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느리다.
배송이라는 일이 속도와 효율을 요구하는 세계라면,
나는 그 세계에서 언제나 뒤처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느림보 배송원이다.
체력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고,
근력과 지구력은 평균 이하다.
운전도 공격적이지 않다.
과속이나 신호 위반은 절대 하지 못한다.
골목길에서는 극단적으로 방어 운전을 한다.
큰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짐을 내리는 일도 거의 없다.
꾸역꾸역 주차 공간을 찾아 들어간다.
질서를 지키는 것이 곧 나의 원칙이자 방식이다.
그러니 다른 기사들이 하루 50건 정도를 기본으로 해낼 때,
나는 대부분 40건 선에서 멈춘다.
가끔 운이 좋아 50건을 넘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40건을 간신히 넘어서는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종 건수는 그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차이가 나봐야 네 다섯 건 이내의 정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여기엔 비밀이 있다.
‘버프’를 받기 때문이다.
정직원 형님들의 버프.
내가 일하는 마트에는 정직원 기사 형님 두 분이 계신다.
매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분들은 본인들의 배달 건 중 서너 건을 내게 슬쩍 넘겨주신다.
“우린 월급제라 건수가 수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게 형님들의 말이다.
다만 관리자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나는 물론 늘 사양한다.
불공정하다고, 마트에 손해라고.
하지만 형님들은 멈추지 않는다.
“네가 다른 애들과 다르기 때문에 챙겨주고 싶다.”
처음엔 마트에서 스치듯 전표 한두 장을 쥐어주더니,
그 방식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고도화되었다.
스쳐가며 손에 쥐여주기,
차 대시보드에 몰래 붙여놓기,
차 창문 안으로 던져주기,
배달 중간에 만나서 건네주기,
장부에 자기 건을 내 기록란에 적어두기,
마트에서 가까운 물건 몰아주기,
심지어 관리자 보는 앞에서 대놓고 주기까지.
솔직히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차별 대우일 수도 있고, 길들이기일 수도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형님들은 그런 계산과 상관없이 계속 나를 챙겨 주셨다.
딱 한번 저녁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그때 들은 얘기는 단순했다.
“초심만 잃지 마라."
그때 나는 깨달았다.
짧게는 며칠, 길어야 몇 달 사이에 사람이 교체되는 이 배달판에서,
이 분들은 나와 계속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걸.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인정받는 태도 두 가지가 있다는 걸.
첫째, 싫은 티를 내지 않는 것.
하기 싫은 일을 맡았을 때 표정부터 굳히는 사람은 결국 신뢰를 잃는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웃으며 해내는 쪽이 실익이 있다.
둘째, 생색을 내지 않는 것.
잘한 일을 떠벌리는 순간, 그 가치는 반감된다.
오히려 겸손하게 흘려보내는 태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
나는 그 두 가지를 지켜왔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만의 보상을 받고 있다.
쉽게 말해, ‘이쁨’을 받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건 '속도'보다 '방향'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맞는 말이다.
나는 느리지만 이 현장에서 원하는 방향과 맞았다.
그래서 남들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20대 후반의 청년이 새로운 지입기사로 들어왔다.
그의 첫 출근일은 마침 나의 휴무일이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되었다.
출근 첫날 47건을 소화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배송은 처음 해보는 일이라 했다.
믿기지 않았다.
나는 첫날 12시간을 뛰어도 35건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우리 동네에서였다.
그는 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와,
처음 해보는 일을,
낯선 지역에서,
10시간 만에 47건을 해냈다.
다음날 그를 보게 되었다.
180이 넘는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청년이었다.
성격도 좋았다.
솔직히 말해, 높은 연령대가 주를 이루는 마트 현장은 여전히 꼰대 문화가 있다.
40대가 꺾인 내가 막내였을 정도로 연령대가 높은 곳에서,
20대인 그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지만 전혀 이질감 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모든 지시를 밝게 받아들이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업무 능력은 더 놀라웠다.
일주일도 안 된 신입의 장부 기록이 내 것보다 늘 많았다.
나는 경쟁심보다는 씁쓸함을 느꼈다.
젊음은 정말로 큰 무기였다.
나는 그의 배달 물건을 함께 챙기며 특이한 주소나 조심해야 할 포인트를 알려주었고, 내 물건을 양보하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배달 중에 아이스커피를 사 와 형님들에게 돌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리고 마트의 배송팀장은 그를 ‘새로운 에이스’라 불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은 한 주 가운데 마트에서 가장 물량이 많은 날이다.
