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생활에서 늘 걱정스러운 한 가지가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잠을 꼽는다. 처음으로 공동생활을 했던 건 대학생이 되고 기숙사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첫날 밤부터 느낌이 왔다.
‘이거 안 되겠는데...?’
다음 날 오전 수업이 있었는데, 두 시간도 자지 못하고 나와서 수업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환하고 시끄러운 강의실에서는 그렇게 잘 자면서 기숙사에서는 왜 못 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기숙사가 조용했던 건 아니다. 수십 년 전에 지어진 가건물이라서 아무리 소곤소곤 얘기해도 근처 방끼리 비밀얘기를 공유할 수밖에 없는 방음 시스템이었다. 특히 우리 방은 윗 방과 문제가 많았다. 윗 방에 사는 외국여성 넷이 매일 저녁 발을 구르며 수다를 떨어대는 바람에 겨우 잠이 들거나, 설령 잠에 들어도 위에서부터 울려오는 진동에 벌떡벌떡 깨곤 했다. 하다못해 다른 방은 비밀을 몰래 엿듣는다는 짜릿함이라도 있지, 외국말로 쌸라쌸라 나누는 비밀은 재미도 없고 괴롭기만 했다.
룸메이트 중 한 친구는 위에서 발을 구르건 총을 쏘건 머리만 대면 쿨쿨 잘만 자는 걸 보면 잠도 재능의 영역이지 않은가 싶다. 나는 개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재능이 없었다.
스무살 때는 자취할 돈도 없었기에 노력형 인간이 되어 생존형 수면용품을 발굴해야 했다. 수많은 용품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소형귀마개와 실크안대는 지금까지 잘 살아남아 긴 밤을 함께 해주고 있다.
그렇게 이번 여행에서도 내 가방 안에 쫄래쫄래 따라온 귀마개와 안대. 숙박비도 아끼고 야금야금 수다를 떨고 싶기도 해서 한인민박에 거주하기로 했지만, 장단점 총량 법칙에 따라 그만한 단점도 감안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잘 알고 있고, 벌어질 상황은 뻔했다.
‘한 달 내내 잠을 못 자면 어쩌지?’
혹시나 해서 병원에서 수면제도 처방받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계획은 없었는데, 인공눈물을 처방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여행 때 잠이 걱정이라고 하니까 선생님이 일주일치 정도의 수면제를 처방해 주셨다. 이 정도는 괜찮으니 잠이 안 온다 싶으면 하루에 반 개씩만 잘라먹으라며. 수면제를 수십 알 털어먹고 자살을 택하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떠올라 내심 겁먹고 있던 내게 의사 선생님은 시니컬한 말투로 안심시켜 주셨다.
에에, 그거 별거 아니에요. 일주일 먹는다고 내성 안 생겨요. 에에.
의사 선생님은 다정하면 다정한대로, 무뚝뚝하면 또 그대로 따뜻함이 느껴진다. 나를 낫게 해주는 사람.
다가온 여행 첫날 밤, 귀마개와 안대를 끼고 누웠다. 한 번 자보고 안되면 바로 수면제를 먹기로. 머리맡에 물병과 약을 준비.
아, 잠 안 올 것 같은데. 그리고 한 번 팟, 했다.
머쓱, 눈을 뜨니 깜깜한 밤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했던 것. 잘 때는 불 켜진 방에 나를 포함하여 두 명밖에 없었는데 어느새 네 명이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방은 고요했다. 하지만 내가 자는 동안에는 마냥 고요하지 않았을 터. 그들이 방 문을 열고 닫고 씻고 치우고를 다 할 동안 나는 반 혼수상태였던 것이다.
‘스무 살 때보다 둔해졌나.’
또, 구석에서 자고 있는 나를 위해 조용히 잘 준비를 해주었을 이름 모를 룸메이트들에게도 고마웠다. 다만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12시에 잠들었으니까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그런데, 개운했다. 나 너무 잘 잤나봐. 그러니 수면제를 먹고 싶지도 않았다. 뭐할까 고민하던 나는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챙기고 슬그머니 공용주방으로. 내 움직임에 깨는 사람이 없기를. 죄송해요!
가끔 새벽이 무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제나 휭, 하고 사라져 버리는 새벽의 시간이지만, 알고 있더라도 순간 속에서는 영원할 것만 같다. 새로운 일상을 살기 위해서 이곳 부다페스트에 와있는 만큼, 무한한 새벽을 새롭게 보내고 싶었다. 게다가 오늘은 첫날 밤이니까 의욕 만땅이다.
아까 잠들기 전에 30분 정도 숙소 근처를 돌아봤었다. 내일도, 그 다음 내일도 볼 수 있지만 첫날의 감흥을 놓칠 수는 없으니. 비행기에서 오래 앉아있던 탓일까. 금세 발바닥이 아파져서 빠른 귀가를 했다. 욕심내지 않기로. 여행이지만, 여행이 아니라 일상을 살기로 했으니까.
계속 돌아다니는 빈 바구니 때문에 캐리어가 내려오지 않자 바구니를 정리하기 시작한 남성. 한껏 친절해지기로 한 나도 옆에서 동참했다. 힘이 부족해서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대신 자신 있는 큰 목소리로 thank you라고 했다. 친절해줘서 고마워요. 제게도 친절할 기회를 줘서 고맙고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강변을 걷는 남성. 그 옆의 여성은 굽 낮은 구두쯤이야 쉽게 다루는 듯 하지만, 남성은 낯선 구두와의 대결에 실패했나 보다. 아무래도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하겠다. 그나저나 셔츠에 구두. 어디를 다녀온 걸까?
광장에서 벌어진 댄스파티. 커플이나 친구끼리 손을 잡고 나오기도 하지만, 홀로 춤을 추고 있던 여성에게 한 남성이 다가가 shell we dance? 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귀중한 장면을 눈에 담았다.
유럽의 첫인상 = 큰 영화 세트장
걷는 내내 영화에서 본 유럽의 모습이 연속해서 펼쳐졌다. 저 너머에는 조명이 꺼지고 18층짜리 회색 아파트가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암만 가도 세트장뿐이다. 우리 집 주변도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그러려면 건물 몇 개를 사야 하지?라고 부동산 아줌마 같은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