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29 02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by 남킹


천문대의 사내는 거대한 성도(星圖) 위에 두 개의 점을 찍었다. 하나는 18세기 말의 프랑스 파리에, 다른 하나는 20세기 초의 독일 뮌헨에. 두 점은 시간상으로 129년의 간극을 두고 있었지만, 그가 보고 있는 운명의 지도 위에서는 거의 같은 좌표에 놓여 있었다.

"모든 위대한 괴물은 혼돈을 먹고 자란다."

사내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눈에는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태동하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보였다. 혁명과 전쟁. 그것은 수백만에게는 죽음과 파괴의 재앙이었지만, 운명이 선택한 두 이방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의 무대였다. 낡은 계급의 사다리가 불타 없어지고, 오직 야망과 능력, 그리고 광기만이 새로운 사다리를 놓을 수 있는 시대.

코르시카의 포병 소위는 왕의 목이 단두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오스트리아의 떠돌이 화가는 제국이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보며 자신의 저주받은 삶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혁명의 용광로는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가문, 재산, 신념, 그리고 인간성까지도. 그리고 그 펄펄 끓는 쇳물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검(劍)이 벼려지고 있었다. 하나는 공화국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조국의 구원자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두 자루의 검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게 될 운명이었다. 바로 그들을 벼려낸 세상의 심장을 향해서.

사내는 성도 위에 자를 대고 두 점을 이었다. 완벽한 평행선이었다. 소용돌이가 그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순간이 임박했다.

1789년, 프랑스 옥손

프랑스는 들끓고 있었다. 굶주린 민중들이 바스티유를 습격했다는 소식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주둔하던 옥손의 작은 연대 막사까지 전해졌다. 동료 장교들은 불안과 흥분 속에서 파리에서 날아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부분이 귀족 출신인 그들은 성난 민중들이 자신들의 성을 불태우고 가족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스무 살의 포병 소위 나폴레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막사 구석에 앉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탐독하며 혁명의 불길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그의 눈에 이 혼란은 위기라기보다는 기회였다. 자신을 억압하던 낡은 질서, 즉 혈통과 가문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앙시앵 레짐'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코르시카 출신의 가난한 이방인 장교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이제 능력만 있다면 계급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왕은 무능하고, 귀족은 부패했다. 민중은 무지하지만 그 힘은 거대하다. 이 혼돈을 지배하는 자가 프랑스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는 혁명의 이념 자체에 깊이 공감하지는 않았다. 자유, 평등, 박애 같은 구호들은 그에게 너무나 공허하게 들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아로새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초기 혁명 기간 동안 그는 코르시카로 돌아가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급진파인 자코뱅 클럽에 가입하고, 코르시카에도 혁명의 정신을 전파하려 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코르시카를 프랑스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청년 시절의 꿈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영웅으로 숭배했던 코르시카 독립의 아버지, 파스콸레 파올리를 찾아가 힘을 합치려 했다.

하지만 늙은 영웅 파올리는 프랑스 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과격함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급진적인 사상과 야심을 경계했다. 무엇보다 파올리의 눈에 나폴레옹은 이제 코르시카인이 아니라, 프랑스 군복을 입고 프랑스인의 야망을 품은 '변절자'로 보였다.

"자네에게서는 코르시카의 흙냄새가 아니라 파리의 화약 냄새가 나는군."

파올리의 냉담한 말은 나폴레옹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파올리는 오히려 영국과 손을 잡고 코르시카의 완전한 독립을 꾀했고,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을 코르시카의 반역자로 선포했다. 1793년 6월, 나폴레옹은 분노한 군중에게 쫓겨 어머니와 형제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하듯 코르시카를 떠나 프랑스 본토로 향해야 했다.

툴롱 항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고향은 그를 거부했고, 그의 가족은 무일푼의 난민 신세가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코르시카라는 정체성은 산산조각 났다. 애증의 고향은 이제 그에게 돌아갈 곳이 아닌, 언젠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좋다. 코르시카가 나를 버렸다면, 나도 코르시카를 버리겠다. 나는 이제 프랑스인이다. 아니, 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 자체다.'

