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29 03화

권력의 문턱 (1799년 / 1933년)

by 남킹


천문대의 사내는 낡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시간선이 흐르는 강물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나는 피와 혁명으로 얼룩진 프랑스의 강이었고, 다른 하나는 굴욕과 혼돈으로 흙탕물이 된 독일의 강이었다. 이제 두 강물은 거대한 폭포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포.

"진공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사내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비친 두 시대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프랑스의 총재정부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둘 다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태어났지만, 이상은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내분과 부패, 무능으로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민중은 구원자를 갈망했다. 그들은 안정과 질서를 약속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설령 그 대가가 자유라 할지라도.

역사의 진공 상태. 바로 그곳으로 운명이 선택한 두 이방인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쌓아 올린 군사적 신화를 등에 업고, 다른 한 명은 맥주홀과 거리에서 피워 올린 정치적 광기를 무기 삼아.

한 명은 '공화국의 검'이 되기를 요청받았고, 다른 한 명은 '국가 재건의 기수'로 추대되었다. 그들을 권력의 문턱으로 밀어 넣은 자들은 모두 같은 착각을 했다. '우리가 저들을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이 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길들일 수 있는 사냥개가 아니라, 우리를 부수고 나온 굶주린 늑대라는 사실을. 사내는 두 개의 시간선이 한 지점에서 폭발적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799년 11월 9일의 파리, 그리고 정확히 129년 하고도 몇 달이 더 흐른 1933년 1월 30일의 베를린. 역사의 수레바퀴가 가장 크게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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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롱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준장은 혁명의 변덕스러운 칼날 위에서 위태로운 춤을 추고 있었다. 1794년, 그를 후원했던 자코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실각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그의 '충성스러운 포병 장교'였던 나폴레옹 역시 반역자로 몰려 니스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차가운 감옥 안에서 그는 깨달았다. 군사적 재능만으로는 이 혼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정치는 변덕스러운 창녀와 같아서, 어제의 영웅을 오늘의 반역자로 만드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는 맹세했다. 다시는 누군가의 칼이나 방패가 되지 않겠다고. 오직 나 자신의 주인이 되겠다고.

열흘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그는 한직으로 밀려나 파리의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야망은 상처 입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군사 교관으로 지원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1795년 10월 5일 (혁명력 방데미에르 13일), 굶주림과 총재정부의 무능에 분노한 왕당파와 시민들이 파리 중심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이만 오천이 넘는 성난 군중이 튀일리 궁의 국민공회를 향해 몰려들었다. 공화국을 지키는 병력은 고작 오천에 불과했다.

공포에 질린 총재정부의 수장 폴 바라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잊혀진 장군을 떠올렸다. 바로 툴롱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그 포병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보나파르트 장군을 데려오게! 당장!"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나폴레옹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지휘권을 인수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충분했다. 그는 기병대 소령 조아생 뮈라에게 명령했다.

"뮈라! 사블롱의 대포들을 가져오게! 단 한 문도 빼놓지 말고! 공화국의 운명이 자네의 말발굽에 달려 있네!"

뮈라는 밤새 말을 달려 파리 외곽의 대포 40문을 확보해 튀일리 궁 주변의 모든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했다. 성난 군중이 좁은 생토노레 거리를 따라 국민공회로 몰려왔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폴레옹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쏴라."

포병 장교의 간결한 명령과 함께 수십 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좁은 골목으로 날아간 포도탄(포탄 안에 수많은 쇠구슬이 든 산탄)은 끔찍한 위력을 발휘했다. 군중의 앞줄은 말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비명과 고통이 거리를 뒤덮었다. 단 두 시간 만에, 거리는 수백 구의 시체로 뒤덮였고 봉기는 진압되었다.

나폴레옹은 '포도탄 한 방(a whiff of grapeshot)'으로 공화국을 구했다. 그는 파리 시민들의 피로 자신의 명성을 다시 썼다. 이 사건으로 그는 내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는 더 이상 변방의 장군이 아니었다. 프랑스 정치의 심장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원정에서 절정에 달했다. 1796년, 그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이탈리아 방면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병사들이여! 그대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정부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을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이끌 것이다. 위대한 도시와 풍요로운 지방이 그대들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거기서 그대들은 명예와 영광, 그리고 부를 얻게 될 것이다!"

