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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름 Sep 15. 2024

남녀 혼성 누드 사우나 체험기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첫날, 한인민박 스텝이 추천해 준 특별 장소가 있었다. 여행 일정이 여유롭다면 꼭 방문해 보라고 했던, 사우나였다. 안 그래도 하루종일 가방을 메고 걷느라 어깨도 결리고, 종아리도 뻐근한 참이라 귀가 솔깃했다. 동시에 스텝이 말했다.


“혼성 누드 사우나이니까 민망하시면 저랑 같이 가요.”


같이 가는 게 더 민망한데요. 그나저나, 혼성 누드라니. 내가 유럽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일전에 뉴스에서 누드비치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다. 해변에 들어서면 모두 옷을 벗고 자유의 몸으로 바다를 만끽한다는 그곳.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 와서 누드 사우나를 가게 될 줄은 몰랐겠지. 일본 여행에 갔을 때 온천을 하면서 온몸이 사르르 풀리는 경험을 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사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지역은 소금온천이 관광명소라고 하니. 더욱이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우선은 갈 곳이 많으니까 누드 사우나는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걸로 덮어두었다. 그리고 돌아온 일상모드의 날.


아침에 눈을 뜨면서 생각했다.

사우나, 가겠어.

일생동안 혼성 누드 사우나를 갈 기회는 많지 않다. 그 기회를 바란 적은 없지만 여러모로 재미있을 것 같은 콘텐츠임에는 분명했다. 재밌는 것. 좋아. 후기가 거의 없는 제야의 공간이라 무엇이 필요할지 몰라 숙소에서 잡동사니를 다 챙겨갔다. 수건이랑, 씻을 용품이랑, 갈아입을 옷이랑, 심심할 때 읽을 소설책도, 혹시 19금 장소일 수도 있으니 여권까지.


사우나는 당연히 촬영 금지. 사우나 가는 길은 당연히 촬영 가능

10시 개장에 맞추어 가면 그나마 사람이 가장 적을 테니 10분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다가 1등으로 입장했다. 여행에서 가장 많이 하는 외국말은 “제가 처음이라...”가 분명하다. 오늘도 역시나 제가 처음이라 시전. 카운터의 직원은 나를 위해 여러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다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옷을 다 벗어야 하고, 수건은 4유로에 빌려줄 수 있긴 한데 가져온 수건이 있으면 그걸 써도 된다는 것 같았다. 수건 가져오길 잘했군. 그리고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으려다가, 도저히 못 벗겠어! 의 마음이 가득해져 버렸다. 너무 밝았다. 너무너무 밝았다. 올누드 사우나면 기본적으로 좀 어둑어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용실보다도 밝은 탈의실에서 나의 몸은 작은 수건 하나 따위로 가려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서 4유로를 내고 큰 수건을 받았다. 사이즈를 대충 훑어보니 미니드레스처럼 가슴과 엉덩이를 딱 가릴 수 있는 크기였다. 키가 작은 덕분이었다. 키 작길 잘했어. 컸으면 큰일 날 뻔했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저벅저벅 사우나로 올라갔다. 이 넓고 무진장 밝은 공간에 나 홀로 있다. 나는 삐죽 웃음이 나와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우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60~90도에 이르는 사우나방이 다섯 개 정도 있었고 야외 테라스에는 온천까지 있었다. 한 바퀴 구경한 후 자신 있게 90도 사우나 입장. 하자마자 으악 하고 도망. 불구덩이인 줄 알았다. 90도는 무리. 그 옆의 70도 방으로 선회. 하자마자 으악 하고 도망. 발가벗은 할아버지의 엉덩이를 마주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한눈에 봐도 사우나 고수였다. 옷을 다 벗고 누워서 드르릉, 드르릉, 주무시고 계셨다. 언제 오신 거지? 대체 언제 오셔서 언제 잠드신 건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앞을 보지만 초점은 잃은 채로 그 옆의 60도 방에 입장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기는 미적지근했지만 충분히 따뜻했다. 문 바로 옆 사각지대에 자리를 잡고 누우니, 창가로 잘츠부르크의 풍경이 한눈에 담겼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운치 한 스푼까지. 그렇게 한동안을 누워있으니 스르륵 잠이 찾아왔다. 잠깐 졸고 있던 와중에 으악. 하얀 할아버지 등장. 그는 온몸이 하얬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방심했다. 할아버지는 할로~ 하고 밝게 인사하셨고 나도 할로~ 하고 밝게 도망쳤다.

온천 궁금해. 온천 가보자. 방금 본 무언가를 잊기 위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테라스로 나가보니 온천에는 발가벗은 할머니, 할아버지 다섯 분이 보골보골거리는 온천 속에 들어가 계셨다. 차마 들어갈 수는 없었다. 몸을 가려주는 수건을 벗으면 외국 어르신들이 내 몸을 빤히 훑어볼 것 같았다. 한국 어르신이고 외국 어르신이고 한국 젊은이이고 외국 젊은이이고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외국 어르신들 사이에서 홀로 등장한 젊은 동양 여성이었다. 나였어도 궁금했을 것 같다.(뭐가?) 그래서 수건을 걸친 채로 온천 옆 벤치에 앉아 책을 읽기로 했다. 비가 온 직후라 바깥은 서늘했고, 좀 전까지 후끈한 곳에서 땀을 삐질거리고 있었던 나는 어릴 적 찜질방에서 냉탕, 온탕을 왔다 갔다 거리는 짜릿함을 오랜만에 느꼈다. 땀이 한 번에 식으면서 소름이 쫙 돋는 이 느낌. 팔뚝살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하면 다시 사우나로 돌아가서 몸을 지지고, 다시 테라스, 다시 사우나, 이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그러는 와중에 피할 수 없는 알몸의 어르신들. 한 여섯 명쯤 지나쳤을까. 그때부터는 아무 감흥이 없어졌다. 그저, 몸이구나. 알몸이구나. 했다. 마지막쯤에는 알몸을 봐도 아무것도 본 것 같지가 않았다. 나 이곳에 적응했어.

한 편에는 테라스도 사우나도 아닌 휴식 공간이 있었다. 30개가 넘는 썬베드가 일렬로 놓여 있었는데 모두 고요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그곳에 앉아 책을 읽다가, 조금 자다가, 다시 책을 읽다가, 조금 더 잤다. 나만의 시간이었다.


슬슬 배가 고파와서 숙소로 돌아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탈의실에서 옷을 다 갖춰 입은 남성을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 짧은 두 시간 만에 발가벗은 모습이 익숙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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