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白山)의 비명

by 남킹

1619년 11월, 프라하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프라하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열광으로 들끓었다. 블타바 강 위로는 축포의 연기가 피어올랐고, 성 비투스 대성당의 종은 새로운 왕의 탄생을 온 도시에 알렸다. 사람들은 카를교에서부터 흐라드차니 성에 이르는 길가를 가득 메우고 ‘Vivat Rex! Vivat Regina!’(왕 만세! 여왕 만세!)를 외쳤다. 젊고 아름다운 왕과 왕비의 모습은 억압받던 보헤미아인들에게 희망 그 자체처럼 보였다.

야쿠프는 주인의 뒤를 따라 환영 인파 속을 지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진정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멍에를 끊어내고, 자신들이 직접 선택한 왕을 맞이한다는 자부심이 도시 전체에 넘실거렸다. 야쿠프 역시 그 순간만큼은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대관식의 화려한 막이 내리고, 프라하의 차가운 겨울이 시작되자, 그 희망은 성벽에 부딪히는 겨울바람처럼 힘을 잃어갔다. 왕관의 무게는 프리드리히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를 둘러싼 현실은 축제의 환호성만큼 따뜻하지 않았다.

첫 번째 균열은 신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와 그의 측근들은 독실한 칼뱅파였다. 그들의 신앙은 엄격하고 금욕적이었으며, 가톨릭의 모든 형식을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반면 보헤미아의 개신교는 후스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온건한 우트라퀴스트(Utraquist, 양형영성체파)가 다수였다. 그들은 가톨릭의 성상이나 예배 형식에 비교적 관대했다.

프리드리히의 궁정 목사인 아브라함 스쿨테투스는 이러한 보헤미아의 종교적 관습을 타락의 온상으로 보았다. 그는 새로운 왕의 권위를 빌어 ‘참된 신앙’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크리스마스 직후, 그의 선동에 넘어간 광신적인 칼뱅파 무리가 성 비투스 대성당에 난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야쿠프는 그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대성당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성인들의 조각상이 받침대에서 끌어내려져 산산조각 나 있었고, 수백 년 된 제단화는 칼로 난도질당해 있었다. 심지어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성 바츨라프의 조각상마저 목이 잘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우상숭배의 잔재를 모두 파괴하라! 주님의 집은 기도하는 곳이지, 조각 전시장이 아니다!”

스쿨테투스의 외침에 광신도들은 도끼와 망치를 휘두르며 환호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프라하 시민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개신교도였지만, 성 비투스 대성당은 그들의 신앙을 넘어 보헤미아의 역사와 영혼이 깃든 곳이었다. 외국인 왕이 데려온 외국인 목사가 그들의 성소를 더럽히는 모습은, 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야쿠프는 옆에 서 있던 한 노인의 입에서 나지막한 저주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차라리 합스부르크 시절이 나았군….”

프리드리히는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사건은 그가 보헤미아의 구원자가 아니라, 그들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 군주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루터파를 믿는 작센 선제후를 비롯한 독일의 다른 개신교 제후들에게도 이 소식은 프리드리히가 위험한 급진주의자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칼뱅파의 ‘성화상 파괴운동’을 이슬람의 야만성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프리드리히는 스스로 동맹의 손을 쳐낸 셈이었다.

정치적, 군사적 상황은 더욱 암울했다.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르면서 보헤미아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군대를 유지하고 행정 체계를 운영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동맹과 장인인 제임스 1세에게 애타게 사절을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실망스러운 대답뿐이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현명한 바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평화를 사랑했고, 유럽 대륙의 복잡한 종교 분쟁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사위가 자신의 허락 없이 보헤미아 왕관을 쓴 것에 분노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스페인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다. 그가 보낸 것은 군대가 아니라,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공허한 조언뿐이었다. 약간의 자금과 2천 명 남짓의 영국인 의용병이 도착했지만, 그것은 거대한 제국에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프로테스탄트 동맹은 이름뿐인 조직이었다. 동맹의 제후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합스부르크의 힘이 약화되기를 바랐지만, 자신들의 영지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프리드리히를 도울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우리는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보호할 의무는 있지만,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를 도울 의무는 없다’는 기묘한 논리로 지원을 거부했다.

