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최애란(30세)은 오늘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여명은 아직 짙은 회색빛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눈부신 조명 아래 선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은색 세단을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출근 시간의 도로는 붉은 미등의 강이 되어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루한 정체조차 그녀에게는 설렘을 위한 전주곡처럼 느껴졌다.
오늘,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코를 다시 빚어낼 것이다. 늘 거울을 볼 때마다 미세한 불만족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그 코. 오늘이면 그 마지막 오점마저 사라질 터였다.
코만 완벽해진다면, 그녀는 자신의 외모라는 견고한 성에 마지막 깃발을 꽂고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운전대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값비싼 네일샵에서 관리받은 손톱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하고 만들어왔다고 굳게 믿었다.
외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치 잿빛 원석을 깎고 다듬어 눈부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내는 과정처럼.
애란에게 세상은 언제나 잿빛 무채색의 경쟁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 어린 시절은 늘 흐린 날의 풍경 같았다.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도, 공부를 월등히 잘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조그만 도시락 가게를 하는 부모님은 늘 바빴고, 그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언제나 '노력'이라는, 그다지 빛나지 않는 무기뿐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반짝이는 재능으로 쉽게 얻어내는 것들을, 애란은 깜빡이는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밤을 새워가며 겨우 따라잡았다.
칭찬은 늘 다른 아이들의 몫이었다.
선생님은 재능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넌 정말 특별하구나"라고 말했고, 애란에게는 그저 지나가듯 "애란이는 참 성실하구나"라는 미지근한 격려를 건넬 뿐이었다.
그 미지근함. 그것은 칭찬의 온기를 가장한 무관심이었고, 애란은 그 속에서 뼛속 깊이 깨달았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으며, 주목받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고 만다는 냉혹한 진실을.
그녀는 잿빛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잠을 줄이고, 남들 놀 때 공부하고,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의 강을 건너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입성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색깔 있는 세상에 발을 들였다고 믿었다.
카메라의 붉은 램프가 켜지는 순간, 그녀는 잿빛의 최애란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더 정교하고, 더 잔혹한 잿빛의 세계였다.
카메라 앞에서 상냥하고 지적인 미소를 짓던 선배들은, 카메라가 꺼진 분장실 구석에서 신입이었던 애란의 숨통을 조였다.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니? 얼굴에 개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밋밋해서 화면에 나오면 있는 줄도 모르겠다."
갓 입사한 애란이 처음으로 써 간 단신 리포트 원고를 받아 든 선배는, 그것을 읽어보지도 않고 툭 던지며 말했다.
"이것도 일이라고 해왔어? 학교에서 대체 뭘 배운 거야? 기본도 안 되어 있잖아, 기본이."
야근 후 녹초가 되어 퇴근하려던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워, 새벽까지 질책하며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선배.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서류를 집어 던지며 "네 수준이 딱 이 정도야!"라고 소리치며 망신을 주던 선배. 그들의 말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애란의 자존심을 난도질했다.
애란은 화장실 칸에 숨어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며 버텼다.
여기서 무너지면,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노력해도 안 되는 아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녀는 선배들의 조롱과 질타를 '성장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포장해 꾸역꾸역 삼켰다. 언젠가 내가 너희들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지금 이 순간을 비웃어주리라.
그녀는 매일 밤 그렇게 칼을 갈았다.
시간이 흘렀고, 애란은 마침내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자신만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제 그녀는 후배의 작은 실수를 '기강 해이'로 규정했고, 자신과 다른 의견은 '선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과거 선배들에게 당했던 모욕적인 언사들은 이제 그녀의 입에서 '후배의 미래를 위한 따끔한 충고'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둔갑하여 터져 나왔다.
그녀에게 방송국은 더 이상 실력과 재능의 경연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서열과 권력을 확인하고,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정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후배가 나타났다.
특별히 아등바등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이.
자신처럼 독기를 품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맑게 웃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호감을 사는 아이.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지만 번번이 미끄러졌던 외부의 큰 기회 - 간판 예능 프로그램 게스트 자리 - 까지 너무나 쉽게 얻어내는 듯 보였다.
