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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작별 인사

by 레잇 블루머


L에게,


한쪽에서만 소식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묘한 일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기억은 지워진 듯한데,

그쪽의 시간은 여전히 내 앞에 남아 있으니까요.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공기와 냄새를 기억합니다.

먼 시간을 떠나온 뒤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과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쪽과 함께였던 시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그쪽은 나에게 자주 그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편지가 닿을 리 없겠지만,

문득 이렇게 불러봅니다.



L,

그쪽과 함께했던 시간은 여전히 내 안에 또렷합니다.

아침마다 반복되던 풍경,

같은 공기를 마시던 자리,

때로는 고단했지만 함께였기에

견뎌낼 힘이 있던 날들.

나는 그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떠날 수 있다고 믿었고,

나만의 길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어설픈 자신감이었습니다.

만류하는 목소리조차 잘난 체하며 뿌리치고,

큰소리로 미래를 약속하듯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꿈꾸던 길은 허상에 가까웠고,

뜻한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결국 사람들의 계산과 욕망에 휘둘렸고,

남겨진 것은 상처와 빚, 그리고

아프게 감당해야 했던 후회뿐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고된 몸을 이끌고

작은 이야기들을 배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느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쪽과 함께했던 자리에서는 나를 감싸주던 손길들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내가 나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더 자주 멈추고, 더 오래 숨을 고릅니다.



L,

나는 그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돌이켜보면 그곳은

내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안전한 자리였습니다.

뒤늦게 깨닫게 된 사실 앞에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겹겹이 쌓입니다.

그때 함께했던 얼굴들,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눈앞에 선합니다.


나를 믿고 지켜봐 주던 마음들,

그 기대를 저버리고 돌아서던 순간의 표정들.

지우려 했으나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그 모든 것이 이제야 무겁게 다가옵니다.



L,

고맙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나는 실패했지만, 그쪽에서 보낸 시간만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도 버틸 수 있다는 걸 압니다.

내 이름은 그쪽 기억에서 오래전에 지워졌을지라도,

그쪽의 이름은 나에게 오래도록 남을 겁니다.


부디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하길.

나는 여기서 내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오늘은 그저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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