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녀 Sh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즈 Nov 21. 2023

부엌을 그만 미워하고 싶다

에너지 배분이 관건


백종원 아저씨는 좋겠다.

직원들이 준비해 주는 요리 재료가 세팅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오목한 작은 종지에 오늘 쓸 분량만큼의 고춧가루, 설탕, 청양고추, 마요네즈가 가지런히 놓인 장면을 보면, 그렇게 세팅된 곳에 서서 휘리릭 요리해, 매콤한 오징어볶음 한 접시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훤하고 깔끔한 테이블 앞에 서서 팬에 기름을 둘러 잘 손질된 오징어를 탁탁 넣으면서. 요리 초보가 간과하기 쉬운 불의 조절과 같은 지점에서 섬세한 갖가지 팁으로 요리의 화룡점정을 찍는 백 선생의 모습은 요리 서민들에게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가정집은 1인 소상공인이다.

김엄마 혼자서 다 해야 하는 사업장이다.

김엄마는 뭘 먹을지 뚜렷한 계획이 없는 중에도 일단 마트에 가서 오늘 메뉴에 대한 물음표의 답을 채운다.


마켓컬리나 이마트로 장을 보더라도 구매목록에 생필품과 요리 재료를 담는  도파민이 전혀 생성되지 않는 건조한 일상이다.


어떤 방식으로 장은 봤건, 집에 도착한 장 본 물품두어야 할 자리에 정리할 터. 그 사이 오늘 쓸 재료가 무엇인지 생각해 이건 넣고 저건 빼고, 재료를 다듬으면서도 오늘 쓸 만큼 남긴 후, 나머지는 냉장에 소분할지 냉동에 넣어둘지 대책을 세우느라 머릿속은 분주하다.


이래서 요리는 과학인 것인가. 측정과 계량, 결괏값에 민감한 센스가 없는 김엄마에게 요리 밑작업이란 빨리 해치우고 싶은 에 불과하다.






김엄마의 가족 저녁 식사 시간은 5시. 하지만 오후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축축하다. 마치 몹시 하기 싫은 체력장이 5,6교시에 잡혀 있어서 오전부터 기운이 쏙 빠지는 느낌이랄까. 김엄마에게 저녁식사란, 억지로 김엄마를 끌고 부엌에 데려가 심사받는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라, 요리하는 내내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다. 뭘 하려 해도 이미 요리 전부터 심리적 에너지가 바닥난다. 그래서 백 선생의 화룡점정을 따라 하기 어려웠다. 뒷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어떻게 김엄마의 에너지를 아낄까. 애초에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부족한 그녀다. 노동의 집약은 그녀에게 최선의 결과를 제공한 적이 드물었다. 할 일을 세분화해서 에너지를 분산시켜야 한다. 조금씩 꺼내 쓰고 다시 충전한 뒤 또 쓸 수 있도록.





김엄마는 한 시간 더 일찍 3시부터 움직였다.

일단 양파나 파 같은 채소나 어묵과 같은 재료들을 봉지에서 꺼내서 씻을 것은 씻어두고 껍질을 까야하는 것을 까놨다. 마치 셰프가 편히 요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 셰프가 주방 세팅을 해 두는 것처럼 김엄마스스로를 오후 4시의 셰프로 모시면서 3시에 밑작업을 해 둔다고 생각하면 억울하지 않다.


10분에서 15분이면 충분한데, 이 밑작업을 해 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4시에서 5시 사이를 보내는 김엄마 마음의 만족감과 요리에 대한 흥미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밑작업을 해 두어야 여유가 생겨 국물 간도 좀 더 섬세하고 정성껏 요리할 수 있는 집중력이 생긴다. 밑작업을 하면서 필요한 재료를 챙겨보기 때문에, 혹시 빠질만한 재료를 다시 사둘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는 것도 덤이다.







비단 요리뿐이겠는가.

어찌보면 김엄마에게는 '미리'와 '소분'이 인생 전체에 적용된다. 아이를 키우는 아줌마로 살다보면, 돌발 상황을 수도 없이 마주한다. '미리' 할 일을 해 둔 김엄마의 하루는 예측불허의 고난도 담담히 넘길 여유가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던가.


꺼내 쓸 양파를 정리해 소분해 두듯, 오늘치 김엄마의 마음도 미리 꺼내 보송보송하게 잘 닦아두면 남아있는 우당탕탕 오후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겠다.   




이제 김엄마는 1인 주방 시스템 속에서 백종원 아저씨 같은 요리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미리 준비하고 소분한다면. 오늘 남은 재료로 내일의 요리도 기획하는 지경이다.


누군가는 일주일치 요리 식단표를 냉장고에 써 붙여 두면 아주 수월하다고 하던데, 아직 그 경지까지는 못 이르렀다. 미리미리 김엄마를 돕는 시스템이라도 잘 이어가면서, 요리 시간을 주저하지 않는 일상이 좋겠다고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딸의 시가 브런치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