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11월 9일, 프라하
겨울왕이 떠난 프라하의 아침은 죽음의 침묵으로 가득했다. 백산의 비명은 잦아들었지만, 그 메아리는 도시의 모든 돌 틈과 골목길에 스며들어 있었다. 틸리의 군대가 성문을 통해 들어왔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환영의 꽃다발이 아닌, 굳게 닫힌 창문과 공포에 질린 정적뿐이었다.
야쿠프는 주인 없는 펠스 백작의 저택, 자신의 작은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창문 커튼의 아주 작은 틈으로, 그는 구시가 광장을 가로지르는 바이에른 군대의 행렬을 엿보았다. 그들의 푸른색과 흰색 다이아몬드 무늬 깃발은 잿빛 하늘 아래 유난히 선명했다. 병사들의 얼굴은 지쳐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승리자의 오만함과 억눌린 약탈의 욕망이 번뜩였다.
틸리 백작은 초기 며칠 동안 놀라울 정도의 군율을 유지했다. 대대적인 약탈은 금지되었다. 이것은 자비가 아니라, 계산된 정치적 행위였다. 그는 프라하를 파괴하는 대신, 온전히 접수하여 황제의 손에 바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군율이라는 얇은 막 아래에서, 개별적인 폭력과 위협은 독버섯처럼 피어났다. 밤이 되면 술에 취한 용병들이 뒷골목을 어슬렁거렸고,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은 집에서는 비명과 함께 재물을 빼앗기는 일이 빈번했다. 프라하는 거대한 덫에 걸린 짐승처럼, 숨을 죽인 채 포식자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쿠프의 품에는 보헤미아 반란의 모든 것이 담긴 양피지 뭉치가 있었다. 임시정부의 회의록, 투른 백작의 연설문 초안, 그리고 유럽 각지의 개신교 제후들에게 보낸 지원 요청서 사본까지. 이것들은 한때 새로운 시대의 설계도였지만, 이제는 반역의 증거물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겨누는 칼날이 되어버렸다. 그는 이 위험한 기록들을 벽난로에 던져버려야 할지, 아니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 종이들은 단지 잉크 자국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러져간 꿈의 마지막 유해였다.
일주일 뒤, 황제의 대리인이자 새로운 보헤미아의 총독으로 임명된 카를 폰 리히텐슈타인 공작이 프라하에 도착했다. 그의 입성은 틸리의 군대와는 다른 종류의 공포를 몰고 왔다. 틸리의 위협이 칼과 창의 물리적인 폭력이었다면, 리히텐슈타인의 위협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갑고 체계적인 숙청의 예고였다.
그의 첫 번째 명령은 ‘반역자 명단’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백산 전투 이전에 임시정부에 참여했거나, 프리드리히를 왕으로 추대한 모든 귀족, 기사, 도시 대표들이 그 대상이었다. 배신과 밀고가 도시를 뒤덮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고발자가 되었고, 개인적인 원한을 갚거나 재산을 노린 거짓 증언이 난무했다. 프라하는 거대한 거미줄이 되었고, 시민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파멸을 기다리는 날벌레 신세가 되었다.
펠스 백작의 이름은 명단의 가장 윗부분에 있었다. 어느 날 밤, 황제군 병사들이 저택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야쿠프는 다락방 바닥의 틈으로, 쇠사슬에 묶여 끌려 나가는 주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백작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체념과 함께, 자신의 선택에 대한 굳건한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야쿠프가 숨어있는 다락방 쪽을 잠시 올려다보는 듯했다. 그것이 작별 인사였을까, 아니면 역사를 기록하라는 마지막 명령이었을까. 야쿠프는 감히 알 수 없었다.
주인이 사라진 저택은 이제 안전하지 않았다. 야쿠프는 그날 밤, 자신의 양피지 뭉치를 낡은 가죽 가방에 쑤셔 넣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유대인 지구인 요제포프의 한 허름한 여인숙에 방을 얻었다. 그곳은 당국의 감시가 비교적 덜한, 무법과 익명의 공간이었다. 그는 이제 이름 없는 서기가 아니라,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도망자였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프라하의 공포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반역 조사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어 흐라드차니 성의 감옥에 갇혔다. 고문이 자행되었다. 강철 구두, 엄지손가락 조임쇠, 그리고 불에 달군 쇠붙이가 반역의 ‘진실’을 캐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감옥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은 겨울바람 소리에 섞여 도시 전체에 절망의 씨앗을 뿌렸다.
