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할 만큼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그 감정은 곧잘 익숙해지기 때문에 잊고 지내다가도, 어떤 날에는 머릿속을 몽땅 지배해버리곤 한다. 여행지에서 유독 그렇다.
‘기념 선물을 사주고 싶어.’로 표출되는 미안할 정도로 고마운 마음.
이는 여행 첫날부터 은은하게 나타나다가 마지막날 즈음에는 선물을 사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무장한다.
아직 누구를 줄지 모르지만(=누구에게 고마워할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기념선물을 사 올 게 뻔했으므로 캐리어 한쪽을 텅 비운 채로 유럽에 도착했다.
정정하면, 캐리어 한쪽을 정말 텅 비워온 건 아니고 선물로 채워왔다.
사연이 있는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지내는 동안 친구의 어머니 집에 머물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인이신 어머니를 위해 한국 느낌 물씬 나는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수건 사이사이에 한국 전통차 세트와 디퓨저를 챙겨온 것.
선물을 드릴 비엔나는 두 번째 여행지였다. 그러니까 첫 번째 여행지인 부다페스트에서는 기념품을 사면 안 됐다. 나의 짐 절반, 비엔나에서 전해드릴 선물 절반으로 가득한 캐리어에는 물통 하나 넣을 자리도 없었으니.
그런데 그만 고마운 친구들이 떠올라버린 것이다.
미안한 고마움은 달래기 어렵다. 아무래도 나는 역치를 넘은 고마움은 빚을 진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얼른 갚아야 해.
그래서 캐리어 사이에 쑤셔 넣을 작고 소중한 기념품을 찾느라 저녁 시간도 놓치고 3만보를 내리 걸었다.
하루종일 걷다 보니 기침이 나올 때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고, 9시간을 넘게 굶어서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삐져나왔다. 청춘여행 지대로네!
앉아서 뭐라도 먹고 싶었던 나와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고 싶었던 내가 있었다. 맛있게 먹고 싶은 내가 조금 더 우위선상에 있었으므로 30분을 어기적거리며 걸어서 점심에 먹었던 파스타 전문점에 다시 가보았다. (이탈리아 현지 식당보다 더 이탈리아스러운 파스타를 만든다고 유명. 나 또한 점심 만족도 100%였다.) 하지만 이미 웨이팅 두 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모두 와인을 시키고 천천히 여유를 즐기는 듯 보였다. 기다리기는 무리야! 앉아서 뭐라도 먹고 싶었던 내가 기세를 잡았다.
대충 먹자... 마트에서 요거트랑 빵을 사서 강변에서 먹기로 선회.
여행 첫날 도착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다시 보며 마지막 인사하기라니, 낭만적인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점심에 파스타를 먹느라 단백질이 부족했던 것 같아 프로틴요거트를 구매했다. 내가 좋아하는 초코맛으로. 게다가 설탕 제로. 나는 제로가 좋다.
빵은 무얼 먹을까. 길게 고민하고 싶지도 않았다. 페스츄리는 신문지 맛이 날 것 같아서 차라리 텁텁해 보이는 미니바게트를 골랐다. 마트빵이라 기대는 제로. 나는 여러모로 제로가 좋다.
국회의사당 앞에 앉아서 먹는 제로기대 빵과 제로슈가 요거트.
어이없게도 나는 이곳에서 최고로 맛있는 한 끼를 먹었다. 눈이 부릅 떠지는 맛. 이거 뭐야. 뭔데. 너 누구야.
배고파서 그런 건가? 시장이 반찬인가? 계속 스스로에게 자문했지만, 아니. 진짜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하며 금세 음식을 입으로 넣었다. 심지어 요거트는 숟가락도 없어서 손목스냅으로 탈탈 털어먹다가 옷에 요거트를 부어버리기도 했다. 맛있음에 취해서인지 화가 날 겨를도 없었다. 다 먹고 닦아야지. 물티슈 챙겨 오길 잘했어. 냠냠. 여행 둘째 날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그것도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마트에서 발견하다니. 운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냐고. 냠냠.
다 먹고 나니 그제야 풍경이 눈에 담긴다.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짧은 여행이었어. 다시 오고 싶다. 하지만 한참이 걸릴 것만 같아.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