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구원인가 저주인가

by 남킹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의 내부는 거대한 석관(石棺)의 내부처럼 고요하고 서늘했다. 바깥세상의 축축한 안개와 소음은 육중한 문지방을 넘지 못했다. 대신, 수백 년 된 시간의 먼지와 마른 유화물감, 왁스로 윤을 낸 마룻바닥의 냄새가 섞여 성스러운 동시에 질식할 듯한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발소리는 텅 빈 공간 속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높은 돔 천장에 부딪혔다가 다시 그들의 등 뒤로 유령처럼 따라붙었다.

프란츠 카프카에게 이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판정의 엄숙한 정적이었다. 양쪽 벽을 따라 도열한 수많은 초상화 속 인물들은 그저 물감으로 그려진 형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판사이자 배심원이었고, 냉담하고 권위적인 눈으로 자신을, 프라하에서 온 이 불청객을, 감히 이 위대한 질서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이단자를 심문하고 있었다. 그는 갑옷을 입은 공작의 경멸적인 시선 아래서 몸을 움츠렸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의 오만한 눈초리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 미술관은 그에게 또 다른 형태의 아버지였다. 거대하고, 반박할 수 없으며, 그의 존재를 하찮게 만드는 압도적인 권위 그 자체였다. 그는 이 완벽한 조화와 질서의 세계에서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갑충처럼 이질적이고 부적절한 존재라고 느꼈다.

반면 버지니아 스티븐은 이 공간의 공기를 물 만난 물고기처럼 들이마셨다. 그녀에게 이 정적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응축된 살아있는 창문이었다. 그녀의 회색 눈은 탐욕스럽게 빛나며 공간을 훑었다. 그녀는 색채의 조화, 구도의 균형, 빛의 방향을 분석하는 동시에 그 그림이 그려지던 순간의 소리와 냄새, 화가의 떨리는 손, 모델의 지루한 한숨까지 상상하려 애썼다. 그녀에게 미술관은 과거를 박제해 놓은 곳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인간 의식의 가장 깊은 곳을 탐사할 수 있는 거대한 잠수정과도 같았다.

토비는 두 사람의 중간에 서서, 이 극명한 반응의 차이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는 미술관을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작품의 역사적 배경과 화가의 생애, 기법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각각의 걸작 앞에서 적절한 감탄사를 내뱉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 방문이 누이동생의 지적 유희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저 청년의 기분을 풀어주는 즐거운 사교 활동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는 아직 이 공간이 세 사람의 영혼을 발가벗기는 잔혹한 투기장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독일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된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방의 중앙, 가장 좋은 조명을 받고 있는 한 그림 앞에서 세 사람 모두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1500년 작, <28세의 자화상>이었다.

그림 속의 뒤러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전통적인 초상화의 옆모습이나 비스듬한 구도를 거부하고,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나 사용되던 신성한 정면 구도를 취하고 있었다. 길고 검은 곱슬머리는 어깨까지 흘러내렸고, 잘 다듬어진 수염과 섬세한 얼굴선은 고뇌하는 현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른손은 마치 축복을 내리듯 가슴께에 소중하게 얹혀 있었고, 모피로 장식된 화려한 외투는 그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배경은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토비가 먼저 입을 열어, 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케임브리지에서 배운 교과서적인 지식이 담겨 있었다.

"정말 대단하지. 뒤러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참이었어. 그는 더 이상 중세의 이름 없는 장인이 아니라, 신에게 창조의 능력을 부여받은 독립적인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이 그림을 통해 선언하고 있는 거야. 자신을 그리스도의 형상과 겹쳐 놓음으로써, 예술가의 창조 행위가 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대담하고 혁명적인 선언이야."

버지니아는 오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림의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그 표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적인 진실에 더 관심이 있었다.

"선언이라... 글쎄, 나는 저 눈에서 선언보다는 질문을 읽게 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저 눈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눈이야. 저 완벽한 구도와 자세, 저 화려한 옷차림 아래에서 그는 묻고 있는 거지. '나는 누구인가? 예술가란 무엇인가? 내가 그려내는 이 이미지가 과연 진짜 나인가?' 이건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감의 근거를 찾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여. 그는 지금 완벽한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카프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프카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프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에 완전히 매혹되어 있었다. 그는 토비가 말한 역사적 배경에도, 버지니아가 말한 심리적 갈등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림의 표면,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뒤러가 한 올 한 올 그려 넣은 머리카락, 모피의 부드러운 질감, 피부의 미세한 굴곡.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선(線)'이었다. 명확하고, 단호하며,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그 안에는 섬뜩할 정도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저주라고요?" 토비가 놀라서 되물었다.

