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는 하루면 끝나”
이 말을 지금까지 4천 번 정도 들었지만, 갈대 같은 내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찍어먹기만 하고 달아나고 싶진 않아’의 마음을 단단히 하고 있기 때문에, 늘상 속으로 대답했다.
“부다페스트는 하루면 시작해.”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이야기하자면, 찍먹 여행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찍어먹기가 여행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취향이라고 함은, 찍먹 후 부먹 시스템.
여행지에 도착하면 짐을 숙소에 맡겨두고 나와서 구글맵에 유명하다는 곳을 찍고 근처로 걸어간다. 그렇게 하루 종일 주변을 걸으며 동네 분위기를 파악한다. 소중한 찍먹의 시간.
동시에 틈틈이 생각해 둔다. 내일 점심은 이 가게 테라스에서 먹으면 좋겠다. 고기도 먹고 싶네, 아, 아랫동네에 슈바인학센 맛집이 있댔어. 한 번 사전답사 가보자.
여행 첫날이었던 어제 나는 찍먹을 하느라 3만보를 넘게 걸었다. (일상 같은 여행을 한대 놓고 이렇게 빨빨거리기 있나? 초반이라 흥분한 것 같으니 이해해 주자.) 문제는 오늘이 부다페스트 마지막 여행날이라는 것. 내일은 친구를 만나러 비엔나로 넘어가야 했으므로 나에게 주어진 부먹의 시간은 오늘뿐이었다.
하루라도 있는 게 어디냐고? 하지만 나는 어제저녁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하루로는 부족해.’
부다페스트는 하루 만에 시작하는 동네가 아니었다.
사실 걷기를 포기하면 찍어먹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워낙 걷는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길거리 골목골목이 후다닥 지나치기 아까울치만큼 감탄스러웠기 때문이다. 낮과 밤, 그 사이의 시간, 모든 시간에서 모든 장소가 영화에서 보던 장면의 향연이었다.
선택해야 했다. 어제 봐둔 곳을 다시 갈 것이냐, 못다 본 곳을 가볼 것이냐.
나는 금세 결정했다. 부다페스트는 찍먹모드로 가자. 아직 만나지 못한 동네에 대한 궁금증을 덮어놓고 부먹모드로 돌아설 수도 있었지만, 또 여행에 아쉬움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냐면서도, 아직은 여행 초반기. 힘이 남아돌기 때문에 보고 싶은 곳이 있음에도 어제 가봤던 동네에서만 머물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다. 찍먹이고 부먹이고 모두 소중한 여행방식이지만, 가장 소중한 건 내 마음. 마음 가는 대로 몸도 따르는 게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 지치면 어련히 알아서 일상을 살아가겠지, 싶었다.
게다가 오늘은 어제와 달리 무려 7시간이나 숙면을 했다. 어젯밤 11시에 씻지도 않고 제일 먼저 잠이 들어서, 역시나 세명의 룸메가 들어오는 동안, 그들이 씻고 치우고 부스럭거리고 이러쿵저러쿵거린 것을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쿨쿨 잘만 잤다. 룸메이트 말로는 꽤 시끄러웠는데 한 번을 안 깨서 엄청 둔한 분이 오셨나 보다 생각했단다. 지금까지 잠 못 드는 나날을 걱정했던 나는 또 머쓱. 생각보다 공동생활이 너무 잘 맞네.
푹 잤겠다, 개운하겠다, 오늘의 찍먹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제의 여행을 회고해 본다.
피스타치오 크로와상 맛집을 추천받았다. 여행 도중에는 에너지 보충을 위해 카페인이 필요하기도 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빵, 심지어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빵의 본고장, 유럽에서의 첫 경험이라는 이유로 제일 기대되던 장소였다. 그만큼 나를 고뇌하게 한 곳.