이 쓰라린 경험은 그의 야망을 더욱 단단하고 냉혹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제 오직 프랑스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자신의 성공을 쟁취하는 데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마침 운명은 그에게 기회를 던져주었다. 그가 도착한 툴롱은 왕당파가 장악하여 도시와 함대를 통째로 영국과 스페인 함대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프랑스 공화국에게는 지중해의 심장에 칼이 박힌 것과 같은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공화국 군대는 툴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포병 지휘관의 무능으로 인해 몇 달째 지지부진한 공방만 계속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나폴레옹의 자코뱅 인맥이 빛을 발했다. 그는 국민공회 의원의 추천으로 포병 지휘관 대리로 임명되었다. 대위 계급의 이름 없는 장교에게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나폴레옹이 툴롱의 포병 진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집합소였다. 대포는 낡고 부족했으며, 포병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총사령관인 장 프랑수아 카르토는 원래 화가 출신으로 군사 전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정면 공격만을 고집하며 귀중한 병력과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저런 멍청이! 저렇게 정면에서 들이받기만 해서는 백 년이 걸려도 툴롱을 함락시킬 수 없다."

나폴레옹은 지도를 펼쳐놓고 밤을 새워 지형을 분석했다. 그의 천재성은 즉시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툴롱 항 자체를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항구 안쪽으로 깊숙이 뻗어 나온 레기예트(L'Eguillette)와 발라기예(Balaguier) 요새를 점령하면, 그곳에서 항구 전체를 내려다보며 영국 함대를 직접 포격할 수 있었다. 함대가 항구를 포기하고 떠나면, 툴롱은 고립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들고 카르토 사령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화가 출신 사령관은 지도조차 제대로 볼 줄 몰랐다.

"젊은 친구, 자네의 열정은 가상하지만 전쟁은 그림 그리기처럼 간단한 게 아닐세. 우리는 저기 저 도시를 공격해야 하네, 저 언덕이 아니라."

나폴레옹은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파리의 국민공회에 직접 편지를 보내 카르토의 무능을 고발하고 자신의 전략을 피력했다. 다행히 파리에서 파견된 유능한 장군 뒤고미에가 나폴레옹의 계획을 알아보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제 나폴레옹의 무대였다. 그는 주변 도시에서 대포를 징발하고, 퇴역한 포병들을 불러 모았으며, 직접 포대를 설계하고 병사들과 함께 흙을 파며 진지를 구축했다. 그는 며칠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진지를 돌아다녔다. 그의 마른 몸에서는 강철 같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병사들은 처음에는 꼬마 대위의 지휘를 비웃었지만, 곧 그의 전문적인 지식과 무서운 집중력, 그리고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모습에 감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코르시카 촌뜨기'가 아니라, 승리를 가져다줄 유일한 희망, '우리의 지휘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1793년 12월 17일 밤, 폭풍우가 몰아치는 틈을 타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가장 먼저 적의 보루로 뛰어들었다. 그의 허벅지에 영국군의 총검이 깊숙이 박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을 외쳤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마침내 레기예트 요새는 공화국 군대의 손에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나폴레옹의 예측대로 프랑스 군대의 대포들이 영국 함대를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항구는 거대한 함정과 같았다. 영국 함대는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혼비백산하여 툴롱을 탈출했다. 지휘부를 잃은 왕당파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툴롱의 승리는 프랑스 혁명 전체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승리의 중심에는 스물네 살의 포병 대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있었다.

이 공로로 그는 단숨에 육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일푼의 난민 신세였던 그가 이제 공화국의 장군이 된 것이다. 그의 이름은 파리의 혁명 정부에까지 알려졌다. 혁명의 거대한 용광로가 마침내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를 벼려내 세상에 내놓은 순간이었다. 그는 피 묻은 군복을 입고 멀리 불타는 툴롱 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작은 섬 코르시카가 아닌, 유럽 대륙 전체가 담겨 있었다.

129년 후

1914년, 독일 뮌헨

독일은 들끓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유럽 전체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었다.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뮌헨의 오데온 광장은 환호하는 군중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모자를 허공에 던지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조국'과 '전쟁'을 외쳤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축제가 시작된 것 같았다.

그 인파 속, 초라한 행색의 한 젊은이가 넋을 잃은 듯 하늘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아돌프 히틀러. 빈에서 실패와 절망을 맛보고 뮌헨으로 도망쳐 온 이 오스트리아인에게 전쟁 소식은 저주가 아닌, 구원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 의미 없는 삶을 끝내고 위대한 대의에 나를 바칠 기회가 왔다!'

그는 빈에서의 비참했던 노숙자 생활, 화가로서의 실패, 세상으로부터의 외면을 떠올렸다. 그 모든 개인적인 고통과 굴욕이 이제 '조국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깨끗이 정화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고독한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위대한 독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적들을 무찌르고 조국의 영광을 위해 싸울 전사가 될 터였다.

