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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커 Nov 14. 2023

썸 탔던 사이

    "그래서 우리는 무슨 사이야?"

    유리의 물음은 꽤나 날카로왔기에 기범은 어, 어, 하며 입을 벙긋거릴 뿐이었다. 우리는 무슨 사이냐, 한 달 동안 아침의 안부를 묻고,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몇 통의 전화를 하고, 몇 끼니의 밥을 나눠 먹고, 자연스레 카페에 들러 몇 잔의 커피를 마시고, 오늘은 유리가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도 함꼐 본 우리는 무슨 사이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기범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왠지 자신의 대답 이후에 큰 변화가 발생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 어, 우리가 무슨 사이긴……."

    "한 달째 썸 탔잖아. 너 지금 얼버무리는 거야?"

썸 탔잖아. 익숙한 말이었다. 기범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터넷 상에서도, 어딘가에서 흔하게 뻔하게 들려오던. 심지어 기범 자신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더 이상 어딘가에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유리를 에워싸는 단어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자 기범은 역설적이게도 앞에 앉은 유리의 존재를 망각한 채로 사색에 잠들었다.

    기범은 익숙하지만 낯선 그 말을 한 글자씩 곱씹어보기로 했다.

    썸, 편협한 발상을 내세워 '썸'을 썸띵(something), 그러니까 '무언가'라고 가정하겠다. 사실 가정이 무의미한데, 그 이유로는 가정이 참이라면 그 자체로 썸이 무언가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고, 설령 가정이 거짓이라 해도 미꾸라지마냥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아닌 무언가, 그러한 무언가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다음으로 '타다'는 건 다소 중의적이므로, 기범은 난감했다. 한 편으로는 여태껏 자신이 수득한 언어의 한계를 체감하여 무력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결론이 오답에 이를지언정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동음이의어로 유리의 물음을 억측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는 그의 역량을 퇴연히 받아들여 '타다'라는 동사를 두 가지 의미로 추려내었다. 이는 '탑승하다'라고도 해석될 수 있으며 '연소하다'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한 달째, 무언가, 탑승했잖아.

    한 달째, 무언가, 연소했잖아.

    기범은 미묘한 부끄러움에 휩싸여 손을 볼에 괴고 웅얼거렸다. 깊은 모래 속 속삭임이 그에게 다가와 바늘을 들이밀어 귓바퀴를 찔렀다. 그는 번뜩였다. 유리의 말에는 분명한 주체가 있다. 유리가 말을 나눠서 했기에 흐릿해져 버렸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이다. 썸을 타는 존재가 '우리'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한 달째 무언가 탑승했잖아.

    우리느 한 달째 무언가 연소했잖아.

    그는 주체를 발견함으로써 두 번째 문장은 비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언가'는 구천을 떠도는 단어가 되므로. 우리는 한 달째 무언가 연소시켰잖아라고 정정하면 모를까. 우리는 무언가를 연소시키는 발화자(發火者)가 될 수는 있으니.

    그러니 우리는 한 달 동안이나 무언가에, 그것도 함께, 탑승한 것이다. 기범을 썸을 그저 무언가라고 지칭하기로 했지만서도 도대체 어떤 무언가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마땅한 예시가 떠오르지 않거니와, 정답이 하나일 리가 없지 않은가. 곰곰이…….

    버스? 택시? 파도? 작두? 애간장?

    기범은 더 이상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뭘 탔다는 거야?"

    "무엇인지가 중요해?"

    유리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뭘 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이 순간의 우리는 무언가에 이미 타 올랐기 때문이다. 벌써 과거형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유리는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리는 진작부터 이 곳에서 하차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벨을 누른 것이다. '저 이번에 내려요.'하고 선언한 것이다.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기범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아니, 두 가지이다. 함께 내리거나, 내리지 않거나.

    무언가에 언제, 어떻게 탔는지도 모르는 자신이었다. 하물며 내리는 바법을 알기는 할까?

    기범은 특유의 수동성과, 이에 대비되는 반발심이 들었다. 내리는 방법을 몰랐으며, 그러니까 내릴 자신이 없었으며, 그러니까 내리는 방법을 알고 싶지 않았따. 방법을 알게 되면 내리지 않는 게 아니라 내리지 못하는 것일 테니까. 오히려 내리는 방법을 몰랐다는 명분이 내리지 않았음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누군가가 그를 들쳐업고 내려준다고 한 들 내리는 행위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가 좋았다.

    하지만 기범은 인식하지 못하였다 유리가 곧 내린다는 것을 인지하였음에도, 다 알았음에도, 그는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가 원하는 '이대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 그 어딘가에서도 유리는 부재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대로는 없었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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