고뇌한 이유:
숙소 사장님께 세 곳의 카페를 추천받았다. 각각을 1, 2, 3번 카페라고 하면, 1번 카페는 퀘쉐, 2번 카페는 피스타치오 크로와상, 3번 카페는 아몬드 크로와상을 먹어야 한단다. 문제가 뭐냐. 나는 피스타치오 크로와상과 아몬드 크로와상이 먹고 싶었고, 1번 카페의 분위기도 즐기고 싶었다. 셋 다 포기하기 싫었다는 뜻. 하지만 주어진 날은 이틀뿐이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아침은 1번, 점심은 2번, 저녁은 3번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틀 동안 많이 가도 두 곳인데, 그러면 어느 곳을 빼야 하지. 고민, 고민.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전날 블로그 리뷰를 엄청나게 뒤적거린 것이 무색하게, 정작 배가 고프기 시작하니 나의 위치와 가장 가까운 1번 카페로 직진한 것이다. 맛집을 비교할 때 나의 체력상태를 고려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고려했다면 뭐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더 큰 이유는 2번 카페에서 먹었어야 할 피스타치오 크로와상을 1번 카페에서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아놔.
어쩐지, 뭔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였어, 는 무슨, 나는 빵을 다 먹고 난 후에도 착각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참 지나서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룸메이트한테 카페를 소개해주다가 알게 되었다. 엇, 잘 못 시켰었네요. 하지만,
“오히려 좋아.”
진심이었다. 1, 2번 카페에 대한 욕구를 다 해소시켜 버렸으니까. 심지어 처음 먹어본 피스타치오의 맛이 아몬드랑 굉장히 유사했으므로 3번 카페의 아몬드 크로와상에 대한 호기심도 사르륵 풀어졌다. 실수가 만들어낸 신의 한 수라며.
오히려 아쉬운 점은 다른 번지수에 있었다. 크로와상이 나왔을 때 직원이 포크와 나이프를 주지 않아서 직접 셀프바에서 가져와 썰어 먹었다. 옆에 있는 여성에게는 줬는데 왜 내게는 주지 않지?
크로와상을 두 입 남겨뒀을 때 손으로 집어먹었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크로와상은 베어 무는 게 제맛이구나. 빵의 결이 파샤샤샥 거리는 식감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포크 노우, 나이프 노우, 맨손 예스였다.
마지막에 알아서 아쉽지만, 다 먹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내 옆에 앉았던 여성이 실수로 오렌지 주스를 손에 흘리는 것을 보았다. 마침 가방에는 하나의 물티슈가 남아있었고, 친절할 수 있는 기회다! 하며 얼른 가방을 뒤져 그녀에게 전했다. 방긋 웃으며. here ^^.
그리고 나는 카페를 나서서도 한참 동안 기분이 봉봉거림을 느꼈다. 마지막 물티슈였지만 더 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내 것은 전혀 소중하지 않았다.
집 가는 길에 물웅덩이를 밟아서 물티슈가 필요했다. 그때 그 물티슈를 주지 않았다면 바로 닦아내었을 텐데. 까지가 사실이었고, 괘념치 않은 마음이 진실이었다. 하나 사지 뭐.
여전히 기분은 봉봉.
왜 기분이 좋았을까.
혹시 오랜만에 나눈 짧은 대화에 신이 난 걸까?
일리가 있다. 이참에 미뤄두었던 한 단계 높은 난이도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동행.
쉽게 심심해지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여행에서 많은 동행을 구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정작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후로는 넘쳐나는 새로운 장면에 심심할 겨를이 없었지만, 한 편으로는 사람과의 소통을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봤다. 그렇다면 실천에 옮겨야지!
룸메이트 중에 한 친구가 저녁 약속이 없다고 해서 함께 슈바인학센을 먹고 야경을 보았다. 그렇게 다섯시간이 지나고...
아아, 내가 소통을 그리워했던 건 아니었나보다.
즉흥으로 같이 나가실래요? 한 것도 나지만, 교집합이 여행뿐인 친구와(심지어 이 친구는 전공 때문에 공부하러 온 거라 여행 또한 교집합이 아니었다.) 단 둘이 오붓한 대화를 나누는 걸 힘들어하는 것도 나였다. 다행히 지친걸 내색한다거나, 짜증을 낸다거나, 까탈스럽게 구는 등의 후회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나 싶은 아쉬움이 새어나왔다.
그런데 또 한숨 푹 자고 돌이켜보니 전혀 아쉬울 일이 아니었다. 나의 취향을 하나 더 적립했잖아.
동행을 구하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감정.
역시 직접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