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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Sep 03. 2024

집으로 돌아갈래

집에 가고 싶어졌다.


당황스러웠다. 오늘부터는 아무도 없는 오스트리아 친구 집에서 편하게 지내는 날인데, 한인민박에서처럼 불편한 공동생활 중인 것도 아니고, 매일 3만보씩 걷다가 오늘은 2만보밖에 안 걷기도 했고, 낮에는 알미 언니랑 필름 페스티벌에 가서 슈니첼도 먹었고, 무엇보다 아직 3주나 더 해외에서 보내야 하는데, 집에 가고 싶다니.


아침에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와서, 여행 전부터 기대했던 일정을 다 해치우고 샤워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린스를 머리에 바르다가 불쑥 ‘집 가고 싶어.’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아니었다. 계속 머리 위를 빙빙. 집. 집. 집. 

나 왜 이러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바디워시로 몸을 닦던 중에는 ‘눕고 싶어.’까지 추가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온종일 이동하느라 눕지를 못했구나. 빠릿빠릿하게 씻고 눕고 싶었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머리 말리기는 포기.


베개 위에 수건을 깔고 누웠다. 하~ 하고 한숨이 폭.


누워있다고 하더라도 에너지를 충전하는 속도보다 소모되는 속도가 더 빨랐나 보다. 이곳저곳이 뻐근해서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며칠 동안 쪼리 슬리퍼를 신고 걷느라 양쪽 발등이 다 까졌고, 물이 안 맞았는지 입술에 헤르페스가 발병했고, 허리가 아파서 재채기를 하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온몸이 욱신거리는데 마음이 욱신거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계속되는 강행군에 무의식이 SOS를 쳤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우면서도 조금 웃겼다. 아이고, 미리 말하지. 미안.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서둘러 잠에 드는 것뿐. 저녁에 오페라를 보는 내내 하품을 해대었는데(사실 계속 졸았다.) 막상 누우니 심란한 마음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기분이 착 가라앉은 채로 멍해졌다.


정말 집에 가고 싶나? 한국이 그리운 건 아니었다. 가족이 조금 그립기도 했지만, 정말 조금이었고, 솔직히 거의 안 그리웠고, 김치찌개라든가 라면, 삼겹살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생애 첫 유럽은 길거리 벤치에만 앉아있어도 경이로운 풍경을 선사했다. 또,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는 깜짝스러운 평화를 선물해 주었다.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살아보고 싶은 동네임은 여전했다. 인종차별이 없다면. 석회수 필터를 쓸 수 있다면. 소매치기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그러니까 나는 집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한숨 쉬고 싶었던 것이었다.


집에 갈 수는 없으니,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니, 내가 있는 이곳을 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집에 있으면서 집에 가고 싶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라, 이게 바로 내가 기다려온 시간이잖아?

새로운 일상을 기대한 나였지만 정작 유럽에 도착하고 나서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조급함에 각종 관광지에 두문불출하며 몸을 굴렸다. 넘치는 힘을 방출하지 않는 것도 문제니까, 이러한 나날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드디어 바라던 타지생활을 할 준비가 된 것이다. 관광은 끝났다. 지금부터 일상 시작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팅팅 부어버린 다리를 풀어주기 위해 요가를 할 필요도 없이, 얼른 아침을 먹고 점심 먹기 전까지 세 개의 스팟을 구경 가느니 네 개의 스팟을 구경 가느니 종종거릴 필요도 없이, 조금이라도 더 내 입맛에 맞는 맛집을 가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릴 필요도 없이 사는 나날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


이러다가 다시 기운이 나면 슬리퍼 신고 저 멀리까지 나가본다고 해도, 우선 한동안은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으로. 내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줘야겠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새로운 일상 이전에, 마지막이었을지 모르는 오늘의 관광객 모드에 대해 회고해 본다.


지하철역까지도 영화 세트장 같았다.

아침은 건너뛰고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기차를 탔다. 8시 40분에 출발 예정이었지만 불안쟁이인 나는 7시 40분 도착. 한 시간이나 기다리기 심심했기에 근처 마트에 구경을 갔다가 정작 기차를 놓칠 뻔했다. 불안할 거면 끝까지 불안하란 말이야.

진짜 진짜 최종 자리.seat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기차 좌석 시스템. 22번 좌석에 앉았는데 역무원아저씨가 와서는 41번으로 바뀌었단다. 옮겼더니 또 바뀌었다고, 또 옮겼더니 또. 20킬로짜리 캐리어를 끌고(마트 구경을 하다가 사버린 몇 가지 음식도 들고) 네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 아이고야.

하지만 역무원아저씨의 귀엽고 머쓱한 웃음에 화가 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팔뚝이 저리든 말든 방긋 웃어버리게 되더라.

비엔나에서 신세를 진 사람들이 많다. 파니와 알미언니. 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며칠 동안이나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단다. 황송할 만큼 고마워지려 했다. 곧 한국에 놀러 올 알미언니와 이미 한국에 있는 파니에게 제대로 보답해야겠어, 얼른 갚아야 해, 하는 빚진 마음이 들었다.

운이 좋게도 필름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을 즐길 수 있었다. 알미언니의 도움으로 슈니첼에 감자샐러드까지 추가해서 주문 완료. 혼자였으면 꼼짝없이 옆 가게 명량핫도그를 먹었을 텐데.

알미언니는 6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웠으니 가장 유사한 일본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일본어까지 섭렵했다는 언니의 말에 자극을 완땅 받아버린 나. 태어날 때부터 한국어를 할 줄 알았으면서 일본어로 인사만 겨우 하는 사람이 여기 있는걸요.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재밌다는 이유로 언어를 공부하는 언니의 모습에 자극은 한 스푼 더 추가되었다. 종이에다가 수백 번씩 한국어를 적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게 제일 즐겁다는 그녀. 대입을 위해서, 취업을 위해서 쌓는 스펙과는 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보상이 없다고 할지라도 배우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시장에서 한상을 나르는 식당 아주머니가 떠오르기도 했다. 고생하시는 건 매한가지.

해가 진 후에는 궁전을 더 깊게 바라보게 된다. 큰 이유는 없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그렇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 동상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이 무거운 건물을 머리로 지탱하고 계시다니, 고생이 많으셔요.

고생이 많으셔요 두 번째 버전. 저 위에서 뭐 하시는 건지 궁금해졌다. 비엔나 시민들을 지켜주고 계신 걸까. 보호를 받고 있는 그들은 꽤나 든든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에서야 번역해보니 휴대폰을 꺼두라는 뜻이란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비엔나는 예술의 도시인 듯했다. 시청사 앞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오페라를 본다.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면 전개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상황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꾀꼬리 같은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듣자마자 꽤 오랫동안 귀에 맴돌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짧은 영상을 찍어두고 싶었지만 휴대폰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꾹 참았다. 카메라에 담지 않고 기억으로 담는 사람들. 그 광경까지도 예술로 보였다.

집 안에서는 유럽에 오긴 한 건가? 싶다가도 집 밖을 나서자마자 이런 광경이 펼쳐진다. 나 분명 유럽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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