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원짜리 오마카세는

by 초름

2년 전의 기억을 꺼내 적습니다.


축하할 일이 많았어요. 대학원에서 맡은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기도 했고, 1년 반동안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거든요.


’ 나에게... 상을 줘야 해... 기가 막힌 상을...‘


좋은 옷을 한 벌 살까? 대학원생이 옷은 무슨.

전자기기를 하나 살까?... 이미 없는 게 없군.

여행을 갈까? 출근해야지!


만사 다 싫어 싫어 표정을 짓고 있는 저를 보며 친구가 오마카세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기념일을 그런 식으로 챙긴다면서요. 어미오리가 새끼오리 밥 맥이듯 한 입씩 음식을 건네준다는 그 오마카세. 한 끼에 10만 원이라... 평소에 한 끼에 2천 원 정도 쓰던 저는 ‘그 돈이면 국밥을..!‘ 소리가 입 안을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린고비세포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포가 무엇이게요? 그건 바로 호기심세포입니다. 저는 궁금한 건 절대 못 참아요.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둘째는...

? 왜 말을 하다 마세요? 왜? 왜? 왜요? 왜요! 쾅쾅쾅


어쩌면 인내심이 매우 부족한 것이겠지요. 궁금해서 저질러버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예를 들면 궁금해서 대학원 가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큰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했죠?


아무튼 저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마카세를 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왕 갈 거면 제대로 가자는 마음에 10만 원을 잡고 보던 오마카세는 20만 원이 되어있었어요. 같이 가는 친구까지 총 40만 원으로 가격이 급 상승했습니다. 이게 처음에는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동안 오마카세만 알아보다 보니까 어느 날은 제가 '아 5만 원 너무 싼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소비가 이렇게 자극적이구나. 몇 번 봤다고 이제 5만 원은 자극으로 들어오지도 않는구나.


저녁 7시 반에 예약을 해뒀기 때문에 12시에 가벼운 점심을 먹고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배를 꺼트렸어요.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도착. 소고기에는 레드와인이지! 하며 와인을 주문해서 한 입 마시고 있으니까 골져스한 선생님께서 보석함을 가져오시더라고요.

보석함 속에는 오늘 저희가 먹을 고기들이 예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오, 너네들이구나. 때깔을 보고 바로 집어먹을 뻔했지만 겨우 제 안 깊숙이 숨어있던 교양세포를 꺼내서 진정할 수 있었어요. 이후로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요리는 '슬라이스 참외-동치미와 단새우'였습니다. 상큼하면서 참외와 단새우의 달콤함으로 기분 좋은 시작.

두 번째 요리는 '전복타르트'와 '육회타르트'

특히 육회타르트는 타르트지 안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그 위에 육회, 맨 위는 마카다미아를 갈아서 올렸습니다. 마카다미아의 꼬수운 향과 크림치즈가 참 잘 어울렸어요.

'블랙썸머트러플을 곁들인 안심'

트러플이 하얗길래 살짝 여쭤보니, 제가 인터넷으로 봤던 검은색 트러플은 윈터 트러플이라고 한답니다. 썸머 트러플이 10배 정도 비싸다길래 벅벅 긁어먹었습니다.

안심추리와 요물소스... 소스의 이름은 모르겠으나 감칠맛이 지금까지 생생해요. 살짝 매콤하면서 상큼한 맛

다음으로는 귀여운 미니 화로에 소고기 초밥을 만드시는 듯했습니다.

소고기초밥 위에 우니를..!

'우니와 소고기의 조합은 꽤 느끼하다' 여기까지 방구석 장금이의 악랄한 총평이었습니다.

등심과 통마늘퓨레, 오이피클, 부추무침.

부추무침은 리필을 안 할 수 없는 맛과 크기랄까요. 등심은 확실히 기름진 부위라 소스가 상큼하고 가벼웠습니다.

'가츠산도' 트러플 소스인데 레시피를 여쭤보니 가게 비결이라서 말해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몰래 베껴서 만들어보려 했는데 아쉬웠어요.

마지막 메인으로는 솥밥이 나왔습니다. 배가 불러서 밥을 많이 남긴 게 천추의 한이 될 줄이야...

그런데 장아찌가 마녀손톱 같더라고요? 귀여워서 왕 먹어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얼그레이 크림을 뿌린 초콜릿케이크'와 '흑임자와 호두강정'입니다. 디저트가 모두 부드럽고 풍미가 진해서 배가 터질 것 같아도 계속 먹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마카세를 간 건 무려 2년 전인데 지금까지도 그 맛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이 소스 참 맛있었는데! 이건 살짝 느끼했어~ 라면서 그날의 기억을 쉽게 상기시킬 수 있어요. 저는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어제 일처럼 생생할까요?


50만 원을 썼으면 이 정도는 기억해야 한다며 두뇌에서 장기기억으로 바꿔버린 것일까요.


고기를 굽는 모습, 화로에서 나던 육향, 소중하게 먹은 한 입, 음식에 대한 설명.

눈, 코, 입, 귀의 기억이 모여 집단지성마냥 서로의 기억을 보완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이 날의 식사는 50만 원짜리 한 끼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제게는 선물이고, 여행이고, 일기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오마카세는 가고 있지 않습니다. 궁금증을 확실히 해소했거든요.


오마카세의 뜻은 ‘맡긴다’입니다.

저는 매일 저녁 다음날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싸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가 내일의 저를 위해 오마카세를 대접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매일 오마카세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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