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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A Aug 14. 2023

감사를 쓰려거든 별점으로 쓰세요

별 같잖은 평가 기준



 어깨 닿는 기장으로 커트 한 게 벌써 이 년 전이다. 머리숱도 많은 데다 반곱슬인 나는 스타일링이 너무 성가셔서 덮어놓고 기르기를 택했다.

 

 그러니 올여름은 나에게 특히 더 지옥이었다. 역대급 습도와 폭염 탓에 애지중지 길러온 머리카락이 '쓸모도 없는 쓰레기'로 전락했다.


 충동적으로 머리를 잘랐다. 너무도 더웠던 그날, 불판 앞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 우발적으로 결정했다.

 

 마음먹은 일은 당장 해치워야 하는 성정의 해그리드는 가까운 미용실로 예약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오후 7시 30분 마지막 타임이라도 마다하지 않았고, 늦어도 너무 늦은 탓에 간단하게 커트만 받고 나왔다.


 이후 한층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잘려나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커트 잘하는 샵을 수소문해 예약했다. 토요일 두 시였다.



 전날, 자취방으로 친구가 놀러 왔다. 미용실 예약해서 한 시에는 나가야 해. 열한 시에 일어나서 밥 차려줄 테니까 같이 먹고 나가자.


 다짐은 이루어질 때 계획이 되고, 실패하면 변수를 위한 복선이 되어 버린다. 우리에겐 '개같이 멸망'의 복선이었다. 열두 시에 어렵게 눈을 떴고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정신없이 역에 도착해 친구를 먼저 보냈고, 촉박했던 나는 지상으로 다시 올라가 택시를 잡았다.






 가까운 지하철역 출구로 승차 핀을 찍고 바로 앞 대로변에서 대기했다. 곧 배정받은 택시가 보였고, 다급한 마음만큼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기사님은 나를 못 보신 건지, 출구와 연결된 상가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계셨다. 어? 거기 아닌데요. 최대한 택시가 다시 빠져나가기 수월한(수습 가능한 위치) 곳에서 타려 했으나, 내 달리기보다 기사님의 다정함이 조금 더 빨랐다.



 주차장 한가운데서부터 도로로 다시 진입하기까지 대충 10분이 걸렸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택시 잘못 탄 것 같다. 왜 여기까지 들어오신 걸까.


 급하게 미용실에 전화를 걸었다.


"두 시 예약인데 십 분 정도 늦을 것 같아요. 괜찮을까요."

"뒤에 여유 있으니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통화를 끊고 나서야 시트에 몸을 기댔다. 상의가 땀에 흠뻑 젖어 축축했다. 옷깃을 잡고 펄럭거리며 겨우 열을 식혔다.




 가만히 지켜보던 기사님은 바로 에어컨 바람 세기를 강하게 키우더니 말을 건네주셨다. 오늘은 더운 날이 아닌데 땀을 많이 흘리시네요. 뛰어 오신 건가요? 통화 들어 보니 급한 일 있으신 것 같은데, 약속 늦으셨어요?



 그 말이 꼭 위로 같았다. 나는 힝, 하고 네, 했다.






 "이 도로는 차가 항상 많아요. 여기만 나가면 길이 좀 뚫릴 겁니다. 늦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일은 돈이 들지 않는다. 선뜻 건네는 다정함은 내가 최우선으로 삼는 가치다. 기사님의 '다짐'에 네이버지도와 카카오맵을 번갈아 띄우던 내 휴대전화도 휴식을 취했다. 그제야 창밖을 봤다.

 

 천천히 가셔도 돼요. 애초에 제가 늦은 거예요. 체념한 듯 등가교환 비슷한 답을 건네면서도, 모든 경우의 수를 나열해 예약이 취소될 경우를 대비했다. 도로 사정이 그리 쉽게 풀리나.




 건대입구, 성수 방향으로 빠지는 길목에 동부간선도로 입구가 있다. 갈래 부근에서 기사님이 말씀하셨다.


 "내비는 건대입구 지나서 가라는데, 지금 동부간선 타면 안 막힐 수도 있어요. 대신 요금이 조금 더 나오고요. 만에 하나 막힐 수도 있는데, 제 느낌상 여기는 지금 안 막힙니다. 그리로 갈까요?"


 "네, 요금 상관없어요. 기사님 마음 편하신 길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사님의 다짐은 성공적인 계획이었다. 2시 18분 도착을 안내했던 내비게이션이 '잠시 후 목적지 부근입니다'말해준 시간은 무려 2시 4분이었다. 14분이나 번 셈이다.


 자신의 업적이 매우 뿌듯했던 기사님은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내 감을 보니까, 그 길은 절~대 안 막힐 것 같드라고! 시간이 그냥 훅 줄어버렸네잉. 어때요, 제가 참 노력을 잘 했죠?


 나는 안전벨트도 풀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우와! 우와! 하고 박수를 보냈다. 딱히 과속을 한 것도 아니었고, 승차감이 나쁘지도 않았다. 나는 몰랐고, 기사님은 아는 '더 나은 길'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사건들이 베테랑의 짬을 칭송하게 만든다! '진짜 어른'의 책임감과 판단력에 다시 한번 존경을 표했다. 정말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까 기사님 만난 거 후회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기분이 묘해진 건 기사님의 마지막 멘트 때문이었다. 적당히 흔한 문장인데, 그냥 이상했다.


"이러니까, 나 별점 다섯 개 줘야겠죠?"


 웃음 버튼이 고장 났다. 입꼬리를 당기던 실이 탁 끊어진 사람처럼 순간 미소가 가셨다. 별점, 이토록 심플한 사건의 인과와 이해관계에 출연하기에 너무나 돌연변이 같은 단어였다.



 기사님 덕분에 무려 14분이나 일찍 도착한 내가, 기사님을 인도로 모셔서 절을 올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반드시 별 다섯 개 드리겠노라'며 다짐을 하사해야 하는가?

 득을 본 건 전적으로 나다. 서비스 품질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기사님은 본인 업무를 수행했고, 나는 나의 과제를 수행했다. 이미 여기에서 우리의 공생은 마무리된 것 아닌가?


 


 순간, 내가 이 미용실을 선택한 이유가 떠올랐다.



 아, 별점이 높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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