그 후배의 존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피땀으로 쌓아온 '노력의 성' 자체를 위협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렇게 피를 말리며, 영혼까지 갉아 먹히며 버텨서 겨우 이 자리에 왔는데, 너는 왜 저렇게 모든 것이 쉬워 보이지?'
비틀린 질투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후배의 해맑음은 그녀의 눈에 '개념 없는 태도'로 보였고, 후배의 재능은 자신의 처절했던 노력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어느 날, 시끌벅적한 분장실에서 그 후배에게 쏘아붙인 순간, 그녀는 어쩌면 거울 속에서 오래전 자신을 괴롭히던 그 선배의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 입었던 갑옷은 어느새 그녀 자신과 한 몸이 되어, 타인을 찌르는 흉측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너, '행복퀴즈' 나가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
시끌벅적하던 분장실의 모든 소음이 순간 멎는 듯했다. 최애란은 팔짱을 낀 채, 이제 막 메이크업 의자에 앉으려는 후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경멸과 조소가 교묘하게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후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옆에서 아이라인을 그리고 있던 동기 박하진(30세)도 거울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하진은 애란의 가장 충실한 동맹이자, 이 잔혹한 게임의 공모자였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이 방송 바닥에서 구른 세월이 얼만데. 넌 아직 햇병아리잖아.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거길 나가. 예능이 장난인 줄 아나 봐."
분장실의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다른 스태프들은 못 들은 척, 못 본 척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침묵은 암묵적인 동조였다. 후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며칠 뒤, 생방송 저녁 뉴스 클로징 멘트에서 사고가 터졌다.
시간을 잘못 계산한 프롬프터가 일찍 멈춰버렸고, 애란의 마지막 멘트가 중간에 뚝 잘려나간 채 방송이 끝나버렸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애란은 귀에 꽂혀 있던 인이어를 빼 던지며 소리쳤다. 스튜디오의 모든 스태프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였다.
"야! 너 때문이잖아! 네가 프롬프터 시간 체크 제대로 안 해서 선배 멘트 잘렸잖아! 어쩔 거야!"
프롬프터를 담당했던 것은 바로 그 후배였다.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시간을 다시 확인했는데…."
"죄송하면 다야? 이게 지금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야? 방송 사고라고, 방송 사고!"
박하진도 옆에 서서 거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애란보다 한술 더 떴다.
"내가 아까 시작 전에 몇 번이나 확인하라고 말했어. 안 했어? 신입이 이렇게 기본도 안 되어 있으니까 이런 큰 사고가 터지는 거 아니야. 정신 안 차릴래?"
그날 밤, 이미 퇴근했던 후배는 애란의 호출을 받고 다시 텅 빈 회사로 불려 나왔다. 싸늘한 형광등 불빛이 쏟아지는 작은 회의실. 애란과 박하진이 나란히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취조실의 형사들처럼.
애란이 두꺼운 방송 대본 뭉치를 책상에 '탁' 소리가 나게 내리치며 입을 열었다.
"선배가 네 친구야?"
"…….“
후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선배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네? 귀 막았어? 아니면 지금 우리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
박하진이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을 매만지며 비웃었다.
"표정 보니까 불만 많은가 본데? 억울해?"
후배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음을 보이려 했다. 울음을 참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뭐야, 그 표정은? 너 지금 우리랑 싸우자는 거지?"
애란이 집요하게 몰아붙이면, 박하진은 옆에서 "사회생활 처음 해보는 티를 꼭 내요. 저러니 우리가 뭘 믿고 일을 맡기겠어"라며 차가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완벽한 콤비 플레이 앞에서 후배는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 서서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만의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곳은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더 잔인해지는, 그들만의 배설구였다.
[최애란]: (후배가 친구들과 웃으며 찍은 SNS 게시물을 캡처해서 올리며) "얘는 우리가 자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고 고생하는데 웃음이 나오나 봐? 완전 사이코패스 아니야?"
