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무작정 유럽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출발일은 1년 후, 지금 이맘때. 1년 전의 나는 '이때까지 이 바닥 뜬다!'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오케이 좋아.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지금의 나.
"싫은데?"
퇴사하고 싶지가 않아져버린 나였다.
더 큰 문제는 과거에 있었다.
취소할 수 없는 표를 샀던 그때의 나.
왜 그랬지?
일이 안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일하는 모습이 기계 같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전부였나? 기억이 조각처럼 깨져있어서 원래의 모양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뭔가, 뭔가 더 심금을 울리는 조각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그래서 지금의 나는 여행을 가기가 귀찮아졌다. 숙소는 언제 예약하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잖아, 가서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어째? 차라리 휴가 쓰고 집에서 쉴까?
대체 왜 취소가 안 되는 표를 산거야아아.
대체 왜?
대체 왜.
나는 그럴 애가 아니다. 별 의미 없이 200만원에 육박하는 비행기표를 끊어놨을 리가 없다. 잔뜩 상기된 채로 표를 샀겠지만서도, 분명 그때만의 고유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며칠전 회의 중에 우연히 발견한, 수첩 구석에 적혀있던 꼬질꼬질한 글씨.
- 퉤사할거야. 퉤.퉤.퉤.
무슨 뜻이냐구!
합의를 봐야 할 부분이다. 과거의 나를 존중해주고 싶어.
하지만 1년 어린 나에게 한마디 얹으려는 꼰대의 마음이 끊임없이 일었다.
아가야. 회사는 좋은 점이 많단다. 회사에 다니면 말이야, 삼시세끼 다 챙겨주고, 건강검진도 시켜주고, 꼬박꼬박 돈도 주고, 잊을 때쯤 성과급도... 너 아직 성과급 안 받아봤지?
그동안 회사 생활 좀 했다고 이래라저래라 할 말이 많은 늙은이였다.
동시에 이 정도의 정보는 과거의 나도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는 젊은 믿음이 있었다.
되새기자. 모든 나를 존중.
떠오른 합의점!
휴가를 왕창 써서 갔다 오는 건?
달력으로 이리저리 따져보니, 일정을 잘 조율해 보면 올해 휴가를 전부 다 써서 다녀올 수 있는 기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홧김에 한 달 치 여행을 질렀다고 해도 이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지 내가. (내가 아는 나 등장에 신이 났다 아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숨어있던 염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한 달 치의 휴가를 다 쓰는 동안 고생할 동료들의 모습이 아른아른. 좋은 사람들인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것도 잠시, 그 마음은 생각보다 왜소했다. 비행기값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던 것. 과거의 나는 이런 상황까지 예상해서 취소가 안 되는 표를 예매한 것이겠지. 내가 과거의 나를 아는 만큼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MZ다, 나는 MZ다.'를 외치며 파트장님께 휴가 계획을 말씀드렸다. 우리 파트장님, 하염없이 베풀어주시고, 대신 짊어져주시는, 인간 나무. 아무리 긴 휴가라고 할지라도 안된다고 하실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죄송하지만...
"꼭 다녀와줘요. 나도 그 나이 때 여행 좀 다닐걸 후회 중이거든요. 집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파트장님은 되려 긴 휴가를 응원해주시고 계셨다. 나였다면 팀원의 휴가를 이렇게까지 지지해주지는 못했을텐데. 그는 정말 천사가 아닐까? 아니면 빼앗긴 한국문화유산일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에 가면 파트장님의 잃어버린 날개를 찾아볼 거야, 하고 생각했다.
다음은 나의 업무를 대체해 줄 동료. 정말 다행인 점은 그 또한 연말에 긴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라는 것이다. 미래의 나와 지금의 그가 서로를 대신해 고생해 주기로 거래를 성사시켰다. 결혼해 줘서, 한 달 동안 휴가를 내줘서 어찌나 고맙던지.
그렇게 나는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 치고는 갑작스러운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이름하야 퇴사 조정기간.
그럼 4주 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