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Jul 04. 2023

수박 껍질도 먹는 여자


 수박을 살 때부터 껍질까지 먹을 생각이었다.


커다란 수박 한 통을 뽀득뽀득 닦았다. 반으로 가른다. 잘 익었는지 족한 ! 소리를 낸다.  잘린 면이 아래로 가도록 안정감 있게 도마 위에 올린다. 빨간 속살이 드러날 때까지 무한 반복. 껍질을 벗겨낸다.  껍질에 빨간 속살이 달라붙어 아까워 않는다. 이번엔 껍질을 먹을 거니 크게 상관없다. 남은 반통도 똑같이. 껍질 수확에 어간.


 같으면 바로 직행 버스 태워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보냈을 텐데. 이번엔 한 조각 한 조각 소중히 모았다. 치 알맹이와 거죽 입장이 뒤바뀌기라도 한 듯. 느새 껍질은 양푼 한가득이 되었다.

   

이번에는 과도를 이용. 바깥 초록 겉껍질을 벗겨낸다. 하얀 부분이라도 단단하다 생각되는 부분은 과감히 잘라낸다. 야들야들 흰 속살만 남긴다.


그럼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수박 속살을 마음 가는 데로 채 썰어 톡톡 소금을 뿌려  둔다. 30분 후 물기를 꼭 짠다. 고추장+고춧가루+설탕+액젓+간 마늘+깨소금+ 참기름. 양념은 기호에 맞게 가감. 오이무침 하듯 조물조물 머무려 낸다. 수박 껍질 무침은 오이와 노각 무침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오독오독 좀 더 단단한 식감이 매력적이다.







수박껍질 무침은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해주셨던 음식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요즘. 수박껍질까지 먹니. 어찌 보면 촌스럽고 궁상떠는 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음식에서 할머니를 느낀다. 할머니는 뭐든 귀히 여기고 허투루 버리는 것이 없으셨다. 수박 껍질도 맛깔나게 무쳐내 여름 밥상 위 별미처럼 올리곤 하셨다. 


손이 많이 가서 자주 만들지는 않지만 나도 여름이면  한 번쯤 해 먹는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수박 껍질을 다듬고 갖은양념 넣어 할머니가 하듯 그렇게 흉내를 낸다.


갓 지은 뜨끈한 쌀밥 위에 막 무쳐낸 채를 넉히 올려 쓱쓱 비빈. 그냥 먹어도 좋지만 달걀 프라이 하나  얹고, 참기름까지 한 바퀴  돌려주면.


그건 사랑이 된다. 벌써 침샘이 마중을 나오다니. 서둘러   숟가그득  입 안으로 져간다. 혀에 닿자마자 어느새 나는 할머니를 만나러 어린 시절로 달린다.


잠자리에서 들려주시던

백번 만 번 들어도 질리지 않았던 6.25 이야기

잃어버릴까 바지 꼭꼭 숨겨 꿰매두셨다 주민증

코앞까지 날아들던 순찰기

할머니집 앞마당 알록달록 너른 채송화

반짝반짝 윤이 나던 쪽마루

미제 체리 가루 주스와 독특했던 그 맛

장에 가서 사주신 소매가  풍성했던 원피스

그리고 큼직한 리본이 달린  빨간색 샌들...







할머니 인생 후반기는 두 번의 고관절 수 휠체어에 의존해야만 했다. 한 번을 편히 눕지 못하고 생활하셨. 지어 잠도 아서 청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할머니.




하늘나라에서는 

체어 벗어던지고 신나게 뛰어다니시길. 


소녀처럼

깔깔 웃어대며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도 하시길.


뒷동산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 오르시길.


이제는

 다리 쭉 펴고 편히 주무시길.




올여름도 어김없이 수박 껍질 무침으로 할머니를 소환한다. 그렇게   한 번. 할머니를 짙게 추억해 본다.


이전 07화 그런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