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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Aug 29. 2024

지연된 비행기, 공항 라운지에서

여행과 후회는 뗄 수 없는 사이. 특히 내게는 더욱 그렇다.


후회가 없으려면 완벽해야 한다. 완벽, 여행에 완벽이 존재하나?


미리 짜둔 계획을 모조리 수행하는 여행이 완벽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스무 살 때 첫 대만여행이 딱 그랬다. 펑리수, 딘타이펑, 버블티를 매일 먹어야 했고, 무슨, 대중교통 패스권 같은 걸 끊어서 지하철 역 순서대로 관광지를 찍어먹듯이 다녀야 했다. 비에 홀딱 젖어도 계획한 예산을 넘길 수 없다며 우산 하나 없이 비를 맞고 다녔었다. 그렇게 어거지로 모든 미션을 클리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후회 없는 여행이었다고 다독였지만 도착하자마자 감기몸살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주일을 앓았다. 무리한 열정이 불러온 화였다.


그렇다고 무계획이 능사는 아니다. 후회가 무서워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후회는 잊지 않고 후폭풍으로 찾아왔다. 그때 그 숙소, 아마 다른 위치가 더 편했을 거야. 카페에만 있지 말고 근교 여행이라도 다녀올걸. 등등. 스물네 살 때 여행이 딱 그랬다. 대학원졸업 & 취업 기념으로 치앙마이 여행을 떠났다. 입사까지 2주가 남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다른 사람처럼 알차게 보내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은 보통 그럴 때 해외여행을 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여행 계획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비행기까지 타고 넘어간 타지에서 매일 카페에 죽치고 앉아 글을 썼다. 물론 당시에는 너무나 행복한 나날이었다. 나는 대학원도 무사히 졸업했고, 이제 어엿한 돈벌이도 할 수 있고, 그 사이에 다른 사람처럼 해외여행까지 하고 있어. 완벽해.

그리고 지금쯤 그때의 여행을 돌이켜보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친구가 좋았던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해도 어버버.

나 여행을 가긴 했나? 연기처럼 후- 사라진 건가?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여행에서 후회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한 번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지금까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이 나오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출발지에서 종착지까지의 무한한 방황의 연속이 아닌가. 심지어 종착지가 출발지와 같다니. 시간축 그래프 중간에 뚝, 끊어진 일상의 결함.

결국 후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

오, 마음속에서 엄청난 회오리가 쳤다.

당연한 생각은 위험하구나. 오래된 착각일 수도 있겠어.


후회를 피하지 않기로 했지만 결코 즐길 수 없는 후회가 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해보자면 나는 너무한 짝꿍이었다. 지은이 덕분이었다. 그날 써둔 일기가 있다.


며칠 전 지은이가 엄마를 데리고 홍콩에 다녀왔다고 했다. 하필 여행 내내 비가 내려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덥고 습한 날씨에 홍콩은 무리인 것 같다며.


특히 지은이는 자책을 많이 했다.


공항에 내려서 호텔까지 캐리어를 끌고 20분 동안 걸었는데 엄마가 힘들 걸 예상하지 못했다거나,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길을 잃어서 한 시간을 넘게 헤매었다거나,

갱년기로 우울해하던 엄마를 이제야 신경 쓰는 게 한 발 늦은 것 같다거나.


울먹이고 있었다.


슬펐다. 지은이의 어머니가 부러워서 슬펐다. 우리 엄마도 나 같은 딸 말고, 지은이 같은 딸이 있었으면 더 행복했을 텐데.

하지만 우리 엄마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엄마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니까 지은이가 엄마의 딸이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슬픈 것이다. 나 같은 못난 딸이 제일 좋은 딸인 줄 알고 살아가는 바보 같은 엄마가 불쌍한 것이다.


자책하는 지은이 앞에서 지은이의 어머니는 딸이랑 다녀서 하나도 안 힘들었다고, 추억이 생겨서 좋다고 웃어주었단다.

모성애는 대체...

우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나도 몇 달 전 엄마와 호주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는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한 꿈같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후회스러운 일들 뿐이다. 길을 찾지 못하겠다고 애먼 엄마에게 짜증 낸 것, 기념품을 너무 많이 사면 캐리어에 담을 수 없다며 혼낸 것, 사진을 잘 못 찍어준다고 구박한 것.


엄마는 나 같은 딸이랑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엄마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


엄마, 엄마아아아.

미안해.

이제 정말 잘하겠다고, 매번 거짓말해서 미안해.

우리 엄마. 엄마아.


당시에만 해도 이렇게까지 후회할 줄은 몰랐다. 여건만 된다면 이번 여행에 엄마를 데려가서 만회할 기회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직장에 다니는 엄마는 휴가를 낼 수 없었고, 나는 아쉬운 대로 혼자서라도 예행연습을 하기로 했다.


우리 엄마를 위해서, 진실은 후회하지 않을 나를 위해서, 환상의 짝꿍이 되는 연습을 해보기로.

타인에게 어떻게 하면 더 친절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기. 딱 한 달만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행복을 선물하며 사는 삶!

평생 동안 그렇게 살 자신은 없지만 여행 아닌가. 그 자체로 신이 나는 여행.


3시간이 연착된 비행기 덕분에 공항 라운지에 앉아서 이런 새로운 도전도 결심하고, 시작이 좋다.

확실히 들떠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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