프리드리히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그는 프라하 성이라는 화려한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았다. 밤이 되면, 그는 잠 못 이루고 성벽 위를 거닐었다. 아름다운 프라하의 야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그 너머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군대의 환영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그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녀는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프라하 성에서 화려한 연회를 열고 사냥 대회를 주최하며 왕실의 위엄을 과시했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지만, 지친 기색 없이 사교 활동을 이끌며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걱정 마세요, 여보. 아버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예요. 곧 대군이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당한 명분 앞에, 페르디난트의 군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자신감은, 어둠을 애써 외면하려는 주문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그 사이, 페르디난트 2세의 거미줄은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1620년 봄, 빈

새로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두 개의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하나는 제국군으로, 플랑드르 전선에서 명성을 떨친 노련한 지휘관 샤를 보나방튀르 드 롱그발, 부쿼이 백작이 이끌었다. 다른 하나는 가톨릭 동맹군으로, ‘수도승 장군’이라 불릴 만큼 독실하고 무자비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이 지휘했다. 이 두 군대는 오스트리아에 집결하여 보헤미아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페르디난트의 외교적 승리는 군사적 준비보다 더욱 눈부셨다. 그는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막대한 전쟁 자금을 지원받았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연대를 과시하며, 당시 유럽 최강이라 불리던 스페인군을 움직였다. 암브로시오 스피놀라가 이끄는 2만 5천의 스페인 대군은 네덜란드 남부에서 출발하여, 프리드리히의 본거지인 팔츠를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의 퇴로와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치명적인 전략이었다.

페르디난트의 가장 교활한 수는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요한 게오르크는 독실한 루터파였지만, 칼뱅파인 프리드리히를 경계했고, 보헤미아의 반란이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페르디난트는 그에게 루사티아(Lausitz) 지방의 통치권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며, 반란 진압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개신교의 대의보다 영토 확장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요한 게오르크는 결국 황제의 손을 잡았다. 개신교 진영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620년 8월, 마침내 전쟁의 막이 올랐다. 틸리와 부쿼이가 이끄는 총 5만여 명의 가톨릭 연합군이 오스트리아에서 보헤미아 남부로 진격했다. 동시에, 작센 군대는 북쪽에서 루사티아를 침공했다. 프리드리히의 왕국은 남과 북에서 거대한 집게에 물린 형국이 되었다.

프라하의 임시정부는 크리스티안 폰 안할트-베른부르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만여 명의 군대를 급히 조직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군대는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병사들은 대부분 급료가 밀린 용병들이었고, 그들의 충성심은 돈의 액수에 따라 결정되었다. 지휘관들 역시 서로 반목하며 통일된 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야쿠프는 전선으로 떠나는 군대를 보았다. 그들의 행군에는 승리를 향한 열정 대신, 체념과 불안이 가득했다. 많은 병사들이 술에 취해 있었고, 군기는 흐트러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행렬처럼 보였다.

‘저들이 과연 제국의 정예군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야쿠프의 가슴은 불길한 예감으로 차갑게 식어갔다.

가을 내내, 두 군대는 보헤미아 남부에서 지루한 기동전을 벌였다. 안할트는 결정적인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려 했고, 가톨릭 연합군은 보급 문제로 고전하며 쉽사리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그 사이, 스피놀라의 스페인 군대가 라인 강을 건너 팔츠를 유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고향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에 절망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조차 없는 왕이었다.

11월 초,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자 양측 모두 겨울 숙영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틸리와 부쿼이의 기만책이었다. 11월 5일, 그들은 안할트의 군대를 교묘하게 따돌리고, 프라하를 향해 총력 진군을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적의 의도를 파악한 안할트는 경악했다. 그는 서둘러 군대를 돌려 프라하로 향했다. 이제는 누가 먼저 프라하 앞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느냐의 시간 싸움이었다. 보헤미아 군대는 필사적으로 행군하여, 11월 7일 밤, 간신히 프라하 서쪽의 낮은 언덕, 빌라 호라(Bílá Hora), 즉 ‘백산(White Mountain)’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들은 적보다 먼저 도착했지만,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수일간의 강행군으로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많은 용병들이 밤의 어둠을 틈타 탈영했다.

프라하 성에 있던 프리드리히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직접 군대를 격려하기 위해 백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장의 차가운 현실 앞에서, 세련된 궁정 군주인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지친 병사들에게 몇 마디 격려의 말을 건넨 뒤, 곧 도시로 돌아와 버렸다. 왕이 전장의 병사들과 함께 밤을 보내지 않고 따뜻한 성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남아있는 병사들의 마지막 충성심마저 꺾어버렸다.

반면, 백산 아래에 진지를 구축한 가톨릭 연합군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날 밤, 군중 속에서 한 명의 가르멜회 수도사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도미니크 아 예수 마리아(Dominic of Jesus Maria)였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군대가 약탈했던 스트라코니체 성에서 발견된, 눈과 손이 파손된 성모 마리아 성화상을 들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보아라, 형제들이여! 이단자들이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께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주님께서 이 성화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의 징표를 보여주셨다! 내일, 우리는 단순한 전투를 치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명예를 위해, 거룩한 교회를 위해 싸우는 십자군이다! 신의 이름으로 저 악의 무리를 섬멸하라!”

