한 추도문을 읽어 내려갔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함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이방인으로만 여겨지던 이토록 희귀한 고인의 관은 실로 비상한 감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살았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한 고인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껍데기 같은 외면들을 무시했을뿐더러... 열정적인 심장을 지닌 이 심오한 사상가는... 오해받았으되 스스로에겐 진실하기만 했습니다... 고인의 이마에 씌워진 월계관은 고인의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고인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그는 에스드라스(Esdras)에 기록된 ‘진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위대하고 우월하다’는 명제를 명심하여 고생하다가 어느덧 백발노인이 된 것입니다.”
그비너의 목소리는 비탄에 잠겨 있었으나, 그의 말 속에는 패배가 아닌, 역설적인 승리에 대한 선언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그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평생 패배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단 한 번도 진실을 배반한 적이 없는, 유일한 승리자였다.
그의 관이 차가운 흙 속으로 내려졌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한 삽씩 흙을 떠서 관 위로 던졌다. 흙덩이가 관 뚜껑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는, 이 세상과 그 사이의 마지막 연결이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의 유언에 따라, 묘지에는 평평한 화강암 묘비 하나만이 세워졌다. 그 어떤 수식도, 칭송도, 철학적 경구도 없이, 오직 화강암의 차가운 표면 위에 단 두 단어만이 새겨졌다.
ARTHUR SCHOPENHAUER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이름은 이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지적 태도를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진정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육신이 흙 속에서 분해되어 자연의 거대한 순환 속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의 정신, 즉 그의 책 속에 봉인되어 있던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사상의 포자들은, 새로운 숙주(宿主)를 찾아 유럽의 지성계를 떠돌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편두통과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벼리고 있던 젊은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책을 읽고, 마치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 속에서,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유일한 ‘교육자’로 선언하게 될 것이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부정하는 대신 극복하고 지배하려는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는, 훨씬 더 위험한 개념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빈의 한 신경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 행동의 배후에 있는 비합리적이고 억압된 충동, 즉 ‘이드(Id)’의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불렀던 바로 그 심연을 다시 탐사하게 될 것이다.
파리의 도서관에서,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같은 작가들은 사랑의 본질이 개체적 행복이 아니라 종족 보존을 위한 기만적인 환상이라는 쇼펜하우어의 통찰 속에서, 인간 심리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파헤치는 문학적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소멸했지만, 그는 자신의 사상이라는 유전자를 통해 후대의 정신 속에 영원히 살아남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아들과 손자들을 낳았고, 그들은 때로는 아버지를 숭배하고, 때로는 아버지를 살해하며, 20세기의 지성사를 피로 물들일 터였다.
프랑크푸르트의 묘지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비는 그쳤고, 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비치며, 젖은 묘비 위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반짝이게 했다. 고슴도치는 죽었다. 그러나 그가 걸어갔던 외롭고 가시밭 같았던 길, ‘고슴도치의 길’은 이제 막 다른 이들을 위한 순례의 길이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은 행복이나 구원이 아니라, 오직 차갑고 위안 없는 진실뿐일지라도.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