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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Aug 14. 2024

왜 퇴사하려고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잔뜩 화가 난 채로 무작정 유럽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출발일은 지금 이맘때. 1년 전의 나는 '이때까지 이 바닥 뜬다!'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오케이 좋아. 여기까지는 좋다 이거다.

문제는 지금의 나였다.


"싫은데?"


바로 퇴사하고 싶지가 않아져 버렸다는 것.

더 큰 문제는 과거의 나였다.

취소할 수 없는 표를 사버린 나.


왜 그랬지?

일이 안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일하는 모습이 기계 같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전부였나? 기억이 조각처럼 깨져있어서 원래의 모양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뭔가, 뭔가 더 심금을 울리는 조각이 있었는데. 아~ 뭐였더라.


그래서 지금의 나는 여행을 가기가 귀찮아졌다. 숙소는 언제 예약하지, 집 나가면 개고생이잖아, 가서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어째? 차라리 휴가 쓰고 집에서 쉴까?

대체 왜 취소가 안 되는 표를 산거야아아.

대체 왜?

 

맞아. 그럴 애가 아니다. 분명 그때만의 고유한 이유가 있었을텐데.

아직까지 마음 어딘가에는 ‘퇴사하고 싶음’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합의를 봐야 할 부분. 과거의 나를 존중해주고 싶어.

하지만 1년 어린 나에게 한마디 얹으려는 꼰대의 마음이 끊임없이 일었다.

회사는 좋은 점이 많단다. 밥도 주고, 건강검진도 해주고, 매달 돈도 주고, 잊을 때쯤 성과급도... 너 아직 성과급 안 받아봤지?

그동안 회사 생활 좀 했다고 이래라저래라 할 말이 많은 늙은이였다.

동시에 이 정도의 정보는 과거의 나도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는 젊은 믿음이 있었다.

되새겼다. 모든 나를 존중.


떠오른 합의점!

퇴사는 하지 말고 휴가를 왕창 써서 갔다 오는 건 어때?

달력으로 이리저리 따져보니, 일정을 잘 조율해 보면 올해 휴가를 전부 다 써서 다녀올 수 있는 기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홧김에 한 달 치 여행을 질렀다고 해도 이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지 내가.

내가 아는 나 등장에 신이 났다 아주.


그렇지만... 으, 눈치 보여.

한 달 치의 휴가를 다 쓰는 동안 고생할 동료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좋은 사람들인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지만 200만 원의 비행기값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의 나는 이런 상황까지 예상해서 취소가 안 되는 표를 산거구나. 내가 과거의 나를 아는 만큼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MZ다, 나는 MZ다.' 외치며 파트장님께 휴가 계획을 말씀드렸다. 안된다고 하실 분이 아니었다.


"꼭 다녀와줘요. 나도 그 나이 때 여행 좀 다닐걸 후회 중이거든요. 집에 쌍둥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파트장님은 천사가 아닐까? 빼앗긴 한국문화유산이 아닐까?

제가 박물관 가서 파트장님 잃어버린 날개 찾아볼게요.


다음은 나의 업무를 대체해 줄 동료. 그는 연말에 신혼여행으로 한 달간 휴가를 가게 될 예정이라 그때의 내가 대신 고생하는 것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결혼해 줘서, 한 달 휴가 내줘서 어찌나 고맙던지.


그렇게 나는 유럽이라는 먼 타지로 떠나 퇴사 조정기간을 갖기로 했다.

그럼 4주 후에 뵙겠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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