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29 04화

새로운 황제, 새로운 총통

by 남킹


천문대의 사내는 렌즈를 조절하여 두 시대의 심장부를 들여다보았다. 파리와 베를린. 권력의 문턱을 넘어선 두 남자는 이제 그 권력을 자신의 몸에 영원히 새기는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권력은 칠하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이다. 한번 새겨지면 피부를 벗겨내기 전에는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국가라는 유기체에 자신의 의지를 낙인하는 과정.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통령과 총리. 이 직함들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유물, 즉 법과 제도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야망은 법과 제도를 넘어선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의 대리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 그 자체가 되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했다.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연극이, 필멸자를 역사의 화신으로 끌어올리는 장엄한 의식이 필요했다. 한 명은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의 왕관을, 다른 한 명은 스스로 창조해낸 신성한 칭호를 원했다.

그들이 권력을 새기는 방식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먼저, 외부와 내부의 적을 향한 공포를 조장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나 없이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믿음을 퍼뜨린다. 다음으로, 그 공포를 잠재우는 대가로 더 큰 권력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이름으로, 민의의 이름으로 그 권력을 찬탈하여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국민이 원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다.

"왕관의 무게는 피의 무게와 같다."

사내는 중얼거렸다. 두 개의 대관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하나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배경으로, 다른 하나는 뉘른베르크의 횃불 바다를 배경으로. 무대와 의상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관 뚜껑에 마지막 못을 박는 소리가, 129년의 간극을 두고 유럽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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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에 질서를 가져왔다. 그는 혁명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행정, 법률, 재정을 개혁했다. 가톨릭교회와의 화해를 통해 종교적 안정을 되찾았고(정교협약),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함을 명시한 '나폴레옹 법전'의 기틀을 닦았다. 굶주렸던 파리 시민들은 다시 빵을 얻었고, 부르주아들은 재산을 보호받았다. 그는 전쟁 영웅일 뿐만 아니라, 유능한 행정가이자 구원자였다.

하지만 평화는 그의 야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의 권력은 여전히 '10년 임기의 제1통령'이라는 법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다. 언제든 암살당하거나 정치적 반격에 의해 실각할 수 있는 불안정한 자리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영속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만들 방법을 찾고 있었다.

기회는 그의 적들이 만들어주었다. 영국에 망명 중이던 왕당파 지도자 조르주 카두달이 나폴레옹을 암살하고 부르봉 왕가를 복원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영국의 자금 지원을 받은 암살단이 파리에 잠입했다. 경찰 총감 조제프 푸셰의 촘촘한 정보망이 이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1804년 초, 파리는 암살의 공포에 휩싸였다. 주모자들이 차례로 체포되었고, 그들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름이 거론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혈통을 이은 젊은 공작, 루이 앙투안 앙리 드 부르봉콩데, 즉 앙기앵 공작이 음모의 배후라는 것이었다. 비록 심증뿐이었고, 앙기앵 공작은 프랑스 국경 너머 중립국인 바덴 공국에 머물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 생겼다.

그는 부르봉 왕가에 피의 경고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1804년 3월 15일, 그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기병대가 중립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국경을 넘어 앙기앵 공작을 납치했다. 파리 근교의 뱅센 성으로 끌려온 공작은 졸속으로 열린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도, 증인도 없는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앙기앵 공작은 결백을 주장하며 나폴레옹과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3월 21일 새벽, 그는 성의 해자 옆에 미리 파놓은 자신의 무덤 앞에 서야 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총살대의 지휘관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나는 무고하게 죽소. 프랑스를 위해 죽을 수 있기를 항상 바랐는데... 부디 내 머리카락 한 줌과 결혼반지를 나의 아내에게 전해주시오."

총성이 울리고, 유럽의 가장 유서 깊은 왕가의 피가 프랑스의 흙을 적셨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의 왕실을 경악시켰다. 나폴레옹의 가장 열렬한 숭배자들조차 그의 냉혹함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의도한 효과를 정확히 얻었다. 이제 누구도 감히 그에게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구체제의 상징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이 혁명의 아들이자 그 수호자임을 만천하에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공포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의 측근들은 "제1통령의 생명이 이렇게 위험에 처해 있다면, 프랑스의 안정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라는 논리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사라지면, 프랑스는 다시 혼란과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의 권력을 세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뿐이다."