"네." 카프카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저 눈을 보십시오. 저 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분해하고, 분석하고,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서 선으로 재구성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눈입니다. 저 손을 보십시오. 저 손은 세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붙잡아서 종이 위에, 저 칠흑 같은 어둠 위에 고정시켜야만 하는 손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그림에 다가갔다.

"이 그림에는 공기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죠. 저 머리카락 한 올조차 제멋대로 날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혼돈이 두려워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이토록 집요하게 선을 긋고 있는 겁니다. 그는 선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철창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예술은 그에게 구원이 아니라,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자, 벗어날 수 없는 형벌입니다. 그는... 그는 자신의 시선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죄수입니다."

카프카의 말은 그 방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토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뒤러의 자화상을 평생 그렇게 해석해 본 적이 없었다. 버지니아는 숨을 죽인 채 카프카를 바라보았다. 그의 해석은 기괴했지만, 동시에 무서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뒤러의 그림 속에서 자기 자신의 초상을 보고 있었다. 언어라는 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통제하려 하지만, 결국 그 언어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작가의 초상.

"그렇다면," 버지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정한 자화상은 어떻게 그려져야 할까요? 이 완벽한 통제를 넘어서는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카프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를 가둔 감옥의 벽을, 그 벽의 균열을 최대한 정직하게 그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뒤러의 그림을 뒤로하고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방금 전의 대화는 세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 동시에, 카프카와 버지니아 사이에는 기묘한 다리를 놓아주었다. 토비는 이제 완전히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이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다음 방은 바로크 시대의 거장, 피터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뒤러의 방이 고요하고 지적인 명상의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감각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전장이었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는 뒤엉킨 인간과 동물의 근육질 몸뚱이, 피와 땀, 격렬한 움직임과 폭발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그들의 시선은 거대한 <사자 사냥>이라는 그림에 꽂혔다. 화면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성난 사자들이 말과 사냥꾼들에게 달려들고 있었고, 사람들은 창과 칼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모든 것이 격렬한 대각선 구도 속에서 뒤엉켜 있었다. 말의 공포에 질린 눈, 사자의 벌어진 입, 죽어가는 남자의 고통스러운 표정, 꿈틀거리는 근육의 힘. 그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명처럼 보였다.

카프카는 이 그림 앞에서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뒤러의 통제된 세계가 그에게 익숙한 감옥이었다면, 루벤스의 이 혼돈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힘이었다. 이것은 논리가 없는, 순수한 본능의 세계였다.

"이것은... 소음 덩어리군요." 그가 경멸적으로 내뱉었다. "의미 없는 고통의 전시회입니다. 저 안에는 어떤 심리도, 어떤 사유도 없습니다. 그저 살과 피의 요란한 오케스트라일 뿐입니다. 저 인물들은 고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비명을 지를 뿐입니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도살장의 기록입니다."

그에게 이 그림은 아버지의 세계와 닮아 있었다. 거칠고, 시끄럽고, 육체적인 힘을 숭배하며, 내면의 섬세함을 경멸하는 세계.

그러나 버지니아는 달랐다. 그녀 역시 이 그림의 야만성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압도적인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뒤러의 정적인 세계가 놓치고 있는 것을 이 그림이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음이라고요? 저는 오히려 '삶' 그 자체의 외침처럼 들리는데요." 그녀가 반박했다. "물론 이건 명상의 대상이 아니에요. 이건 경험의 대상이죠. 뒤러가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강요한다면, 루벤스는 우리에게 느끼라고 강요해요. 말의 콧김, 피 냄새, 찢어지는 살의 비명. 그는 이 모든 감각을 하나의 폭발적인 순간에 압축해서 우리 눈앞에 던져놓고 있어요. 이건 심리가 없는 게 아니에요. 심리가 생각할 틈도 없이, 행동과 감각이 모든 것을 지배해 버리는 순간을 포착한 거죠."

그녀는 그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걸 어떻게 글로 쓸 수 있을까요? '사냥꾼이 사자를 찔렀다'와 같은 평범한 문장으로는 이 에너지를 절대 담아낼 수 없어요. 단어들이 서로 충돌하고, 문법이 파괴되고, 문장들이 그림 속의 몸들처럼 뒤엉켜야만 해요. 소음, 맞아요. 하지만 그건 삶의 본질적인 소음이에요. 우리가 점잖은 응접실에 앉아 애써 외면하려는, 바로 그 혼돈의 소리."