그의 연설은 굶주린 병사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는 로디, 아르콜레, 리볼리에서 연이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북부 이탈리아를 석권했다. 그는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정복한 지역에서 공화국을 세우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걷어 파리의 텅 빈 국고를 채웠다. 그는 스스로 조약을 맺고, 신문을 창간하여 자신의 승리를 프랑스 전역에 알리는 탁월한 정치 선동가이기도 했다. 그의 군대는 더 이상 프랑스 공화국의 군대가 아니라, '보나파르트의 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영웅이 파리로 개선하자, 총재정부는 그의 인기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위험한 야심가를 파리에서 멀리 떼어놓을 방법을 찾았다. 바로 나폴레옹 자신이 제안한 이집트 원정이었다. 영국의 동방 무역로를 차단하여 숙적 영국을 무릎 꿇리겠다는 거창한 계획이었다.

1798년, 그는 4만 명의 병력과 수많은 학자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그는 피라미드 전투에서 승리하며 이집트를 정복하는 듯 보였다. "4천 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그의 외침은 병사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영국의 넬슨 제독이 아부키르 만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집트에 고립되었다. 보급로는 끊겼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의 원대한 동방 제국의 꿈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프랑스 본국의 소식이 들려왔다. 총재정부는 연이은 군사적 패배로 권위를 완전히 상실했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다시 프랑스를 위협하고 있으며, 국내는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결단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집트의 사막에 버려둔 채, 단 몇 명의 측근만 데리고 작은 배에 몸을 실어 프랑스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명백한 탈영 행위였지만, 그는 이 위기를 다시 한번 기회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1799년 10월, 그가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전역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집트에서의 패배는 까맣게 잊고, 이탈리아의 영웅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믿었다. 파리로 향하는 그의 여정은 끝없는 환영 인파로 가득 찼다.

파리에서는 이미 쿠데타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총재정부의 실력자 중 한 명인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무능한 정부를 뒤엎고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새로운 정부를 세울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에게는 계획과 자금, 정치적 명분이 있었지만, 단 하나가 부족했다. 바로 군중을 압도하고 군대를 움직일 '검'이었다.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검'으로 선택했다. 그는 이 젊은 장군이 정치에는 무지하므로,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는 쉽게 통제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다.

"우리에겐 머리가 있지만, 칼이 필요하오. 보나파르트 장군이 바로 그 칼이 되어줄 것이오."

11월 9일 (혁명력 브뤼메르 18일),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계획은 치밀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시앵 보나파르트가 의장으로 있는 오백인회(하원)와 원로원(상원)을 파리 외곽의 생클루 궁으로 이동시킨다. '자코뱅의 위협'을 과장하여 파리 주둔군의 지휘권을 나폴레옹에게 넘기고, 의회를 압박하여 총재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 권한을 가진 3명의 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원로원은 나폴레옹에게 군 지휘권을 넘기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오백인회는 달랐다. 그곳에는 아직 공화국의 이상을 지키려는 자코뱅파 의원들이 건재했다.

다음 날,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생클루 궁으로 향했다. 그는 먼저 원로원에서 연설을 시도했지만, 격앙된 나머지 "나는 전쟁의 신, 그리고 행운의 신과 함께한다!"와 같은 두서없는 말만 늘어놓아 오히려 의원들의 의심만 샀다.

상황은 오백인회에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의원들은 고함을 지르며 그를 막아섰다.

"독재자를 타도하라! 무법자를 끌어내라!"

"카이사르! 크롬웰!"

의원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평생 전장을 누볐던 나폴레옹이었지만, 정치적 비난과 물리적 위협 앞에서 그는 당황하여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끌려 간신히 회의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쿠데타는 실패 직전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동생 루시앵이 기지를 발휘했다. 오백인회 의장이었던 그는 밖으로 뛰쳐나와 궁궐 밖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 병사들 앞에서 칼을 뽑아 형의 가슴에 겨누며 연설을 시작했다.