원로원은 이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나폴레옹에게 프랑스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제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역설이었다.

나폴레옹은 마지못해 수락하는 연기를 펼쳤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국민의 뜻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350만 표가 찬성, 반대는 고작 2,500표에 불과했다. 물론 투표 과정은 조작과 협박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결과는 중요했다. 그는 이제 군대의 힘뿐만 아니라, '인민의 의지'에 의해 추대된 황제가 된 것이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기로 결정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대관식이 과거 부르봉 왕가의 대관식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샤를마뉴 대제의 후계자이자,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존재로 자신을 포장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그는 교황 비오 7세를 파리로 '모셔'와 자신의 대관식을 축성하도록 압박했다. 교황이 직접 황제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워주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신성한 전통이었다.

12월의 파리는 혹독하게 추웠다. 대성당 내부는 수천 개의 촛불로 밝혔지만,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교황은 몇 시간이나 나폴레옹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나폴레옹과 황후 조제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고대 로마 황제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벨벳과 황금 자수가 놓인 예복을 입고 있었다.

장엄한 미사가 진행되고, 마침내 대관식의 절정의 순간이 왔다. 교황 비오 7세는 성유를 바른 뒤, 샤를마뉴의 것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왕관을 제단에서 들어 올렸다. 그가 나폴레옹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우려던 바로 그 순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나폴레옹은 두 손을 뻗어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직접 가져왔다. 그리고 돌아서서, 스스로 자신의 머리 위에 왕관을 썼다.

성당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이것은 계획에 없던 행동이었다. 교황은 모욕감과 당혹감에 얼굴이 굳었다. 이 행위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나의 권력은 신이나 교황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의 힘과 프랑스 국민의 의지로 쟁취한 것이다.' 그는 신의 대리인을 자신의 대관식을 위한 소품으로 전락시켰다.

이어 그는 더 작은 왕관을 들어 올려, 무릎을 꿇고 있는 아내 조제핀의 머리에 부드럽게 씌워주었다. 황제의 냉혹함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이 잠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대관식이 끝나고, 그는 옥좌에 앉아 선서를 했다.

"나는 공화국의 영토를 보전하고, 정교협약과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며, 자유와 평등의 원칙, 그리고 재산권과 조세 제도의 평등을 수호할 것을 맹세한다. 나는 오직 프랑스 국민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서만 통치할 것을 맹세한다."

'황제'가 '공화국'을 수호하고 '평등'을 맹세하는 모순.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이제 나폴레옹 1세의 제국이 되었다. 혁명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이제 혁명을 삼켜버린 거인이 되었다. 코르시카의 이방인 소년은 마침내 샤를마뉴와 카이사르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은 가장 미끄러운 곳이기도 했다. 왕관의 무게는 이제부터 그의 영혼을 짓누르기 시작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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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30일, 독일의 총리가 된 아돌프 히틀러는 아직 완전한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의 내각에는 나치 당원이 고작 3명뿐이었고, 대부분은 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보수파 인사들이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여전히 군 통수권을 쥐고 있었고, 의회(라이히스타크)는 언제든 그의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이 족쇄를 단숨에 부수어 버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회는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찾아왔다. 2월 27일 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았다.

화재 현장에 도착한 히틀러의 얼굴은 분노와 결의로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불타는 건물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것은 신의 신호다! 이제 자비는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시작했다! 모든 공산당 간부들을 오늘 밤 안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

화재 현장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판데어루버가 체포되었다. 그가 단독으로 저지른 방화인지, 나치가 조작한 음모인지는 역사적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국가 전복 음모'로 규정하고,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늙고 병든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찾아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설득했다.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령', 즉 '국회의사당 화재령'이 공포되었다. 이 법령은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하던 모든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를 무기한 정지시켰다. 인신 보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이제 정부는 영장 없이도 누구든 체포하고 재산도 몰수할 수 있었다.