카프카는 고개를 저었다. "혼돈은... 그렇게 시끄럽지 않습니다. 진짜 혼돈은 고요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방 안으로, 당신의 침대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듭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당신은 당신이 더 이상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것이 진짜 공포입니다. 저것은 그저 야만일 뿐입니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고 있었다. 카프카에게 진실은 내면의 조용한 붕괴에 있었고, 버지니아에게 진실은 그 내면의 붕괴와 외부 세계의 감각적 폭발 사이의 상호작용에 있었다. 그들의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는 기차처럼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토비는 이쯤에서 그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지적인 긴장감에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몇 개의 방을 더 말없이 지나쳤다. 서로의 해석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젯밤의 만남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독한 섬의 해안선을 잠시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어색하고 차가운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그러다 그들은 네덜란드 화가들의 방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방의 가장 안쪽, 부드럽고 어두운 조명 아래 걸려 있는 한 그림 앞에서, 세 사람의 발걸음은 다시 한번 운명처럼 멈춰 섰다.

렘브란트 판 레인의 <아브라함의 희생>이었다.

그림은 성경의 가장 끔찍하고 불가해한 순간을 담고 있었다. 늙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든 바로 그 찰나, 천사가 나타나 그의 손을 막는 극적인 순간. 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은 루벤스와 같은 극적인 과장이 없었다. 모든 것이 깊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빛이었다. 천사의 날개에서 발하는 신성한 빛이 이삭의 창백하고 연약한 나신을 비추고, 아브라함의 주름진 이마와 떨리는 손, 그리고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는 칼날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주변의 어둠을 더욱 깊고 무겁게 만들었다.

가장 압도적인 것은 아브라함의 얼굴이었다. 그의 한 손은 이삭의 얼굴을 거의 질식시킬 듯이 세게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방금 천사에 의해 제지당한 칼을 놓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고뇌와 공포, 슬픔과 경악, 그리고 신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성자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 한 명의 늙고 나약한 인간이었다.

카프카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는 이 그림 앞에서 뒤러의 자화상이나 루벤스의 사냥 그림을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그의 이야기였다.

그는 그림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거칠고 큰 손, 아들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덮어버리는 그 손은 아들 프란츠의 영혼을 짓누르는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의 손이었다. 그리고 그 불가해한 명령(아들을 죽여라/법률가가 되어라)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버지의 세계에 맞서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법정..." 카프카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 버지니아가 그의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이것이 바로... 법정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피고인입니다. 그는 신이라는, 그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법정의 판결 앞에 서 있습니다. 그의 죄목은 '믿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여야만 자신의 무죄를,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부조리한 소송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천사를 보십시오. 천사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는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법정의 서기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풀려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재판은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그는 평생 저 순간의 공포를 안고, 언제 다시 호출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는 그림을 둘러싼 어둠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어둠... 저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진실은 저 빛나는 작은 부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삼키고 있는 저 거대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저렇게 섬광처럼 비추는 의미 모를 빛(천사의 등장)을 보지만, 결국에는 저 어둠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렘브란트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버지니아는 카프카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 그림에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카프카와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 어둠을 보았지만,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빛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뒤러는 선으로 모든 것을 정의하려 했고, 루벤스는 색과 형태로 모든 것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는 그리는 대신, 지우는 법을 택했다. 그는 빛으로 그려야 할 최소한의 것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어둠의 영역으로, 즉 독자의 상상력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이것이다. 그녀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찾고 있던 방법이었다.

"카프카 씨 말이 맞아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어둠이 바로 세상이죠. 하지만 저는... 저 빛이 희망처럼 느껴져요. 렘브란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는 뒤러처럼 모든 머리카락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죠. 그는 우리가 보아야 할 단 하나의 진실, 즉 아브라함의 손, 이삭의 몸, 그 순간의 감정만을 빛으로 드러내요. 나머지는 어둠 속에 남겨두죠. 바로 그 남겨진 어둠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이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삭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저 천사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상상하게 되죠. 그는 우리에게 완성된 이야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만을 보여주고, 우리를 그 이야기의 공모자로 만들고 있어요."

그녀는 카프카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림에서 반사된 희미한 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방식이에요.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오만함을 버리고, 삶의 가장 빛나는, 혹은 가장 어두운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과 어둠 속에 남겨두는 것. 독자들이 그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메아리를 듣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만의 빛을 찾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뒤러의 선과 루벤스의 형태가 아니라, 바로 이 빛과 그림자 사이의 투쟁. 그것이 바로 우리의 언어가 되어야 해요."

그 순간, 카프카와 버지니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논쟁의 불꽃이 없었다. 대신, 깊은 이해와 동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서, 자신들의 그토록 달랐던 두 세계가 만나는 단 하나의 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카프카의 '어둠(부조리한 세계)'과 버지니아의 '빛(의식의 섬광)'. 그 두 가지가 공존하지 않으면, 진정한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을.

토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들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강렬한 교감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인류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예술가가, 또 다른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앞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의 유일한 증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말없이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미술관의 정적은 더 이상 심판의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시의 침묵이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바로 이 어둡고 오래된 그림 속에서 함께 발견한 것이다. 예술은 그들에게 저주인 동시에, 아주 희미한 구원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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