재산 몰수가 뒤따랐다. 반란에 가담한 모든 이들의 토지와 재산은 황제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그 재산들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가톨릭 귀족들과 용병대장들에게 상으로 주어졌다. 보헤미아의 부(富)는 거대한 이삭줍기처럼, 승리자들의 손아귀로 빠르게 옮겨갔다.
마침내 1621년 5월, 재판이 열렸다. 그것은 정의를 위한 절차가 아니라, 보복을 위한 의식이었다. 피고인들에게는 변호사도, 증인을 신청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재판관들은 이미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유죄 판결과 사형 선고를 지시받은 상태였다.
야쿠프는 변장을 하고 재판을 방청했다. 한때 보헤미아를 이끌던 지도자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피고석에 서 있었다. 투른 백작과 같은 일부 지도자들은 이미 국외로 탈출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 중에는 80세가 넘은 늙은 학자도, 프라하 대학의 총장도, 도시의 존경받는 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황제에 대한 대역죄였다.
그리고 1621년 6월 21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에는 거대한 처형대가 세워졌다. 처형대를 검은 천이 뒤덮었고, 그 위에는 세 명의 사형 집행인이 날카롭게 벼린 칼과 도끼를 든 채 서 있었다. 광장 주변의 건물들에는 황제의 깃발과 바이에른의 깃발이 나부꼈다.
프라하의 모든 시민들은 광장에 나와 이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야쿠프도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하늘은 기이할 정도로 맑고 푸르렀다. 마치 신이 이 잔혹한 인간의 연극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했다.
오전 5시, 성당의 종이 처형의 시작을 알렸다. 사형수들이 시청사에서 한 명씩 끌려 나왔다. 총 스물일곱 명.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야힘 온드르제이 슬릭, 한때 임시정부의 최고 재판관이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의연했다. 처형대에 오른 그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
“나는 나의 신앙과 조국의 자유를 위해 죽는다! 나의 피가 이 땅에 자유의 씨앗이 되기를! 주여, 제 영혼을 받으소서!”
그의 오른손이 먼저 잘려나갔다. ‘폐하의 서신’에 서명했던 손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인의 칼이 번쩍이며 그의 머리를 베었다. 군중 속에서 나지막한 신음과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한 명, 또 한 명. 처형은 끝없이 이어졌다. 바츨라프 폰 루파, 얀 예세니우스… 야쿠프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눈앞의 광경을 뇌리에 새겼다. 이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보헤미아의 정신이, 그들의 자존심이 공개적으로 참수당하고 있었다.
야쿠프의 옛 주인인 콜로나 폰 펠스 백작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야쿠프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지만,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육중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군중 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네 시간 동안 계속된 처형이 끝났을 때, 광장은 피로 흥건했다. 스물일곱 개의 머리는 처형대에 꽂히거나, 카를교의 탑에 매달려 까마귀의 먹이가 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계되지 않고, 이름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다.
페르디난트 2세의 ‘정의’는 그렇게 실현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에 공포를 심었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가는 혹독했다. 보헤미아는 이후 300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서 독립을 잃고 신음하게 된다.
그날 오후, 야쿠프는 자신의 허름한 방으로 돌아와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그는 그날 처형당한 스물일곱 명의 이름과 그들의 마지막 말을 모두 기록했다. 그의 손은 슬픔과 분노로 떨렸지만, 펜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진실을 기록하는 것. 잊히지 않게 하는 것.
1621년, 네덜란드 헤이그
프라하가 피로 물드는 동안, ‘겨울왕’ 프리드리히는 헤이그의 망명지에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왕이 아니었다. 선제후의 지위마저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나라 잃은 군주일 뿐이었다. 그의 본거지인 팔츠는 스피놀라의 스페인 군대에게 점령당해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의 모든 궁정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호소했다. 장인인 제임스 1세에게, 프랑스의 루이 13세에게,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프리드리히는 이미 끝난 패였다. 그를 돕는 것은 승산 없는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의미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남편을 보며 가슴 아파했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명성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끈질긴 외교 활동 덕분에, 네덜란드와 일부 독일 제후들로부터 소액의 자금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금에, 한 남자가 꼬여들었다. 그의 이름은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였다.