그의 열정적인 연설은 지쳐있던 병사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의 군대라는 확신에 차서 함성을 질렀다. ‘산타 마리아!’를 외치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틸리와 부쿼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의 사기가 최고조에 달했음을 확인했다.

운명의 날인 11월 8일의 아침이 밝았다. 짙은 안개가 백산 언덕을 감싸고 있었다. 야쿠프는 프라하 성벽 위에서,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서쪽을 바라보았다. 안개 너머로, 보헤미아의 운명이 걸린 언덕이 희미하게 보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압박감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날 아침,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다. 양측 모두 짙은 안개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며 대치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헤미아 군대의 긴장감은 서서히 해이해졌다. 많은 이들이 전투가 내일로 미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오 무렵, 마치 연극의 막이 오르듯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질서정연하게 전투 대형을 갖춘 가톨릭 연합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의 갑옷과 창끝이 겨울 햇살에 번쩍였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강철 숲과 같았다.

“공격하라!”

틸리의 명령과 함께, 제국군의 포병대가 불을 뿜었다. 포탄이 백산 언덕에 작렬하며 흙과 돌멩이를 허공으로 흩뿌렸다. 그 포성을 신호로, 제국군 보병대가 언덕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북소리에 맞춰,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였다.

전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짧고, 잔혹했다.

보헤미아 군대의 좌익을 맡은 헝가리 용병대는 첫 번째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그들은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들의 패주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중앙에 있던 안할트의 주력 부대는 잠시 버티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부쿼이가 이끄는 제국군 기병대와 폴란드에서 온 용맹한 코사크 기병대가 우익을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보헤미아 군대의 전열은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야쿠프는 성벽 위에서 그 끔찍한 광경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깃발들이 뒤섞이고 포연이 자욱하더니, 어느 순간 보헤미아 군대의 전열 전체가 거대한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프라하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격하는 제국군 기병대의 칼날이 햇빛에 번쩍이며 도망치는 자들의 등을 내리쳤다.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수만 명의 절망이 뒤섞인 거대한 비명. 백산의 비명이었다.

전투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보헤미아 군대는 약 5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궤멸했다. 가톨릭 연합군의 손실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프라하 성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전투가 그렇게 빨리 끝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패배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포크를 든 채 얼어붙었다.

“전멸…이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되지 않았는가!”

안할트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끝났습니다, 전하.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군대는 사라졌습니다. 지금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성 안은 순식간에 혼돈에 빠졌다. 그토록 당당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공포가 서렸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였다. 그녀는 아이들을 챙기며, 침착하지만 신속하게 피난을 준비했다. 하인들은 닥치는 대로 보물과 옷가지를 마차에 실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왕을 상징하는 왕관과 홀, 보주(寶珠)는 성 비투스 대성당에 그대로 남겨졌다. 프리드리히는 그것을 챙길 시간조차 없었다.

야쿠프의 주인인 펠스 백작은 야쿠프에게 소리쳤다.

“어서! 자네도 짐을 챙겨! 우리도 왕과 함께 떠나야 한다!”

그러나 야쿠프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를 향해 몰려오는 패잔병들의 거대한 물결과 그 뒤를 쫓는 승리자들의 깃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기록해온 양피지 뭉치를 품에 안았다. 이것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역사의 증언. 패배한 혁명의 기록.

그날 오후, ‘겨울왕’ 프리드리히 5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를 따르던 소수의 귀족들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급히 프라하를 떠났다. 그들이 들어올 때와는 너무나 다른, 초라하고 비참한 행렬이었다. 그들은 동쪽의 실레지아를 거쳐, 결국 프리드리히의 또 다른 영지인 브란덴부르크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프라하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다. 도시의 지도자들은 항복을 논의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음 날 아침, 틸리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이 아무런 저항 없이 성문을 통해 들어왔다.

도시는 침묵에 잠겼다. 승리한 군대는 약탈을 자제했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도시를 억누르는 거대한 위협이었다. 야쿠프는 자신의 작은 다락방에 숨어, 창문 틈으로 거리를 행진하는 바이에른과 제국의 깃발을 보았다. 희망의 시대는 단 1년 만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보복뿐이었다.

백산의 비명은 전투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보헤미아의 하늘에 메아리쳤다. 그것은 죽어간 병사들의 비명이자, 자유를 잃은 민족의 비명이었고, 이제 막 시작된 서른 해의 기나긴 전쟁이 유럽 전역에 울려 퍼지게 될 끔찍한 서곡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해방의 꿈은, 결국 신의 이름 아래 행해진 심판의 칼날에 베여 스러졌다. 그리고 그 피 위로, 길고 어두운 겨울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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