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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Aug 27. 2024

내일만 출근하면 퇴사입니다

오늘은 월요일.

휴가는 수요일부터.


내일까지만 근무하면 본격적인 퇴사모드 돌입이다.


주말까지만 해도 퇴사모드에 대해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당장 이번주에 이틀만 출근하면 된다는 사실이 신날 뿐이었다. 주 2일제라니, 평소였으면 월요병으로 끙끙거렸을 일요일 저녁이라도 이번만큼은 괴로울 수가 없었다.


퇴근도 했겠다, 저녁도 먹었겠다, 천천히 짐을 싸보기로 했다. 옷이랑, 양산이랑, 아, 회사에서 아침으로 나눠주는 누룽지와 볶음김치도. 해외에서까지 끼니를 책임져주는 우리 회사.


'내가 이것 때문에 못 관뒀지.'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회사에서 주는 밥을 먹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아쉬워졌다. 영양사선생님표 미나리대패삼겹솥밥. 그리울 거야!


회사에서 주는 삼시 세 끼를 받아먹느라 요리를 안 한 지도 한참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손으로 조물거리기를 좋아해서 엄마와 요리에 대한 행복한 기억이 많다. 겨울방학마다 엄마랑 만들었던 수제 링도넛. 도넛 안에 동그랗게 구멍을 뚫으면 엄마가 짝짝, 하고 박수를 쳐주었다. 그게 어찌나 좋던지 나는 오랫동안 도넛을 좋아하는 아이로 살아왔다. 어른이 되고, 무한정 단 맛에 거부감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도넛을 사 먹지 않고 있지만, 엄마와 만들었던 링 도넛은 훨씬 더 달콤한 기억으로도 매번 입맛을 돋운다.

열한 살 때였나. 엄마의 생신상을 차리겠다고는 김을 미역으로 착각해서 망치고 말았던 김국. 퇴근한 엄마는 난장판이 된 부엌을 보고도 화 한번 내지 않고 고맙다며 안아주었다. 엉덩이를 톡톡톡, 두들겨주며.

엄마는 어떻게 엄마가 된 걸까. 나는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아무튼,


여행에 가서는 스파게티를 한껏 해 먹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유럽의 올리브오일, 유럽의 파스타소스, 유럽의 생면... 유럽의 재료만으로 가득한 스파게티.

여건이 된다면 '유럽의 토르티야피자' 같은 음식도 해보는 것으로.


역시나 나는 관광보다는 일상이 좋다.


미슐랭 5 스타 레스토랑의 시그니처-트러플-머시룸-크림-파스타보다는

가위로 대강 자른 마늘을 듬뿍 넣은 알리오올리오.

다섯 종류의 치즈를 넣어 그릴팬에 구운 크로와상 위에 설탕을 들이붓고 토치질한 고급 토스트보다는

마트에서 산 치아바타를 손으로 대충 갈라, 역시나 대충 가른 삶은 계란과 치즈를 끼워 넣고 요거트를 소스 삼아 찍어먹는 샌드위치.


순간이라도 손을 조물거려서 만들었다면 어엿한 나의 작품이니까.

내 손길이 닿은 골동음식. 그 안에는 따뜻함이 있다.

온기는 또다시 내게 찾아와 식도를 너머 체온이 되고... 기운을 전하고, 받고, 전하고, 받고...  포근한 굴레처럼.


내가 원하는 것은 음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따스함.

따스한 일상.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짐을 싸니 캐리어의 절반만 채웠는데도 더 넣을 물건이 없었다. 음식도 최대한 만들어 먹을 것이고(누룽지와 볶음김치는 히든카드였다.), 옷도 네다섯벌 정도만 챙기면 될 것 같았다. 부족하면 거기서 사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되든 안 되든 그 나라에서 승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람 사는 곳에 가는데 무얼 그리 챙겨야 할까. 소매치기는 무서우면서 곳곳에 다정함이 배어있을 거라고 믿는 낙관이었다.


새로운 일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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