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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나 Nov 18. 2023

김장 전쟁

주부들의 동계 훈련

붕어빵, 군고구마, 수능, 첫눈 그리고 김장.

매년 이맘때 맘카페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김. 장. 이 두 글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단순히 한국인의 주식 중 하나가 아니란 말이다.


김장 준비 채칼 추천부탁드려요

굴보쌈 VS 수육보쌈 승자는?


이런 질문도 올라오는데 저 정도는 귀여운 수준의 질문들이다.

김장 시즌에 본격 돌입하면 점점 어두운 질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페라의 유령 조승우 막공 VS 시댁 김장

김장하러 가기 싫어 출근을 택했습니다

남편 없이 시댁에 김장하러 갑니다.

김치 안 먹고살 수 있습니다.

김치가 대체 뭔가요!!!!!!!!!!!!!


등등..


나까지 고민하게 되는 오페라의 유령 그것도 조승우 배우의 마지막 공연과 시댁 김장 날이 겹치다니...

신이여 허락하소서~ 소리가 진짜 절로 나온다. 장난 같은 운명, 운명 같은 장난이랄까.


실제 내 최측근 중에도 시부모님이 직접 밭에 심으신 배추를 뽑는 것부터 김장의 서막을 올리는 집도 있다.

절임 배추라는 남들이 조금 쉽게 가는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분이다.

그 지인 앞에선 누구도 김장이 힘들다고 내색하지 못한다. 존경의 눈빛과 박수를 보낼 뿐이다.



하루는 그 지인이 김장을 끝내고 만난 날, 이번 김장은 새벽 2시에 끝이 났다고 했다.

자기 정말 쓰러지는 줄 알았다고 하길래 아니 무슨 김장을 새벽까지 하냐고 물었다.

배추는 전날 절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속 재료 만들어 버무리면 오후에 끝나는 게 보통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지인의 시댁에서 같이 김장 행사를 치르는 시누이께서 김장이 끝나가는 시간에 밭에서 다 뽑혀 나오지 못한 배추들이 눈에 거슬린다고 했단다.


아니, 거슬릴게 따로 있지 밭에 있는 배추가 거슬리다니.

배추가 무슨 싸인을 보냈길래 배추에게 연민을 느끼기라도 하신건지.

그러면서 끝나가야 하는 김장판에 시누이가 몸소 새 배추를 뽑아 나르며 신나게 굵은소금을 치기 시작해 그 꼴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이 울어주고 싶었다.



오래 먹고 싶은 엄마의 김장 김치

부끄럽게도 주부 인생 10년이 지났지만 김치를 직접 담가본 적이 없다.

해마다 다 준비해 놓은 김장판에 속만 채워 넣는 김장 체험 정도만 하고 있다.

우리 애 보니 요즘 유치원에서도 이 정도의 김장 체험을 하는데 말이다.

건강한 엄마가 아직 곁에 계시기에 감사하게도 매년 이맘때가 되면 아삭하고 엄마의 손맛으로 만들어진 우리 집표 새 김치를 먹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엄마가 담가주는 김치를 몇 해 더 받아먹을 수 있을까 싶다.

100세 시대니까 앞으로 30년은 더 끄떡없으려나, 꼭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김치 때문에 엄마가 만수무강했으면 하는 이 부족한 딸을 용서하세요.


언젠가는 배워야 하는 무형 문화제가 따로 없는 엄마 김치

마트 진열대 김치 코너를 보면 계절을 뛰어넘는 갖가지 김치들이 판매되고 있다.

엄마의 열무 김치는 여름에나 먹을 수 있는 계절템이지만 마트만 가면 사계절 각종 김치를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손주 사랑으로 보내온 그 김치는 찾아볼 수 없다.

어린 손주가 쉽게 먹을 수 있게 매운 재료는 넣지 않은 뽀얀 동치미 국물의 김치.

김치를 먹는 손주 눈까지 재밌으라고 꽃 모양, 별 모양으로 찍어 들어간 당근과 사과, 배까지 들어있는 그런 김치는 마트에서 팔지 않는 귀한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김장을 치른 주부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우리에겐 절임 배추라는 치트키가 있지 않습니까?

절임 배추가 없던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저는 그 절임 배추를 배송해 주시는 택배 기사님들만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집니다.

아마 절임 배추라는 아이템이 없었다면 우리의 허리와 승모근은 한층 더 깊은 통증이 남았을 테니까요.

심지어 절임 배추 용량에 맞게 양념까지 만들어 함께 판매하는 곳도 늘어나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런 세상이니 김장 행사를 거대한 밀키트 요리라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에겐 수육이라는 마약과도 같은 김장의 자매품도 있잖아요.


그렇지만 이런 세상에 포함될 수 없는 집들도 있겠죠, 제 지인 시댁처럼 배추 절이기부터 아니, 밭에서 배추를 뽑아 오는 것에서부터 김장이 시작되는 집들도 아직 많을 테니 말이죠, 수육 먹는 입의 즐거움 따위 고생에 비하면 그딴거 안먹고 말란다!라고 외치실 분들도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 분들께는 더 이상 구태연한 위로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여러분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일 년 또 맛있는 김치를 먹는 영광을 주는 귀한 손길이라는 것에 제가 존경과 박수를 보내드릴게요.



사진 출처: Pixabay @mi yun, @ally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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