[박하진]: "와, 소름.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거 진짜 역겨워. 정작 피해자는 우리인데 말이야. 쟤 때문에 내 커리어에 흠집 났잖아."
[최애란]: "그러니까. 요즘 애들은 무서워서 뭘 가르치겠나. 조금만 뭐라고 하면 삐져서 저러니."
[박하진]: "언니, 앞으로 우리 쟤 후배 취급하지 말자.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투명인간."
[최애란]: "인정. 인사 받아주지 마."
그렇게 후배는 조직 안에서 철저히 고립되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그녀를 둘러쌌고, 그녀는 살아있지만 유령처럼 존재해야 했다.
또 다른 어느 촬영 날 아침, 분주한 분장실에서 또다시 애란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야! 너 때문에 지금 메이크업 순서 다 꼬였잖아! 선배가 너 때문에 생얼로 카메라 앞에 서야겠어?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 일부러 이러는 거지, 지금?"
자신이 늦게 도착해놓고, 그 탓을 후배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박하진은 옆에서 드라이를 받고 있다가, 거울을 통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맨날 죄송하다고만 하면 끝이야? 그놈의 죄송합니다 소리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행동을 고쳐야지, 행동을. 우리가 네 사과받으려고 여기 있는 줄 알아?"
애란과 하진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의 눈에는 희미한 만족감과 권력에 대한 확신이 번뜩였다. 분장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잿빛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 아래에서, 한 영혼이 소리 없이 바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혹은, 애써 외면했다.
"빵-!"
요란한 경적 소리가 최애란을 길고 긴 회상에서 현실로 끌어냈다.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어느새 차는 압구정역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풍경.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간판.
<어머누구세요 성형외과>
그녀의 일곱 번째 수술이 진행될 곳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여기고 있었다. 끊임없는 수정을 통해 완벽에 가까워져야 하는 작품.
"팀장님, 정말… 제가 휴가를 가야 하나요?"
"애란 씨. 모르는 척하지 맙시다. 지금 회사 분위기 어떤지 알잖아. 그 친구 일 때문에 여론이 너무 안 좋아. 일단 좀 잠잠해질 때까지… 쉬는 게 좋겠어. 이건 애란 씨를 위한 배려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후배의 자살.
그것은 방송국을 뒤흔든 거대한 스캔들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작된 사내 갑질 논란. 당연히 애란과 하진은 그 폭풍의 중심에 섰다.
후배가 남긴 일기장과 SNS 기록들이 세상에 까발려지면서, 모든 비난의 화살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처음에는 애란에게 집중되었던 비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후배를 괴롭혔던 박하진에게로 옮겨가는 듯했지만, 둘 다 가해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장기 휴가라는 이름의, 사실상 정직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시끄러운 소용돌이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그래, 이 기회에 완벽하게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동안 바빠서 미뤄왔던 마지막 퍼즐, 코 수술을 더 늙기 전에 완성하고 싶었다. 완벽한 얼굴로 복귀해서, 이 모든 논란을 실력과 외모로 잠재워 버릴 생각이었다.
세상은 결국 보이는 것을 믿으니까.
애란은 병원 지하 주차장 입구의 차단기 앞에 차를 멈췄다. 그리고 주차권을 뽑기 위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기계는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아, 귀찮게…."
그녀는 투덜거리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를 파킹(P) 상태로 바꿨다. 그리고 몸을 창밖으로 길게 내밀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섬세하게 관리된 손가락이 주차권 발급 버튼을 향해 힘겹게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이하고 서늘한 느낌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의 동공에 무언가 거대한 검은 형체가 빠르게 확대되었다. 사람의 형태였다. 하지만 생각할 틈도, 비명을 지를 시간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동추였다. 그는 최애란을 그대로 덮쳤다.
'콰드득-'
자동차 지붕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지는 굉음과 함께, 그녀가 평생을 걸쳐 공들여 만들어 온 세상이 한순간에 암전되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손은 끝내 주차권에 닿지 못한 채 꺽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잘난 얼굴은 철저하게 부서졌고, 눈만 부릅뜬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