그는 곧바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3세에게 편지를 썼다. 오스트리아 국적이지만, 위대한 독일 제국 군대에 자원입대하게 해달라는 간청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요청은 하루 만에 받아들여졌다. 그는 환호하며 바이에른 예비 보병 16연대에 입대했다. 처음으로 군복을 입고 총을 지급받던 날, 그는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훗날 회고했다. 군대는 그에게 집이자 가족이었고, 전쟁은 그의 존재 이유였다.

히틀러는 전선에서 용감한 군인이었다. 그는 연대 본부와 최전방 참호를 오가며 명령을 전달하는 전달병(Meldegänger) 임무를 맡았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무인 지대를 홀로 달려야 하는, 가장 위험한 임무 중 하나였다. 동료들은 그를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휴가나 여자,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늘 조국의 운명과 전쟁의 의미에 대해 광적으로 열변을 토했다.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고, 막사 구석에서 홀로 신문과 정치 서적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그의 용맹함만은 모두가 인정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914년 12월, 그는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일개 상병(Gefreiter) 계급의 병사가 받기에는 매우 이례적인 영예였다. 이 훈장은 평생 그의 군복에 달려 그의 개인적인 신화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은 4년 넘게 이어졌다. 그가 처음 전쟁을 맞이했던 군중의 환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참호는 진흙과 시체,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찼다. 수많은 동료들이 그의 눈앞에서 죽어 나갔다. 하지만 히틀러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끔찍한 시련 속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혀갔다. 그는 자신이 '섭리'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믿었다. 여러 번 포탄이 바로 옆에서 터졌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나는 평범하게 죽을 운명이 아니다. 신께서 나를 살려두시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전쟁의 용광로는 나폴레옹에게서 군사적 천재성을 끄집어냈지만, 히틀러에게서는 정치적 광기를 벼려내고 있었다. 그는 참호 속에서 독일의 패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독일 민족의 우월함과 군대의 영웅적인 투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독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전선의 병사들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후방에서 조국을 좀먹는 배신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1918년 10월 13일 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했다. 벨기에 이프르 전선 근처, 그는 영국군의 겨자 가스 공격을 받았다. 숨 막히는 고통과 함께 눈앞이 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 후방의 파제발크 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두 눈에 붕대를 감은 채,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덮쳤지만, 그는 독일의 최종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승리만 한다면 자신의 두 눈 따위는 얼마든지 바칠 수 있었다.

11월 10일, 한 늙은 목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떨리는 소식을 전했다.

"조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소... 호엔촐레른 가문은 독일의 왕관을 내려놓았고, 조국은 이제 공화국이 되었소... 그리고... 우리는 휴전 협정에 서명했소. 전쟁은... 끝났소. 우리가 졌소."

그 순간, 히틀러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주변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울 수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붕대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이 빛을 잃었다.

'뭐라고? 패배? 불패의 독일 군대가 패배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년간의 희생,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 자신의 훈장,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졌다. 목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베를린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1월의 범죄자들'이 조국을 배신하고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히틀러의 머릿속에서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역시 그랬다. 전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영웅적인 독일 군대는 후방의 배신자들에게 등 뒤에서 칼을 맞은 것이다(Dolchstoßlegende).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부패한 정치인들이 위대한 독일을 팔아넘긴 것이다.

분노가 그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그는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 그렇게 서럽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굴욕과 증오, 그리고 복수심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 칠흑 같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나는... 나는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

화가의 꿈은 오래전에 죽었다. 이제 용감한 병사의 시대도 끝났다. 새로운 사명이 그의 심장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 배신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더럽혀진 조국의 명예를 되찾으며,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운명. 그 운명의 실행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만 했다.

며칠 후, 그의 시력은 기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붕대를 풀고 처음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그의 눈빛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평범한 병사의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섬뜩한 광기와 강철 같은 결의가 서린 예언자의 눈빛이었다.

전쟁의 거대한 용광로는 그의 마지막 남은 인간성마저 녹여버리고, 그 자리에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괴물을 벼려놓았다. 그는 텅 빈 눈으로 창밖의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129년 전, 툴롱의 젊은 장군이 유럽을 향해 야망의 시선을 던졌던 것처럼, 파제발크의 이름 없는 상병은 무너진 조국을 바라보며 파멸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소용돌이는 이제 두 괴물을 세상의 중심으로 밀어 올릴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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