"병사들이여! 나는 여러분의 장군이자 내 형인 이 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을 것을 맹세하오! 만약 그가 자유를 위협한다면 말이오! 저 회의장 안의 의원들은 단도에 미친 광신도들이오! 그들은 여러분의 장군을 암살하려 했소! 저들을 회의장에서 몰아내고 공화국을 구하시오!"

이 극적인 연출에 병사들은 동요했다. 뮈라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이 빌어먹을 작자들을 모두 창밖으로 내던져 버려라!"

북소리와 함께 그레나디어(척탄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회의장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총에 대검을 꽂은 채 의원들을 위협했다. 겁에 질린 의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숲으로 도망쳤다. 프랑스 혁명의 대의 기관은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그날 밤, 루시앵은 도망쳤던 의원들 중 일부를 다시 불러 모아 나폴레옹, 시에예스, 뒤코를 임시 통령으로 임명하는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쿠데타는 성공했다.

시에예스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새로운 헌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나폴레옹은 시에예스가 제안한, 실권은 없고 명예만 있는 '대선거후' 자리를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그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제1통령(First Consul) 자리를 요구했고, 관철시켰다. 시에예스의 '검'은 이제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1799년 12월 15일, 새로운 통령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선포했다.

"시민들이여, 혁명은 그 시작의 원칙으로 돌아왔다. 혁명은 끝났다."

그 말 그대로였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혁명은 이제 한 사람의 야망을 위한 발판으로 변질되었다. 서른 살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제 프랑스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권력의 문턱을 넘어, 이제 황제의 자리를 향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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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의 패전은 독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전선에서 돌아온 아돌프 히틀러 상병에게 뮌헨은 낯선 도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혼란과 동의어였다. 거리에서는 좌익 스파르타쿠스단과 우익 자유군단(Freikorps)이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을 벌였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사람들의 저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적인 조항들은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히틀러는 제대하지 않고 군에 남았다. 그는 뮌헨 군管區 정보부에서 일하며 '정치 교육'을 담당하는 하사관이 되었다. 그의 임무는 군인들에게 반(反)볼셰비즘과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하고, 뮌헨에 난립하는 각종 정치 단체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1919년 9월 12일, 그는 '독일 노동자당(DAP)'이라는 이름의 소규모 극우 단체를 염탐하라는 임무를 받고 뮌헨의 한 맥주홀로 향했다. 그곳에는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맥주를 마시며 지루한 연설을 듣고 있었다. 히틀러는 구석에 앉아 모든 것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 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일어나 바이에른이 독일에서 분리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순간, 히틀러의 내면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 남자에게 맹렬하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맥주홀 전체를 압도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치욕,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배신, 그리고 위대한 독일 민족의 단결을 열정적으로 토해냈다. 그의 연설은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듣는 이의 감정을 뒤흔드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의 창립자였던 안톤 드렉슬러는 히틀러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엄청난 재능을 가졌소! 우리 당에 입당해주시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히틀러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했다. 그는 군대를 떠나 이 보잘것없는 정당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그는 당원 번호 55번으로 입당했다. (선전 효과를 위해 나중에 7번으로 조작되었다.)

그는 곧 당의 선전 책임자가 되어 당의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당의 이름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즉 '나치'로 바꾸었다. 그는 붉은 바탕에 흰 원을 그리고 그 안에 검은색 갈고리 십자가(스와스티카)를 그려 넣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깃발을 디자인했다. 그는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돌격대(SA)를 창설하여 당의 집회를 보호하고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리 싸움에서 우위를 점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연설이라는 무기를 완벽하게 다듬었다. 그는 거울 앞에서 몇 시간씩 제스처와 표정을 연습했다. 그의 연설은 조용한 속삭임으로 시작하여 점차 격렬한 분노의 외침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구원의 약속으로 끝나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그는 패배감과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증오와 불안, 그리고 희망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그것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그의 연설을 들으며 울고 웃었고, 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는 스스로를 '북 치는 사람(Der Trommler)'이라 불렀다. 잠든 독일 민족을 깨우는 북소리라는 의미였다.

