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야 사는 여자

인생 기니까, 지금 내가 선택한 일자리는

by 지영민

일을 쉬어 본 적이 있던가. 육아 휴직을 했던 삼 년동안에도, 돌아갈 곳이 있는 직장인이었으니까. 내 통장에 매월 보수가 꽂히는 것을 반나절쯤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많든 적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아이 둘을 키우는 건 액수로 환산된 바 없었기에, 내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길은 밖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월급이 점점 많아졌고, 짊어져야 하는 일의 무게는 늘어갔다. 가정, 아이,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보다는, 직장에 몰입해야 했다. 휴대전화를 붙들고 살면서 새벽, 휴일 없이 부대를 들락거렸다. 부하직원들 출퇴근부터 업무 성과, 인사관리도 내 몫이었고, 내 마음도 못 돌보면서 그들이 힘들지 않은지 살펴야 했다.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의 조언대로, 하찮고 소소한 즐거움을 매일 챙기며, 일의 부담과 괴로움을 상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필라테스 센터에도 꼬박꼬박 나가고 짬짬이 색칠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친한 친구들 만나 수다도 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일의 무게가 그 모든 즐거움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즈음 '내 안의 작은 아이'는 더 크게 울어댔다. 고백건대, 나는 내가 낳은 아이들을 '그 아이'와 동일시한다. 큰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최선의 대접을,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해 주어야, '그 아이'가 평온하다. 이게 나란 인간이다.


일에 모든 걸 쏟아붓고 감정을 다 써 버리고 나니, 아이들과 책 한쪽 읽으며 대화할 여유도 없고, 연산 학습지 2쪽 푸는 숙제를 확인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내 일부라고 생각했던 일이, 가장 중요한 욕구를 채우지 못하게 했다. 내 삶의 '수단'이 '목적'과 자리를 맞바꾼 것이다.


내 몸과 마음도 이상신호를 보냈다. 외이도염, 이석증, 방광염, 위경련, 허리디스크 등 병을 달고 살았다. 어쩌다 쉬는 날에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지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기보다, 그냥, 무얼 할 수가 없었다. 박사논문에 언제 착수하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꿈속에서도 일을 했고, 아침에 눈을 뜨면 한숨부터 나왔다.


내 삶이 완전히 균형을 잃고 스트레스와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 '내년에 진급 들어가는데 열심히 해야지'라는 최후의 주문이 들려왔다. 다행히도 그 주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상이 도우신 거였다.


무턱대고 그만하기로 했다. 이직 전에 훗날을 도모하는 지혜 따위는 없었다.


10개월쯤 퇴직수당을 받으며 나와 아이들만 생각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오전에 운동하고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쓰고, 밥은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났다. 아이들 생활도 지켜보고 진로나 입시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내가 선물한, 달콤한 10개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알고 있었다. 나는 벌어야 사는 여자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도. 그때 간호대학 실습강사 채용 공고를 봤다.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고민 없이 지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진했다.


강사 일은, 비정규직이라는 분류에 넣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어차피 박사공부와 병행해야 하니 시간을 조금만 할애하는 것이 좋겠죠?'라는 '빛 좋은’ 개소리를 들으며, 일주일에 2시간쯤 배정받았다. 그것마저도 건너뛰는 주가 있었다.


봉사활동이라면 '참, 고맙다'는 인사라도 들을 테고, 초보강사였다면 소중한 경험이라고 애써 의미 부여했을 거다. 이력서는 왜 내라고 한 건지, 배정받은 과목들도 내 세부전공과 맞지 않았다. 내 책상은 바라지도 않는데, 병원 가운 보관할 곳마저 없어서 매번 들고 다녀야 했다.


두 달 남짓 갈등했다. 이제 와서 교원으로 경력을 더 쌓고 박사 졸업하면, 어디 시골 대학에 내려가서 아등바등해야 할 텐데, 아이들 전학시키고 이사할 만큼 이 일을 사랑합니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근처 학교에서 보건지원강사로 며칠씩 나와 달라고 연락이 오곤 했는데, '빌어먹을' 실습강사 일 때문에 그마저도 번번이 고사했다. 어느 신생 병원 간호관리자로 가자니 뼈를 갈아 넣어야 할 게 뻔했고, 이 나이에 3교대 근무하는 건 내 명을 재촉하는 꼴이었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간호사들이 기피하는) 주간 의원 일을 찾으니 보수는 적은데 토요일에도 출근하란다. 구립 요양원도 야간, 주말 당직이 있어서, 주말부부로 홀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내 상황과 맞지 않았다.


석 달쯤 방황하다가 그나마 내게 친숙한, 보건소 일을 하게 되었다. 한자어로 '기간제', 외래어 약칭으로 바꾸면 '알바'라 할 수 있겠다.


8월에 무급 휴가를 다녀왔더니, 무단결근과 마찬가지로 다음 달 휴가가 안 나왔다. 구청 기간제 담당자, 고용노동부 노무사까지 다 쑤셨는데, 그게 법이고 직장 재량이란다.


월급은 일개 담당자가 규정을 더듬거리며 계산해서 지급되고, 그마저도 어떤 달은 그 담당자 실수로 며칠 늦게 입금되었다. 명세서는 요청해야만 겨우 받을 수 있었고, 기간제 근로자 취업규칙은 어느 심심산중에 감춰두었는지 구경도 못 해 봤다.


월급이 최저 시급에 수렴하다 보니, 일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매일 주지시켜야 한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든 이웃들을 돕는 거야.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인데, 좋잖아? 우리 애들 학원비 벌자. 애들이 좋아하는 고기 한 번 더 사 먹일 수 있잖아. 일이 어렵지는 않잖아? 매일 출근하면 규칙적인 생활 쌉 가능! 갖가지 이유를 대며 신발을 신는다, 이 신발이 일터에 데려다줄 거라며.


지난달, 집에서 좀 더 가까운 보건소로 옮겼다. 출퇴근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 근무시간도 1시간 짧다, 그만큼 덜 받는 조건으로. 아침시간이 여유롭다. 꽃단장하고 웃는 얼굴과 여유로운 손길로 아이들 아침식사와 등교를 챙긴다. 아침 햇살에 빨래도 탁탁 털어 널고, 청소기도 슁하니 한 바퀴 돌려놓고 러시아워를 피해 출근한다. 바로 이거였다, 지금 내가 원하는 일.


*사진 : Unsplash (Vanessa Murri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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