아침 일어났을 때, 나는 몸이 평소보다 가볍다는 걸 느꼈다.
출근을 하니 물건이 벌써 10개가량이나 나와 있었다.
보통 마트는 오후 시간대가 더 붐비기 때문에 오전 중에는 한 차례씩 회전하는 물량이 1~4개 정도가 일반 적이었다.
그렇게 오후 2시 정도까지 알뜰히 20개만 채워 놓으면,
오후 물량이 증가하면서 40건 이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나의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날 12시, 나는 이미 20건을 찍고 있었다.
그때부터 뭔가 감이 왔다.
슬쩍 확인해 보니 내가 그 청년보다 근소하게 앞서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날,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승부가 시작되었다.
오후 12시, 20건.
오늘은 뭔가 다르다.
느낌이 온다.
집중하자.
괜히 흥분하지 말고.
내 페이스로 가는 거야.
이 분위기를 살려야 해.
점심시간인데... 오늘은 건너뛰자.
정 배고프면 이따 초코바라도 사 먹으면 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시동을 건다.
오후 2시, 31건.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지금 마트 안쪽에 있는 화장실을 들렸다간 리듬이 깨진다.
그래, 이번 코스 중 놀이터를 지나는 길이 있지.
가는 길에 그쪽에서 해결하자.
짐을 다 싣고 화장실을 들르지 않은 채 또 한 번 시동을 건다.
오후 3시, 39건.
아, 신호에 걸리겠네.
지금 우회전하면 어떻게 되지?
그래, 이번에 빠지면 바로 다음 주소와 연결되는 골목이 있다.
좋아, 여기서 우측으로 빠진다.
내비가 알려주는 길을 무시하고 내가 알고 있는 길을 택한다.
오후 4시, 46건.
아직도 내가 앞서 있다고? 이 친구 무슨 일이 있나?
자, 자. 집중하자.
4시 이후가 진짜 승부처다.
지금은 물량 욕심내지 말고, 작은 단위로 끊어서 가야 해.
곧 도로에 차들이 몰릴 시간이니까.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또 한 번 짐을 챙겨 출발한다.
오후 5시, 54건.
간신히 주차 후 잠시 고민한다.
거리가 조금 있는데 카트를 꺼낼까?
물건을 살짝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본다.
들을만하다.
지금은 그냥 들고 가자.
시간을 아껴야 해.
이 페이스대로라면 60건 돌파는 확정적이야.
시간이 흐른다.
나는 점점 더 무아지경 속으로 들어간다.
오후 6시, 64건.
엘베가 있네?
3층인데...
엘베가 내려오려면 한참이다.
그냥 계단으로 가자.
나는 주소를 읽고, 물건을 내리고, 다시 시동을 건다.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감각은 예민해지고,
머릿속의 계산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오후 7시.
배송 접수 마감 시간.
마지막 마감 물량 10건은 청년과 내가 5개씩 나눠 싣는다.
내가 제출한 최종 배송 건수는 69건이었다.
마트 역사상 최고 건수라고 했다.
게다가 오늘 나에겐 그 어떤 버프도 없었다.
청년은 59건이었다.
그 또한 최단 기일, 최다 건수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사람들이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고, 마치 한 편의 경기를 관람한 듯이 열띤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장부를 덮고,
퇴근 인사를 하고,
청년과도 눈빛을 교환했다.
그의 얼굴에서 언뜻 지친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마감 물량 배송을 위해 다시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그저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날.
운이 좋은 하루였다.
퇴근 후, 저녁 8시가 훌쩍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가족들을 삼겹살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에게 고기를 구워주고,
나는 서비스로 나온 껍데기에 소주를 한 잔 했다.
한동안 끊었던 술.
내일도 출근이지만, 오늘 딱 한 번만.
특별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자리가 끝날 때까지 나는 계속 고기를 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마트에 들렀다.
둘째가 얼마 전부터 갖고 싶다던 보드게임을 사주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직도 거리는 환했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기억에 남겠구나, 그렇게만 느꼈다.
오늘은 모든 게 맞아떨어진 하루였다.
컨디션, 물량, 상황, 판단, 그 모든 것이.
내가 다시 그 청년을 넘어설 수 있을까?
아마 몇 번 정도는.
그가 며칠만 더 경험을 쌓으면,
다시는 이길 수 없겠지.
집으로 돌아와 씻고 누웠다.
오늘이 내 생에 몇 안 되는 완전한 날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일 아침, 과연 내 몸이 일어나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