1923년, 프랑스가 전쟁 배상금 지불을 문제 삼아 독일의 공업 심장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히틀러는 지금이 권력을 잡을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것에 영감을 받았다.

11월 8일, 뮌헨의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바이에른 주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집회를 열고 있을 때, 히틀러는 600명의 돌격대원을 이끌고 그곳을 급습했다. 그는 권총을 들고 천장에 한 발을 쏘며 외쳤다.

"국민혁명은 시작되었다! 이 건물은 포위되었다!"

그는 바이에른 주 총리 등을 협박하여 자신의 쿠데타에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뮌헨 시내로 행진을 시작했지만, 경찰의 총격 앞에 무참히 무너졌다. 16명의 나치 당원과 4명의 경찰이 사망했다. 히틀러는 팔이 탈골되는 부상을 입고 비겁하게 도망쳤다가 이틀 뒤 체포되었다.

'맥주홀 폭동'은 완벽한 실패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탈영의 위기를 영웅의 귀환으로 포장했듯, 히틀러는 이 실패를 전설적인 투쟁의 서사로 바꾸어 놓았다.

1924년, 반역죄로 법정에 선 그는 재판정을 자신의 연설 무대로 만들었다. 그는 검사의 기소에 맞서 자신은 독일을 배신한 '11월의 범죄자들'을 심판하려 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나를 반역죄로 기소할 수는 있소. 하지만 역사의 여신은 언젠가 당신들의 기소장과 판결문을 웃으며 찢어버릴 것이오. 그리고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오!"

그의 재판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고, 그는 일약 우익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지만,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호텔과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상과 계획을 집대성한 책,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했다. 그리고 그는 폭동의 실패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폭력적인 쿠데타가 아니라,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9개월 만에 석방된 그는 나치당 재건에 착수했다. 그는 이제 합법적인 정당 활동에 집중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독일 경제가 안정되면서 나치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과격한 선동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쳤다. 독일 경제는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졌다.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 위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연립정부는 분열을 거듭했고, 의회는 마비되었다.

바로 이 혼돈이 히틀러에게는 방데미에르의 포성, 이집트에서의 귀환과도 같은 절호의 기회였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다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치는 실업자들에게는 일자리를, 중산층에게는 안정을, 군인들에게는 명예를, 그리고 모든 독일인에게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지도자(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라는 강력한 구호를 약속했다.

1930년 총선에서 나치당은 107석을 얻어 제2당으로 뛰어올랐고, 1932년 7월 총선에서는 마침내 230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1당이 되었다. 하지만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고,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보헤미아 상병' 출신인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기를 경멸적으로 거부했다.

권력은 손에 잡힐 듯했지만, 마지막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문을 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를 경멸하던 보수 우파 정치인들이었다. 전임 총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은 자신이 부총리가 되어 히틀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우리가 그를 고용한 겁니다. 두 달 안에 우리는 히틀러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설득했다. 나폴레옹을 '검'으로 쓰려 했던 시에예스와 똑같은 오만함이었다.

마침내 늙은 원수 힌덴부르크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독일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날 밤, 베를린의 거리에는 수만 명의 돌격대원들이 횃불을 들고 행진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는 갈색 셔츠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총리 관저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히틀러의 얼굴은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뮌헨의 이름 없는 염탐꾼, 실패한 쿠데타의 주모자가 마침내 권력의 심장부에 입성한 순간이었다.

프랑스의 혁명은 장군의 손에 끝났고, 독일의 민주주의는 상병의 손에 질식사할 운명에 처했다. 두 이방인은 마침내 각자의 나라에서 권력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제 그 문 안쪽에서 그들은 낡은 세계의 잔해를 치우고, 자신들의 야망으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할 터였다. 129년의 시차를 두고, 유럽 대륙에는 두 개의 거대한 폭풍이 동시에 형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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