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잃기 싫은 날

by 초름

작년에 비해 유독 일찍 따뜻해진 4월의 첫 날이라는 것 말고는 별 다를 것 없는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습니다. 엄마랑 아빠의 부산스러운 소리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침부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바쁘다 바빠. 저는 혼자 느긋히 양치도 하지 않고 부엌 의자에 앉습니다. 엄마랑 아빠가 계란말이를 만들고 있었어요. 저희 아빠는 최근 퇴직을 하신 후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엄마. 계란을 무려 여섯 개나 넣고 당근, 양파, 파를 쫑쫑 썰어서 휘적휘적 섞고 있더라고요. 계란말이 어려울텐데... 아직 새벽은 서늘해서 자는 사이에 건조해진 목을 적시기 위해 따뜻한 물을 한잔 마십니다. 다시 침대에 누워서 저희 집 강아지 뽀삐 배를 긁어주고 있는데 수저 놓으러 나오라는 소리에 뭉그적 뭉그적 부엌을 향합니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시래깃국, 계란말이, 그리고 두부김치까지. 저는 쌍둥이가 있는데 그놈 자식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 먹지만 엄마와 저는 이렇게 고기 없는 시골집 밥상을 더 좋아한답니다. 계란말이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 비주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똥똥하게 예쁘게 말았지? 한 입 먹자마자 아빠에게 칭찬의 박수를 짝짝짝. 진짜 맛있다! 제가 계란찜을 좋아해서 집에 갈 때마다 계란찜을 해주시곤 했는데 아무리 계란찜이 좋아도 매번 먹으면 질린다며 계란말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특할 수가. 아침부터 두툼한 계란말이를 다 먹으니 배가 든든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빠, 엄마, 뽀삐는 산책에 나섰습니다. 두 분 다 매일 만보 걷기 미션을 하고 계시거든요. 저는 그동안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주워 먹었습니다. 밥 배와 디저트 배는 따로 있으니까...

산책을 갔다 온 아빠는 약속이 있다고 나가시고, 엄마와 제가 집에 남았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엄마가 이불을 사러 나가자는 거예요. 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제가 기숙사에서 쓸만한 시원한 이불을 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귀찮은데...'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없을 때 확 나가서 사버려야 한다고 저를 재촉했습니다. 아빠가 있을 때 사려고 하면 집에 있는 거 또 왜 사냐고 잔소리한다고요. 흠, 꽤나 일리가 있습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이케아로 나섰어요. 집에서 15분 정도 차를 타고 가니 금방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케아를 거의 안 가봤는데 신기한 소품도 많고 특히 쇼룸을 참 예쁘게 꾸며두었더라고요.

그중에서 한옥식 인테리어에 저와 엄마 모두 꽂혀버렸습니다. 엄마는 늘 귀농을 꿈꾸고 계십니다. 은퇴를 하신 후에는 서울 근교로 이사를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사시려고 해요. 시골 폐가를 재건축할 생각도 하고 계셔서인지 최근 한옥에 관심을 보이고 계세요.

인테리어 중에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소파를 중앙에 두고 뒤편에 책장을 두었다는 것. 창틀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아래 앉아 있으면 책을 읽기에 딱 좋겠습니다. 허리디스크 걸리기에도 딱 좋겠고요.

마음에 드는 이불과 매트를 두 개씩 사고 나서는 길에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를 발견했습니다. "엄마,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 해볼래?" 엄마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엄마는 드라이브스루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마침 커피 쿠폰도 있겠다. 제일 비싸고 주문하기 어려운 메뉴 두 개를 골랐습니다. '바질 레몬 셔벗 블렌디드'와 '딸기 아사이 레모네이드 스타벅스 리프레셔' 사이즈는 둘 다 Tall로.

엄마는 차 안에 있던 누군가의 명함 뒤편에 메뉴 이름을 열심히 적고는 야무지게 주문을 성공했어요. 이렇게 대견할 수가!

