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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4시간전

에스프레소에 취한 나

산미 있는 커피는 뭐랄까, 한약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진한 보리차 맛의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카누커피 같은 것. 아니면 스타벅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구수한 맛.


몇 달 전에 친구가 부암동에 커피를 잘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따라간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고로 커피라고 함은 산미가 나야 한다며. 그게 고급 원두라며.


나 그거 싫은데!

아직 진정한 커피를 못 먹어봐서 그래. 여기는 달라.


카페에 갈 때마다 아메리카노를 시키지만 한 번도 산미를 좋아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갔던 모든 카페는 진정한 커피가 아니었던 건가, 하는 시무룩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들렀던 공간에 대한 애정이었다.

동시에 어쩌면 정말 진정한 커피를 마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챙겨서 그를 쫄쫄쫄 따라갔다.


필터커피 종류 세 개, 아메리카노, 라테, 등등... 뒤에 건 볼 필요 없댄다. 그냥 필터커피를 시키면 된단다. 커피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이미 필터커피 하나는 품절. 남은 두 개를 하나씩 시켜서 나눠 먹었다.


결론: 역시나 내 취향이 아니었던 것.

김 빠져...


친구는 옆에서 이렇게 저렇게 커피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만, 다시 한번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한 모금을 들이켜보아도, 바로 으에에 하면서 표정이 일그러져버린다.


그리고는 푸흐흐. 내가 싫다고 했지!


두 명의 사람이 있으면 혓바닥도 두 개. 교환 불가.

혓바닥에도 자아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각자 뇌에 전달하는 맛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같은 커피를 마신 적이 없다. 그 누구도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이후로는 자신 있게 어느 카페를 가든 주문 전에 산미가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고 하면 라테나 차로 선회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서, 그 친구의 집들이에 초대받은 날이 어제였다. 역시 커피를 좋아하는 그는 부엌 한 편을 미니카페로 개조해 두었다.

몇백만 원짜리 커피머신을 집에 두는 사람. 커피머신을 두고 싶어서 이사를 한 게 분명해. 인테리어를 할 때 한껏 들떠있었을 친구 모습이 떠올라 대견하고 흐뭇했다.


에스프레소 마셔볼래?


가벼운 말투였지만, 어젯밤부터 나에게 에스프레소를 먹여보고 싶었던 거지?

산미를 싫어하는 내 취향을 바꾸고 싶어 했던 그였다. 어떻게 하면 내 혓바닥이 산미를 좋아할지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었으리라.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좋아.


잔뜩 신나서 원두를 갈고 샷을 내려 에스프레소 잔에 담아내어 준다. 집 안 가득 원두향. 이런 향수 어디 없나. 가방에 원두를 담아 다녀야 하나. 주머니에 두 알씩 넣어 다닐까.


에스프레소는 처음이기에 살짝 겁이 났지만, 혓바닥에 양해를 구하고, 놀라지 않게 입술에 조금 묻혀서 초릅.


그 와중에도 그는 에스프레소는 한 입에 털어 넣어야 한다며 잔소리를 해대었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좀 기다려봐.


음~

묵직한 산미가 훅 들어왔다가 금세 입 안이 꼬숩하고 쌉싸름해졌다. 이게 그 유명한 바디감인가? 혓바닥으로부터 번지는 풍미. 그동안 또 다른 한 샷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서 옆에 건네주었다.


으엑,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내가 늘 알고 있던 산미만 가득하고 퀴퀴한 액체였다.

이건 네가 다 먹어.


우리는 잔뜩 신이 났다. 에스프레소는 내 취향 그

자체였다. 향수를 뿌린 듯 온몸에 다채로운 원두향이 배었고, 그 향은 쉽사리 사라지지도 않은 채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오늘 글을 쓰러 카페에 온 나는 괜히 카페 사장님께

"에스프레소도 판매하시나요?"


하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

여기는 산미가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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