독일 전역에서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돌격대(SA)와 경찰은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노조 지도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체포했다. 최초의 강제 수용소인 다하우가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체계적인 고문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독일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 공포 분위기 속에서 3월 5일 총선이 치러졌다. 나치당은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하고 폭력을 행사했지만, 결과는 43.9%의 득표율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서는 결코 절대 권력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의회 자체를 무력화시키기로 결심했다.

3월 23일, 임시 건물인 크롤 오페라하우스에서 새로운 국회가 소집되었다. 그날의 안건은 '민족과 국가의 고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 즉 '수권법(Ermächtigungsgesetz)'이었다. 이 법안은 입법권을 의회에서 행정부로, 즉 히틀러 내각으로 이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실상 의회 민주주의의 사망 선고와 같은 법안이었다.

오페라하우스 주변은 무장한 돌격대와 친위대(SS) 대원들이 삼엄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의원들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장으로 입장해야 했다. 히틀러는 연단에 올라 연설했다. 그는 조국의 통일과 재건을 약속하며, 이 법안이 '평화적인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에 맞서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오토 벨스가 목숨을 건 반대 연설을 했다.

"여러분은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명예는 빼앗을 수 없소! 우리는 이 순간, 박해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대표하여 이 법안에 반대하오!"

그의 용감한 연설이 끝나자, 히틀러는 광기 어린 분노로 답했다.

"나는 당신들의 표 따위는 필요 없다! 독일의 별은 떠오르고 있고, 당신들의 별은 지고 있다! 당신들의 상여를 울리는 종소리가 이미 들리고 있단 말이다!"

결국 투표가 시작되었다.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체포되었거나 도주하여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 중도파와 우파 정당들은 돌격대의 협박과 히틀러의 회유에 굴복하여 찬성표를 던졌다. 수권법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제 히틀러는 의회나 대통령의 동의 없이도 4년간 마음대로 법률을 만들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는 아직 마지막 장애물이 남아있었다. 바로 그를 권력으로 이끌었던 돌격대(SA)와 그 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4백만 명의 대원을 거느린 돌격대는 이제 정규군(라이히스베어)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룀은 '제2의 혁명'을 원했다. 그는 돌격대가 정규군을 흡수하여 새로운 인민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히틀러의 보수적인 동맹자들인 군부와 자본가들을 공격했다.

히틀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자신의 오랜 동지인 룀과 돌격대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핵심 기반인 군부와 산업계의 지지를 선택할 것인가.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1934년 6월 30일 새벽, '벌새 작전(Operation Hummingbird)'이라는 암호명 아래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히믈러의 친위대(SS)와 괴링의 경찰 부대는 돌격대의 지도부를 급습했다.

히틀러는 직접 비행기를 타고 뮌헨 근교의 바트비제에 있는 룀의 휴양지로 날아갔다. 그는 권총을 들고 룀이 잠든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소리쳤다.

"룀, 너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룀을 비롯한 돌격대 간부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숙청의 칼날은 돌격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 기회에 자신의 잠재적인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다. 전임 총리였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나치당 내의 라이벌이었던 그레고어 슈트라서 등 수백 명이 재판 없이 살해당했다. 3일간의 학살극이 끝나고, 돌격대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히틀러는 군부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약속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934년 8월 2일, 마지막 장애물이 자연적으로 사라졌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86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히틀러는 대통령직을 선출하는 대신, 총리직과 대통령직을 통합하여 '총통 겸 국가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만들었다. 그는 이제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며, 군 통수권자였다.

8월 19일, 이 조치를 승인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90%에 가까운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그날, 독일 국방군의 모든 장병들은 더 이상 헌법이나 조국이 아닌,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나는 독일 국민과 국가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며, 용감한 군인으로서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언제든지 나의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제 법도, 의회도, 군대도 모두 한 사람의 의지 아래 놓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실패한 화가는 마침내 8천만 독일 민족의 운명을 한 손에 쥔 절대적인 지배자, '총통(Führer)'이 되었다. 그는 노트르담의 황제처럼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군대의 충성 맹세와 국민의 광적인 환호 속에서 그보다 더 공고한 권력의 옥좌에 올랐다. 그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고, 그가 이끄는 제3제국은 유럽을 피로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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