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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15. 2022

'전업맘은 백수인가요?'

백수, 그 사전적 의미를 묻다.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은, 기분마저 근사했던 그날 오후.

하교 후 이상 하리만큼 땀범벅이 된 아이가 가방을 내던지며 물었다.   

  

엄마, 백수가 뭐야?”          


난 속사포 래퍼라도 된 듯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내뱉었다.

. 백수는 일 안 하고 노는 사람이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가 또 물었다.  

    

그럼, 엄마도 백수야?”     






같은 반 친구 윤우가 너네 엄마는 집에서 노니까 백수라고 했단다. 자기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백수가 아니라면서. 

    

무방비 상태에서 쨉. . 펀치를 후려 맞고는 정신이 혼미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미 말은 더듬고 있었다. 배 배...  백수는 일할 능력이 있는데 일 안 하고 노는 사람이지.

엄마는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너 밥까지 해주잖아.

웅변하듯 얘기하는 내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뒤집어지고 있었다.

난 마음속으로 연신 외쳐대고 있었다. 빨리 마땅한 다른 것을 더 생각해 내라고.

불현듯 해외 출. 입국 심사서가 떠올랐다. 뭐라도 생각해낸 나 자신을 칭찬하며 서둘러 말했다.

출. 입국 심사서 직업 체크란에 주부도 있어.

이번 여름휴가로 태국 갈 때, 엄마는 당연 직업으로 주부를 체크했단 말이야.

다음에도 그 친구가 또 그러면, 주부는 절대 백수가 아니라고. 똑바로 말해줘!

신신당부를 넘어 단호한 어조로 쐐기까지 박았다.   

  

아이에게 맞는 말을 하고 돌아서기는 했지만

주부인 듯 백수인 듯, 백수인 듯 주부 같은 마음.

이 쪼그라드는 기분은 알 수 없었다. 뭐 이리 주절이 주저리 설명했나 싶기도 했다.

교대에 가고 싶었지만 폭망한 수능 성적으로 입학 원서조차 낼 수 없었던  

인생 첫 쓰라렸던 경험까지 한대 휘몰아쳤다.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켰다.

검색창에 백수라는 두 글자를 쳐봤다.     

[백수; 한 푼도 없는 처지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그 뜻을 한 땀 한 땀 음미했다.   


  

한 푼도 없는 처지


남의 편도 모르게 결혼 전 꼬불쳐 둔 돈이 있다.

회사 생활하며 월급에서 제일 먼저 떼어 매달 꼬박꼬박 모은 돈. 부모님께서 결혼 자금을 주신 덕에 부릴 수 있는 호사다. 그 돈을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 것도 남편 몰래!

큰 소리 뻥뻥 치며 내놓을 그날을 상상하며.

으흐흐. 음흉에 가까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꼬불쳐 둔 돈이 나를 위로해 주는 순간이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눈뜨자 마자는 물론 아이가 잠들기 직전까지도 일. . 일의 연속이다.

아이 잠자리 독서, 팔베개, 애착 인형 챙기기, 자장가 불러 주기, 등 긁어 주기.

아이의 등은 왜 이리 매일같이 잠들기 전에만 가려운 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의문이다.

내가 왜 하는 일이 없어? 갑자기 울분이 토해진다.     


빈둥거리는 사람


빈둥거림은 특별히 남편과 아들의 출타 중에만 행하는 일이다. 일종의 비밀 놀이 같은 거다. 특히 가족들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오후, 막바지 자유 만끽의 시간을 제일 애정 한다. 혹자는 끝나가는 자유 시간이 

아쉽다 할 수 있겠지만 이때의 몰입은 최고조에 달한다.

깊은 쉼이 있기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은 무리 없이 세상 바쁜 아줌마 코스프레가 가능하다.

고로 난 좀 찔리긴 하나 표면적으로는 안 빈둥거리는 사람이다.  

        



사전적 의미로도 백수가 아님이 증명됐다. 당당하게도 난 백수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평소 느껴보지 못한 이 답답함은 뭐지. 답답함의 밀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백수라는 두 글자가 꽈악 들어찬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운 일상.

훅 들어온 아이의 한 방으로 그렇게 인생 두 번째 사춘기를 맞았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백수가 아니라고

사전까지 소환해가며 발버둥 치긴 했으나

다음번은. 백수 느낌. 안 나는. 그런 삶을. 살아 보고 싶다.           



사진 출처_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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