매일 아이스아메리카노만 먹다가 더운 낮에 상큼하고 신기한 메뉴를 먹으니 흥이 폭발. 엄마랑 드라이브스루 별거 없네! 하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는 한 숨 자고 저는 복근운동을 했습니다. 요즘 필라테스를 할 때 허리가 아프더라고요. 그게 배에 근육이 너무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충수업을 시작했어요. 매일 15분씩 복근운동을 추가로 해주고 있습니다. 별 것 없는 자세인데 허리가 달달달, 엉덩이가 덜덜덜.

그러고 보니 점심을 놓쳤습니다. 아침을 8시에 먹었는데 음료를 많이 먹어서인지 네시가 되어버렸어요.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오늘 점심은 '열무비빔국수' 근데 이제 양배추를 엄청나게 곁들인.... 백 선생님의 레시피를 참고해서 엄마가 자는 사이에 양념을 뚝딱뚝딱 만들고 계란을 삶습니다. 다그닥 소리에 깬 엄마는 소면을 삶고 밀린 빨래도 정리합니다. 역시 엄마는 멀티왕이에요. 국수에 단백질이 부족한 것 같아서 아침에 먹다 남은 두부김치까지 꺼내서 먹으니까 금세 그릇이 비워집니다. 요리는 30분을 했는데 먹는 데는 10분도 안 걸리다니.

이제부터는 각자의 시간입니다. 어제 보다 만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봐야 하는데... 엄마가 뽀삐를 데리고 산책을 가잡니다. 아직 만보를 걷지 못했다면서요. 역 근처에 벚꽃이 예쁘게 폈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섭니다.

벚꽃은 분명 다음 주에 만개한다고 했는데 벌써 활짝 폈더라고요. 지구온난화가 세상의 수명을 일주일 당긴 것일까요. 아무튼 이쁘긴 하더랍니다. 다음 날 한강공원 벚꽃축제를 가려고 했는데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절경이었어요. 엄마와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떨어지는 벚꽃 잡기 놀이도 조금 했는데 뽀삐가 옆 강아지랑 너무 싸워대서 아쉬운 발걸음을 떼야했습니다. 나오길 잘했어요.

집에 돌아와서는, 이제는 정말로 침대에 누웠습니다. 아, 좋다. 너무 좋다. 피곤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8시라서 최대한 잠을 깨야했어요. 지금 자버리면 밤을 꼴딱 새울지도 모르니까요. 엄마는 바로 목욕을 하러 갔습니다. 목욕할 힘이 있다니. 저희 엄마의 체력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에요. 이 날 엄마는 2만보를 걸었답니다. 잠에 들지 않으려고 서서 드라마를 보는 중에 쌍둥이가 집에 왔습니다. 제 쌍둥이는 지독한 연기자입니다. 밖에서는 조용하고 진중한 콘셉트를 야무지게 잡았거든요. 하지만 집에 오면 오두방정을 아주 그냥... 밖에서 못다 한 애교를 그렇게 부리는데 어쩜 20년을 넘게 봐도 적응이 안 됩니다. 마켓컬리 어플에 들어가서 쌍둥이가 내일 먹을 반찬을 쇼핑했습니다. 고기만 보면 눈을 뒤집고 장바구니에 쓸어 담는 걸 막느라 소리를 너무 질렀더니 급격한 피로가 몰려와서 저벅저벅 안방 침대에 누워요. 오늘은 아빠가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라 아빠를 제 방으로 유배 보내고 저와 엄마가 안방에서 자기로 했거든요. 근데 엄마가 11시 반까지 하는 드라마를 봐야 한대요. 지금은 10시 반. 엄마가 드라마를 다 볼 때까지 한 시간이 남았습니다. 최대한 자극적인 유튜브를 보는데도 꾸벅꾸벅 졸다가 핸드폰을 뚝뚝 떨어트려서 코와 눈에 퍽퍽. 그렇게 11시 반이 되고 엄마가 뽀삐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잠에 듭니다.

서늘한 새벽 공기 틈새에 뽀삐가 제 옆구리에 들어온 것 같기도, 엄마가 이불을 덮어준 것 같기도 합니다.

햇살에 눈을 뜨니 따뜻한 봄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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