만스펠트는 사생아 출신의 용병대장이었다. 그는 신앙이나 명분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는 돈과 기회를 위해 싸웠다. 그는 3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혼란이 낳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전쟁 기업가’였다. 그의 군대는 국가에 소속된 정규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만스펠트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 집단이었고, 그들의 생존 방식은 약탈이었다. ‘전쟁은 전쟁으로 먹고산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백산 전투 이후, 만스펠트는 궤멸된 보헤미아 군대의 잔존 병력을 수습하여 자신만의 군대를 재편했다. 그는 프리드리히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군대를 유지할 자금을 얻기 위한 제스처였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절박함을 이용해, 팔츠 탈환이라는 명분을 얻어냈다.
1621년 가을, 만스펠트의 군대는 보헤미아 서부를 떠나 팔츠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군대는 메뚜기 떼와 같았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가톨릭 영지든 개신교 영지든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황폐화되었다. 마을은 불탔고, 식량은 약탈당했으며, 저항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가톨릭 동맹의 총사령관 틸리가 버티고 있었다. 두 노련한 지휘관은 라인 강 유역을 무대로 체스판의 기물처럼 움직이며 서로의 허점을 노렸다. 전쟁의 무대는 보헤미아에서 독일 서부로 옮겨붙고 있었다. 불씨는 꺼진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새로운 숲으로 번져나간 것이었다.
만스펠트의 군대에 합류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 크리스티안. ‘할버슈타트의 광인’이라 불리는 젊고 무모한 개신교 군주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흠모하여, 그녀의 장갑을 자신의 모자에 꽂고 다니며 ‘여왕의 기사’를 자처했다. 그의 군대의 깃발에는 “신의 친구, 사제의 적”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만스펠트보다 더 잔혹하게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며 군자금을 마련했다.
프리드리히는 이 두 명의 무자비한 용병대장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신앙과 명예를 위해 싸우려 했지만, 그의 대의를 수행하는 자들은 약탈과 파괴를 일삼는 늑대들이었다.
1622년 4월, 비슬로흐
만스펠트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틸리의 군대를 비슬로흐 전투에서 격파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잠시나마 팔츠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프리드리히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전선에 합류하기 위해 헤이그를 떠났다.
그러나 승리는 짧았다. 틸리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신속하게 재정비했다. 그리고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의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택했다. 5월, 그는 빔펜 전투에서 바덴-두를라흐 변경백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6월에는 회히스트 전투에서 크리스티안의 군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은 간신히 합류했지만, 그들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었고 보급은 끊긴 상태였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약탈과, 승산 없는 전쟁에 절망했다. 결국 그는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을 해고하고,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비참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워줄 마지막 칼자루마저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주인을 잃은 두 용병대장은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방면으로 향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제 팔츠 탈환이 아니라, 새로운 고용주를 찾는 것이었다. 전쟁은 그렇게 명분을 잃고,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1622년 가을, 프라하
프라하에는 거짓된 평화가 찾아왔다. 처형과 재산 몰수가 끝나자, 리히텐슈타인 총독은 재가톨릭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모든 개신교 목사들은 추방되었고, 시민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도시를 떠나야 했다. 성당에서는 다시 라틴어 미사가 울려 퍼졌지만,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신앙의 경건함 대신 공포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야쿠프는 더 이상 프라하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단순한 개신교도가 아니었다. 그의 가방 안에 든 양피지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았다. 그는 이 진실의 기록을 안전한 곳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언젠가, 누군가는 알아야 했다. 이 모든 비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그는 상인 행렬에 섞여 도시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낡은 옷을 입고, 얼굴에 검댕을 칠했다. 그의 가방 밑바닥에는 양피지 뭉치가, 그 위에는 딱딱한 빵과 마른 치즈 몇 조각이 들어 있었다.
성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마지막으로 흐라드차니 언덕을 돌아보았다. 성 비투스 대성당의 첨탑 위에는 이제 합스부르크의 쌍두독수리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한때 보헤미아 자유의 상징이었던 사자 깃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쪽을 향해 걸었다. ‘겨울왕’이 도망쳤고, 이제는 만스펠트와 틸리가 싸우고 있다는 땅, 팔츠를 향해서. 그는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보헤미아의 불꽃은 꺼졌다. 그러나 그 불씨는 라인 강 유역에서 다시 타오르며, 독일 전역을, 나아가 유럽 전체를 집어삼킬 거대한 화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30년 전쟁의 첫 번째 막이 내리고, 더 길고 잔혹한 두 번째 막이 오르고 있었다. 야쿠프는 그 비극의 연대기 한가운데로,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